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89)
일호
툭!
서찰 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금장생은 아래로 떨어진 걸 주웠다. 그것은 천이었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천을 보았다.
“이게…….”
“뭔지 모르세요?”
아수수가 물었다.
“여자 속옷 같은데…….”
“맞아요, 가슴 가리개예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게 왜…….”
금장생은 서찰로 시선을 주었다.
삼호의 가슴 가리개다.
늦으면 삼호는 선착장의 거친 녀석들의 정액 받이가 될 것이다.
선착장을 잊지 마라.
그게 전부였다.
금장생은 가만히 글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가?”
금장생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듯하자 태천야 역시 긴장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 얼굴이 굳어졌냐는 듯 금장생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헉!’
그의 웃음을 대한 태천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저 저 웃음은?’
그는 놀란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살아오면서 웃는 얼굴을 아주 많이 보았다. 그런데 맹세코 방금 본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활짝 웃으면 얼굴 전체에 잔주름이 생기고 기쁨으로 충만한 눈동자가 된다.
그런데 금장생의 얼굴은 달랐다. 활짝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은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고, 눈동자는 빙정처럼 차가웠다.
‘화가 난 거군.’
태천야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서찰을 태워 버린 후 그의 방으로 갔다.
그가 방에서 나온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갔다 올게요.”
천야에게 말하고 망루를 나섰다.
외출했던 그가 돌아온 건 저녁 무렵이었다.
“일을 하나 잡았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천야에게 말했다.
“어떤 일입니까?”
“시체를 운구해 오는 일입니다. 가까운 곳이라 이삼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시체를 묻은 비용이고 이건 오늘 받은 돈입니다.”
금장생은 아수수가 준 일만 냥과 백 냥짜리 전표 두 장을 천야에게 주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천야는 돈을 받아 들며 물었다.
“내가 없으면 떠난 줄 아시면 됩니다.”
“제가 준비할 건…….”
“총관이 특별히 준비할 건 없습니다.”
“참! 오늘 관아에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쉰 냥 정도 찔러주면 사흘 안에 나올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께 그걸 의논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가정 형편을 알아보고, 힘들게 사는 자면 쉰 냥을 주고 그런대로 사는 자라면 백 냥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왕 가는 김에 그 친구에게 광산 업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세요.”
“광산 업자요?”
천야는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장상문과 천당사를 합병하고 난 후에 쇠 장사를 해 볼 참이거든요.”
“사업을 확장하신단 말씀입니까?”
“네.”
“그런데 하필이면 광산업을…….”
천야가 보기엔 광산 업종은 그리 전망 좋은 사업이 아니었다.
“우선은 그렇게만 알고 계십시오. 그리고 광산 건은 아주 중요하니까 꼭 알아보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천야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난 가서 쉬겠습니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서찰 때문인가요?”
문을 나서는데 아수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아수수가 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북망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수수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에요. 차를 한잔 얻어 마실까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긴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서요.”
“총관과 나는 아주 작게 이야기를 해서 천리지청술을 펼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데요?”
“호기심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나요?”
“네.”
“나는 그게 뭔지 모르겠네요.”
“악마소는 아주 비밀이 많은 미소라는 거 아세요?”
아수수는 금장생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악마소.”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악마소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설사 안다고 해도 악마소의 주인은 아주 사소한 거라도 마음먹으면 목숨까지 걸어 버리는 미친 자들의 웃음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살기의 극極, 즉 살기만으로 살인을 한다는 의형살인강의 최고봉이라는 사실과, 악마소의 창시자가 암흑인이라고 부르는 마족이란 걸 모른다는 거예요.”
“암흑인? 마족?”
이미 들어 본 말들이다. 하지만 금장생은 모른 척했다.
“암흑인이나 마족은 설명해 줘도 모를 거예요.”
“제가 지은 미소가 그 악마소란 말입니까?”
“아니라고 할 건가요?”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저는 악마소가 뭔지도 모를뿐더러 의형살인강을 펼치는 무인도 아닙니다.”
“우리 내기 한번 할래요?”
“내기요?”
“당신이 무인이라는 데, 아니 무인은 아닐지 몰라도 무공을 익혔다는 데 나를 걸게요. 그것도 아주 강한 무공을 익혔다는 쪽에요.”
“부인을 걸겠다는 건 무슨 뜻이죠?”
“당신에게 몸과 마음 모두 복종하겠다는 거예요.”
“……굳이 그런 거에 목을 걸 필요가 있습니까?”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예요.”
“나는 별로 내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저 산에 일만 냥이 든 관 쉰 개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관가에 가서 말해도 되겠군요.”
“……!”
금장생은 아수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해하진 마세요. 내가 그걸 알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으니까요. 만일 여기 온 날 당신이 땅을 다지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관찰력이 좋으시군요.”
“한 가문의 안주인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관찰력은 필수거든요.”
