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84)
한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밤에는 서늘하여 이제 가을의 한가운데 들어선 것이 제법 실감된다.
희미하게 달빛이 비추는 가운데 일단의 무리가 한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서는 한 사내가 바닥을 다지고 있었다. 바닥을 꾹꾹 눌러 밟고 있는 그는 금장생이었다.
“저놈이 맞느냐?”
금장생을 지켜보던 사내가 물었다.
상당한 미남자인 이자는 해림의 림주 파운양의 제자 옥천환이었다. 그가 질문을 한 자는 장하였다.
“맞습니다.”
장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놈 맞느냐?”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옥천환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이곳에 도착한 건 닷새 전이었다. 그리고 금장생을 잡아갈 기회를 엿봤다.
멀쩡한 사람을 대낮에 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놈을 잡기 위해 망루로 들어서려는 순간 다른 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들은 두 부류였다.
처음엔 단순히 이곳을 방문한 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 또한 망루 주인이란 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데서 망루 주인을 납치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보낸 기간이 닷새다.
“미치겠네.”
옥천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금장생은 그의 처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장하가 말했다.
“저자를 감시하는 자들은 나와 비슷한 수준이다. 함부로 나설 상황이 아니다.”
그가 지난 닷새 동안 지켜보기만 했던 이유다.
망루 주인을 감시하는 자들의 실력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이냐?”
“시체를 강시로 만들어 운구하는 것도 장의사 일이고, 그 일은 반드시 장의사 주인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일거리가 있는 것처럼 불러서 납치를 하자는 거냐?”
“네.”
“먼저 내려가서 작업을 해라.”
“공자님은…….”
“나는 여기 남아서 놈을 감시하겠다.”
“알겠습니다.”
장하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도대체…….”
옥천환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향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촌놈에게 절세 고수들이 왜 관심을 갖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응?’
갑자기 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백여 장 후미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원래 옥천환의 실력으로는 백 장 떨어진 곳에 있는 자들은 감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렸다는 건 이편으로 오고 있는 자들의 수가 최소한 백 명 이상이란 소리였다.
“네놈들은 또 누구냐?”
옥천환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안 둘 건가?”
육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장기판을 앞에 두고 말했다.
“거기 마馬를 오른편 앞으로 옮겨 주세요.”
금장생은 차를 타면서 말했다.
“오른편으로? 이런…….”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장생이 말한 곳으로 마를 옮기자 자신이 외통수에 몰리고 만 것이다.
“제가 내기 장기 경력이 오 년입니다. 태 영감님은 절대 제 상대가 아닙니다.”
금장생은 빙긋 웃으며 찻잔과 찻주전자를 들고 노인 건너편으로 앉았다.
“한 수만 물리면 안 되겠는가?”
“아까 일수불퇴라고 했던 분이 영감님 같은데요?”
“그땐 자네 실력을 몰라서 그런 거였네.”
“그러지 말고 패배를 시인하고 처음부터 다시 두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가 한 수만 물러 주면 되는데 뭐하러 다시 시작한단 말인가? 그건 시간 낭비네, 시간 낭비.”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진짜 사내라고 배웠습니다.”
“나는 사내가 아니고 노인이네, 노인.”
“노인도 고추가 달렸으면 사내잖습니까.”
“내 물건은 배설하는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네. 그러니까 완전한 사내라고 할 수가 없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당당한 사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삽니다.”
“정말로 배설의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는다는 겐가?”
“네.”
“자네가 사막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여자와 함께 있었던 걸로 아는데 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가?”
“네에?”
금장생은 뜨악한 얼굴로 노인을 보았다.
자신을 태야라고 소개한 노인이 망루로 찾아온 건 보름 전이었다.
처음엔 관을 보러 왔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관의 종류와 가격을 묻더니 망루에서 좀 묵으면 안 되겠냐고 하였다.
불편할 거라고 했더니 이번엔 돈을 내겠다고 했다. 돈을 내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식대 포함 하루 한 냥을 받기로 하고 방을 마련해 주었다.
“놀랐는가?”
“영감님 같으면 놀라지 않겠습니까?”
“사막 냄새하고 여자 지분 냄새는 한번 배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거 아는가?”
“그러니까 영감님은 제 몸에서 사막 냄새와 여자 냄새를 맡았다는 건가요?”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 몸이 아니라 옷이네.”
“옷이라고요?”
금장생은 태극선의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자기 냄새는 아무리 독특해도 맡지 못한다네.”
‘빨 걸 그랬나?’
금장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공연히 빨았다가 수화불침과 같은 기능에 이상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빨아야 할 만큼 더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두었는데 그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나 돼야 알아차릴 수 있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영감님 수준이면 어느 정돈데요?”
“사막에서 삼십 년 이상 살아야 한다는 말이네.”
“삼십 년을 넘게 사막에서 살았어요?”
“젊은 시절 몇 년을 제외한 나머지 생을 거기서 보냈네.”
태야의 본명은 태천야였다.
신강무림의 절대자인 신강태존 태천야가 이곳으로 온 건 아주 우연이었다.
중원 칠대고도의 한 곳인 낙양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들어왔다가 북망산까지 오게 되었다. 어쩌면 나이가 들자 죽은 자들의 세상은 어떤지 궁금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무덤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있다가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그건 바로 그가 혈마탑에 묻혀 두었던 만리추종향이었다.
