소설리스트

황금가-90화 (90/524)

황금가 (90)

금장생이 아수수의 제안을 수락한 건 돈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기울게 만든 건 대륙황가의 주인이 마가라는 사실 한 가지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황금전가의 멸문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해 왔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황금전가 같은 거대 기업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완벽하게 사라지는 건 금장생 생각엔 절대로 불가능했다.

다만 한 가지, 중원 상단 중 소위 대형으로 불리는 상단들이 힘을 합치면 가능할 수도 있다.

대륙황가를 파 보면 황금전가 멸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신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여기서 공자를 대신해 달라는 건가요?”

“내게 협박 편지를 보낸 자는 이곳 어딘가에 숨어서 날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좋아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남편에 대한 건 누구누구 알게 됩니까?”

“나 혼자만 알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참입니까?”

“네.”

“힘들게 사는군요.”

“왜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는 건 믿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이번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아무튼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갈 거죠?”

“잠시 후에 떠나야 합니다.”

“그럼 나도 이야기를 하고 와야겠네요.”

“뭐라고 하실 겁니까?”

“폐관한다고 해야지요.”

“지금 부인이 처한 상황에서 폐관을 한다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상황에서 폐관이 어울리지 않는 건 맞아요. 하지만 나를 비롯하여 내 일행은 남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가주직을 맡아야 할 사람은 나예요. 여덟 가문의 수장을 나타내는 팔왕의 직위는 박탈당하겠지만 마가 가주 직위는 그대로 유지될 거예요. 그리고 마가 가주인 마왕은 가장 강해야 해요.”

“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다른 가문과 달리 우리 마가에는 승천비무昇天比武라는 게 있어요. 십 년마다 한 번씩 열리게 되는데, 올해가 승천비무가 열리는 해예요.”

“언제 열립니까?”

“십이월 달에요.”

“승천비무에 대비한 폐관이라고 하면 그들도 이해할 거란 말이군요.”

“맞아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올 거죠?”

“이르면 내일 저녁이면 끝날 테고, 길어지면 이삼일 더 연장될 겁니다.”

“일백여 명이나 되던데…….”

“인원수는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아수수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지금까지 금장생을 잘못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금장생을 자신보다 두어 수 아래로 보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자였다.

“한 시진 후에 은밀하게 제 방으로 오세요.”

“알았어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신술을 펼쳐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금장생은 탁자 위에 놓인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수수를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도망치듯 떠나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무림으로.

“이번에는 금장생이 아니고 적천영이니까.”

금장생은 먼저 유마환용대법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앞 장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을 읽은 후 내려놓고 마경을 집었다.

마경은 마전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렇다고 해도 무림에 나타나면 혈겁이 일어날 정도로 강했다.

양극마신만마권兩極魔神萬魔拳, 군림천하보君臨天下步, 마신행魔神行, 군림파천지君臨破天指가 적혀 있었다.

“어?”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양극마신만마권은 적천영이 지니고 있던 마전에 나와 있던 적수마신만마공에 비해 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권법은 물론이고 검법, 도법, 장법으로 모두 사용 가능해 활용도로 봤을 땐 더 유용할 것 같았다.

“그걸 모르진 않을…… 아!”

문득 금장생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양극마신만마권이 강하긴 한데 큰 약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양극신공과 비슷한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절반의 위력도 나오지 않는 무공이라는 점이었다.

“창안한 사람이 다르다는 거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 또한 두 번을 읽고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보법을 펼쳐 보았다.

군림천하보는 총 삼백예순다섯 발자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금장생은 발자국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번 계속하자 점차 익숙해졌다.

“군림천하보란 명칭에 어울리는 무공이네.”

금장생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군림천하보는 다른 보법과 달랐다. 빨리 움직일수록 강한 힘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보법이었다.

“이런, 늦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무공 비급을 들고 지하에서 나갔다. 어느새 한 시진이 훌쩍 지난 거였다.

그의 집무실에는 아수수가 들어와 있었다.

“귀신같네요.”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자신으로 변한 아수수의 얼굴은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곧바로 태극선의를 벗었다. 그리고 법기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강신술에 대해 나온 책 같은 거 있나요?”

아수수는 옷을 입으며 물었다.

“물론이죠.”

금장생은 천야로부터 받은 강시비전을 꺼내 아수수에게서 받은 비급 두 권과 함께 건넸다.

“이건…….”

아수수는 비급 두 권을 보았다.

“이 속에 다 있습니다.”

금장생은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걸 벌써 다 암기했어요?”

“다들 그런 거 아닌가요?”

“끙!”

아수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튼 제 역할 잘해 줄 거라고 믿습니다.”

금장생은 상의를 벗고 암역에서 얻었던 방패 형태의 갑옷을 가슴에 댔다.

“묶어 드려요?”

끈이 달려 있는 걸 보고 아수수가 말했다.

“그래 주면 좋고요.”

금장생은 아수수 앞으로 등을 댔다.

“방팬가요?”

아수수는 줄을 묶으며 물었다.

“갑옷입니다.”

“갑옷요?”

아수수의 눈이 커졌다.

갑옷과는 전혀 거리가 멀게 생겼는데 갑옷이라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줄을 다 묶고 물러났다.

“갑옷 맞습니다. 이제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서 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런데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인가 보죠?”

“네.”

“굳이 그걸…….”

아수수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뒤에 있던 금장생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금장생이 떠나는 어떤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서운 사람이네.”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강하면 강할수록 더 좋을 수도 있지. 이젠…….”

그녀는 탁자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금장생으로부터 받은 강시비전을 펼쳤다.

* * *

―아직 찾지 못했느냐?