“내기에서 이기면 제게 뭘 요구할 생각인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만일 제 남편이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를 대신해 주면 돼요.
아수수는 전음으로 말했다.
“네?”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아수수가 그런 요구를 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당신의 체격은 제 남편과 아주 비슷해요. 약간 왜소하긴 하지만, 그건 객지 생활로 인해 살이 빠져서 그렇다고 하면 돼요.
아수수가 금장생을 남편 대용으로 할 생각을 한 건 전날 시녀 상화가 금장생의 뒷모습을 보고 남편으로 착각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만일 이대로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게 되면 반기를 들었던 자들의 세상이 될 테고, 이천 년을 이어져 왔던 마가는 무너지게 된다.
몰락할 땐 몰락하더라도 반란을 일으켜 남편을 살해한 자들에게 마가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기는 게 낫겠습니다.”
―끝까지 전음을 사용하지 않는군요.
“제 처소에 지하실이 있습니다. 한 시진 후 거기로 오십시오.”
금장생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알았어요.
아수수는 금장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닮았어.’
그녀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아수수는 은신술을 펼쳐 금장생 처소 지하실로 들어갔다.
금장생은 지하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공자의 역린을 건드린 건가요?”
아수수는 금장생 건너편으로 앉으며 말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십니까?”
“어떤 걸 말하는 거죠?”
“부인의 남편 노릇을 하는 것 말입니다.”
“두 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가능해요.”
“어떤 조건이죠?”
“첫 번째는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것과, 두 번째는 부인인 내가 남편임을 인정하는 거예요.”
“제가 남편과 비슷하게 생겼습니까?”
“뒷모습은 제 시녀가 착각할 정도로 닮았어요.”
“뒷모습은 그렇다 쳐도 앞은 어떻게 할 겁니까?”
“이걸로 해결하면 돼요.”
미리 준비를 한 듯, 아수수는 품속에서 책자 두 권을 꺼내 금장생 앞으로 밀었다.
금장생은 위에 있는 책자를 보았다.
표지에는 유마환용대법幽魔幻容大法이라고 적혀 있었다.
“역용술인가요?”
“맞아요. 유마환용대법의 가장 큰 장점은 목소리까지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감히 단언컨대 역용술 중 최고라고 자부해요.”
“목소리까지 바꿀 수 있다면 대단하군요. 만일 진기가 풀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방법이 없어요.”
“조심해야겠군요.”
“맞아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장생은 유마환용대법을 옆으로 치웠다.
두 번째 책 제목은 마경魔經이었다.
금장생은 아수수를 보았다.
“마가 가주가 익히는 두 무공 중 하나예요.”
“다른 하나는 뭐죠?”
“마전魔典이에요.”
“그건 없나 보죠?”
“남편이 지니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전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마전에는 여러 가지 무공이 들어 있었지만 그중 최강은 적수마신만마공이었다.
“해 주실 건가요?”
“저 같은 사람에게 부탁을 할 정도로 상황이 그렇게 급합니까?”
“사실은 그래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위험한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누구보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자부해요.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데도, 과거에 맺었던 인연을 잊지 못해 놓았던 무기를 다시 드는 사람이라면 믿어도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서찰이 왔을 때 아수수가 본 건 가슴 가리개뿐만이 아니었다. 서찰의 내용도 보았다.
그곳에는 찾아오지 않으면 가슴 가리개의 주인을 사내들에게 던져 주겠다는 협박이 적혀 있었다.
아울러 그런 협박을 했다는 건 금장생이 자신들의 과거 동료였다는 걸 확신하지 못했다는 걸 뜻한다. 만일 확신했다면 그 자리에서 공격을 했을 테니까.
금장생 입장에서는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럼 자신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물론 여자가 희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떠난 곳이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장생은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건 곧 그가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뜻한다.
“물론 공자가 수락해야 하겠지만요.”
“저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신념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돈을 달라는 건가요?”
“마음의 빚을 지우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가에서는 상단을 운영하고 있어요.”
“유명한 상단인가 보죠?”
“중원삼대상단 중 하나예요.”
“어딥니까?”
“대륙황가예요.”
“네?”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설마 사막에서 만났던 그 대륙황가 상단의 주인이 마가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놀랐나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황가를 주무르게 되면 굳이 대가를 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알아서 챙기란 말입니까?”
“능력껏 가져가시면 돼요.”
“좋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수수는 활짝 웃었다.
‘운이 없는 사람이네.’
아수수의 미소를 보는 순간 든 생각이었다.
표정 없이 있을 때 아수수는 향기 없는 꽃에 불과했다. 못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빼어난 미녀도 아니다.
그런데 미소를 짓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색공을 익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굉장한 염기를 뿌려 댔다.
여자를 일컬어 요물이라고 하였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저런 여자를 두고 죽은 적천영은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