그는 혈마탑을 완전히 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 혈마탑에 만리추종향을 묻혀, 십 리 안쪽에만 있으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 두었다.
그런데 그 만리추종향을 이곳 북망산에서 맡게 된 것이다.
“그럼 사막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러네.”
“그런데 중원에는 어쩐 일로……?”
“죽기 전에 세상을 한번 둘러봐야 할 거 아닌가.”
“중원에 묻히고 싶으신 겁니까?”
“아닐세. 나는 신강에 묻힐 거네.”
“신강요?”
“거기가 고향이네.”
“내가 아는 사람도 신강 사람인데.”
“혹시 그 신강 사람이 자네와 함께 사막을 건넌 여잔가?”
“우연히 동행하게 됐습니다.”
“냄새로 보면 상당히 젊은 것 같은데…….”
“젊은 남녀 둘이서 수십 일 동안 사막을 건넜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건가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아니었다는 건 무슨 뜻인가?”
“쫓기고 있었거든요”
“쫓겨?”
“그건 그렇고, 신강까지 가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어떡하죠?”
금장생은 화제를 돌렸다.
“비용?”
태천야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라도 중원에서 죽으면 강시로 제강하여 신강까지 운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여기로 오신 게 아닙니까?”
“아예 죽으라고 제사를 지내지 그러나.”
“제사는 죽은 후에 지내는 거지 살아 있을 때 지내는 게 아니질 않습니까?”
“끙! 그래, 얼마 받을 텐가?”
“신강까지 가는 건 최소 오천 냥은 받아야 합니다.”
“너무 비싼 거 아닌가?”
“저도 곤륜산과 천산을 다녀온 후에 책정한 가격입니다. 그 정도를 받지 않으면 힘듭니다.”
“알았네.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보다 이거 한 수만 물러 주면…….”
똑똑똑!
그때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안 됩니다. 들어오세요.”
금장생의 대답에 이어 문이 열리더니 삼십 대 중반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상당한 미인인 이 여자는 복면을 벗은 유령마幽靈魔 음사영으로, 그녀를 고용한 사람은 천야였다. 음사영의 직책은 금장생 호위였다.
콧구멍만 한 장의사 사장에게 무슨 호위냐고 했다가 저번 일을 나갔을 때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며, 돈 때문에 거절하는 거라면 자기 월급을 쪼개서라도 들일 거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용했다.
천야와 음사영 사이에 뭐가 있는 것 같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굳이 인건비가 더 들지 않는다면 무공이 강한 무인이 한 명 정도는 옆에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음사영은 무공만 강한 게 아니었다. 진식 등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그녀는 고용되자마자 가장 먼저 망루 외부에 진식을 구축했다.
정확한 위력은 알 수 없지만 혼천유령무형마진混天幽靈無形魔陣이라는 이름만은 대단해 보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무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네.
금장생의 질문에 대답한 자는 이추혼의 영혼이었다.
“무인 이백여 명이 우리 망루를 포위한 상태예요.”
음사영이 말했다.
“무인이 왜?”
“아마 우리 망루를 주시하던 자들을 쫓아온 것 같아요.”
“어떤 자들인지 알아냈나요?”
“총 세 부류가 우리 망루를, 아니 정확하게는 사장님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나를요?”
금장생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왜 나라고 생각하죠?”
“망루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살펴보았는데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사장님을 빼면요.”
“그러니까 저 밖에 있는 자들은 나를 노리고 왔다는 건가요?”
“네.”
“두 분을 노리고 온 자들일 수도 있잖습니까?”
“저는 여길 감시하는 자들과 인사를 한 적은 물론이고 원한을 맺은 적도 없어요.”
“그럼 영감님은?”
“나는 삼십 년 만에 나온 중원 나들이네.”
“끙! 그럼 나뿐이라는 건데. 혹시 어떤 자들인지 아십니까?”
“우리 망루 정북쪽에 있는 자는 해림의 림주이자 무림십패의 일인인 단천斷天 파운양의 첫째 제자 옥천환과 그의 부하들이고, 서쪽에 있는 자들은 마가魔家 무인들이에요.”
“마가요?”
문득 전에 강시로 제강했던 자가 떠올랐다.
그자의 몸에서 마가魔家라는 글이 새겨진 패와 마전魔典이란 제목의 책이 나왔다.
마전은 무공 비급으로, 안에는 적수마신만마공赤手魔神滿魔功이라는 무공이 들어 있었다.
그 무공은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잘 모르는 문파일 거예요.”
음사영이 대답했다.
“혹시 사막에서 나를 쫓던 자들인가요?”
“그들 중 한 가문이에요.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들과 상관없을 수도 있고요.”
“그들과 상관없다는 건, 이곳에 온 이유가 강시와 상관없다는 걸 뜻하는 건가요?”
“정확한 건 나도 몰라요. 하지만 마가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종합하면 상관없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강시와 상관없다면 이곳에 왜 온 거죠?”
창! 창창창! 창창!
“크악!”
“아악!”
“으악!”
바로 그때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 거죠?”
“마가 무인들 뒤편에 이백여 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나타났거든요. 같은 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자들 양쪽 다가 마가 무인들이라는 거네요?”
“네.”
“서로 사이가 좋지 않나 보네요.”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머지 한쪽의 정체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에 대해 파악한 건 자객이라는 것뿐이에요.”
“자객요?”
금장생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