살기 어린 목소리가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그게…….”

전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관의 처리는 사당에 집어넣는 걸로 끝난다. 관 속 내용물은 보지도 말라고 해서 궁금함에도 불구하고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동영으로부터 밀수한 은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은의 가치는 명나라가 동영보다 두 배 비싸다. 따라서 은은 사 오기만 하면 두 배의 차익을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상부는 수십 년 동안 은을 밀수하였고, 일수한 은은 관 속에 집어넣어 장상문으로 운송했다.

장상문으로 들어온 관은 사당으로 옮겨 놓으면 상부에서 알아서 가져갔다.

일 처리는 다른 때와 다르지 않았다.

관을 가져다 놓고 이틀 후 사당으로 가 보았다. 예상대로 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이번 일도 잘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관 속의 내용물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각 관당 은 일만 냥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은은 온데간데없고 흙으로 채워져 있다고 했다.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관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관을 옮긴 부하들도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

다만 시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관을 열고 내용물을 빼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만난 자가 누구냐?

“선착장 건달들뿐이었습니다.”

―장생을 죽여 달라고 청부를 했느냐?

“네.”

―청부 금액은 얼마냐?

“그게…….”

―그놈들을 찾아가면 금액은 바로 나온다. 거짓말하면 네놈의 목을 칠 것이다.

“이만 냥입니다.”

―이만 냥이나 준다고 했단 말이냐?

“죽은 문주의 비밀 금고를 찾기만 하면 그 정도 돈은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 돈이 많다고 자랑질을 했구나.

“하지만 그자들은…….”

―별것도 아닌 장의사의 총관이 이만 냥이라는 거금을 낸다고 하는데, 건달들이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느냐?

“그, 그자들이 훔쳐 갔단 말입니까?”

―내가 그 건달이라면 경쟁사 주인을 없애 달라는 청부에 이만 냥이란 거금을 선뜻 내놓는 자가 있다면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니, 이만 냥을 내놓을 정도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거라 확신하고 뒷조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뒷조사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감시다.

“그럼 그자들이 저를 감시하다가 관을 옮기는 저를 봤을 거란 말입니까?”

전욱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놈!

슉!

푸른 광채 하나가 전욱을 향해 쏘아졌다.

푹!

“컥!”

전욱은 목을 그러쥐었다. 그의 목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비, 빌어먹을…….”

전욱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곧 전욱은 풀썩 쓰러졌다.

스윽!

전욱이 쓰러지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장상문을 벗어났다.

잠시 후 검은 그림자는 전에 전욱이 관을 넣어 두었던 사당 앞으로 갔다.

그가 도착하자 사당 안에서 오십여 명이 나왔다.

상투를 틀고 나막신을 신고 기다란 장도와 단도를 나란히 허리춤에 찬 이들은 동영인이었다.

“지금부터 낙하 선착장으로 간다.”

“하이!”

동영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출발한다!”

파앗! 파앗! 파앗!

동영인들은 일제히 바닥을 찼다.

그들의 신형은 십 장씩 쭉쭉 나아갔다. 동영 무인은 내공이 약하다고 하는 통설을 무색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묻혔다.

* * *

망루를 떠난 금장생이 먼저 들른 곳은 도를 맡겼던 대장간이었다.

대장간은 불이 꺼진 채였다.

금장생은 문을 두드렸다. 잠잘 시간이라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뉘시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어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나왔다.

“맡겨 놓은 물건 찾으러 왔습니다.”

금장생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야심한 밤인데…….”

노인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아직 안 됐습니까?”

“아닙니다. 다 됐습니다.”

노인은 한편으로 가서 기다란 도를 꺼내 왔다. 금장생이 역천영면마진이라는 곳에서 주워 온 도였다.

“그런데 이런 도刀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대장장이 노인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인들이 사용하는 도가 아니라서요.”

“그럼 이런 도는 누가 사용합니까?”

“곤도鯤刀라고, 어촌에서 고래를 자를 때 사용하는 돕니다.”

“그래서 그렇게 크고 무거웠던 거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도는 도신의 길이는 다섯 자(150센티미터), 손잡이는 한 자(30센티미터), 폭은 네 치(12센티미터), 무게는 무려 쉰 근(30킬로그램)에 달한다.

무기치고는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고래를 자를 때 쓰는 거라 그랬던 거였다.

“그런데 쇠는 아주 좋은 겁니다.”

“어떤 쇤데요?”

“해저묵철海底墨鐵이라고, 깊은 바닷속에서 수만 관의 수압을 수만 년 동안 받아 단단해진 특이한 철입니다. 신검 신도를 만들 수 있다는 만년한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급 철에 속합니다. 구하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삼백 년이 지났는데도 멀쩡했군요.”

“네?”

“아닙니다. 그런데 고래를 자르는 도치고 너무 좋은 쇠를 사용한 거 아닙니까?”

“무인들이 좋은 무기를 갖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장인들도 좋은 연장을 갖고 싶어 합니다.”

“고래를 자르는 사람이 좋은 곤도를 갖고 싶어 하는 건 이상할 게 없다는 건가요?”

“자식이나 제자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도갑입니다.”

노인은 나무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

“가뜩이나 무거운데 도갑까지 쇠로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쇠처럼 단단하다고 해서 흑철목이라고 부르는데, 도갑으로는 손색이 없을 겁니다. 도가 너무 길어 뽑는 건 불가능하고 옆으로 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대장장이 노인은 도갑 옆으로 보여 주었다. 보통은 막혀 있는데 노인이 보여 주는 도갑은 위에서 아래까지 뚫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노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천만에요.”

“그럼.”

금장생은 인사를 하고 대장간을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