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81)
석옥을 나가자 거짓말처럼 등이 꺼졌다.
금장생은 석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 후로도 죽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나왔다. 금장생은 석옥에서 익힌 혈랑도법으로 죽지 않는 자들을 없앴다.
그들을 없애는 와중에 야수감각도野獸感覺道도 익혀 나갔다.
야수감각도는 모든 감각을 극한으로 개발하는 오감 증폭 무공이었다.
야수감각도는 아니지만 금장생은 이미 그런 유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 그렇다 보니 야수감각도를 익히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혈랑도법 이 초인 혈랑폭을 익히는 도중 야수감각도를 완성했다.
야수감각도를 완성하자 혈랑도법은 더욱 강해졌다.
“앞에 다섯, 우측 둘, 좌측 넷.”
스윽!
왼편에 있던 자들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금장생의 신형이 오른편으로 쏘아졌다.
곧 그가 내려선 곳에서 검은색 도광刀光이 난무했다.
스악! 스악! 스악! 스악!
사백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검은색 도강이 잔상처럼 남고 죽지 않는 자들의 머리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잠시 후 그들은 가루로 흩어졌다.
다른 쪽에 있던 죽지 않은 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사백에 의해 목이 잘렸고,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이번에도 금장생은 기다렸다. ‘죽지 않는 자’들의 부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죽지 않는 자’들은 부활하지 않았다.
‘죽지 않는 자’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자리를 떴다.
그렇게 숲을 따라 이동하며 혈랑도법 사 초를 수습했다. 혈랑도법 삼 초는 혈랑멸血狼滅이고, 사 초는 혈랑무血狼舞였다.
각 초식의 위력은 대단했다.
특히 사 초의 혈랑무는 상상을 넘어선 무공이었다.
일인이 펼치는 무공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마리의 혈랑 떼가 공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변화가 심했다.
보통 변화가 많으면 위력이 약해지기 마련인데 혈랑무는 달랐다. 야수감각도와 혈랑보가 합쳐진 혈랑무는 그야말로 완벽한 살인 무공이었다.
금장생은 일 초부터 사 초까지 펼쳐 ‘죽지 않는 자’를 없앴다. ‘죽지 않는 자’들은 그의 무공을 완성시켜 주는 매개체였다.
혈랑도법이 완성될 즈음 또 다른 석옥이 나타났다. 금장생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등이 켜지면서 내부가 밝아졌다.
금장생은 눈을 감았다. 눈이 어느 정도 빛에 적응됐다고 생각되자 눈을 떴다.
금장생은 벽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고했다, 무혼.
벽면 맨 위에 적힌 글이었다.
“여기엔 어떤 무공이 적혀 있는지 볼까?”
금장생은 아래를 살폈다.
가장 먼저 적혀 있는 무공은 이화태양강離火太陽罡이었다.
“이화태양강은 태양마존의 무공인데.”
금장생은 아래 구결로 시선을 주었다.
구결을 읽어 내려가던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이화태양강은 삼 갑자 공력이 없으면 펼칠 엄두도 내기 힘든 강한 무공이었다. 이화태양강이 펼쳐지면 오 장 주변의 사물은 남아나는 것이 없다.
스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로 만드는 극양의 무공이 바로 이화태양강이었다.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오른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로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희뿌연 광채가 피어올랐다. 이화태양강으로 만들어 낸 이화기離火氣였다.
이화태양강은 이화기와 태양강 두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 초라고 할 수 있는 이화기는 광범위한 지역을 공격할 수 있는 초식이고, 이 초인 태양강太陽罡은 개개인을 공격하는 초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약간의 변형을 가하면 다수를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금장생은 자신이 만들어 낸 이화기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상당히 뜨겁기는 하지만 물건을 재로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양극신공이 더해지면 달라지겠지.”
그는 다시 벽으로 시선을 주었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건 빙극천월강氷極天月罡이었다.
빙극천월강 또한 이화태양강 못지않았다. 초식은 빙氷, 음陰, 극極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금장생은 왼손 손바닥을 펼쳐 빙극천월강을 끌어 올렸다.
이화태양강과 마찬가지로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새하얀 광채가 피어올랐다.
아직 일 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약한 기운이다.
“하지만 점점 자라겠지.”
그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새하얀 광채는 픽 스러졌다.
세 번째 무공은 선풍마강旋風魔罡이었다. 금장생이 알기론 선풍마강은 풍마존의 무공이었다.
선풍마강으로 펼치는 최강 무공은 풍도風刀였다.
“대단하네.”
금장생은 혀를 내둘렀다.
바람을 도刀로 만들어 적을 공격하는 풍도는 지금까지 본 무공 중 가장 독특하면서도 잔인하기도 했다.
“무혼 그 친구 화 많이 났겠네.”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맨 처음 들어갔던 석옥에서 보았던 것들을 종합하면 이곳에서 무공을 익힌 자들은 마맹 문도가 아니었다. 중원 각처에서 소위 천재라고 일컫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저런 광세신공을 보게 나서 생각할 건 뻔하다. 그건 바로 살인멸구다.
“쟁천비무에서 무맹이 승리한 걸 보면 무인 양성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같은데…….”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구마가 자신들의 최강 무공을 내놓으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일이다. 그의 생각엔 실패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가만…….”
그의 시선이 벽으로 향했다.
만일 일이 제대로 마무리됐다면 처음 들어갔던 석옥의 기록이나 그동안 지나쳐 오면서 들어갔던 석옥에 적혀 있던 무공을 지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들을 치우거나 지우지 않았다는 건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걸 뜻한다.
“문제가 생긴 거네.”
그는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수백 년 전이고 이미 과거가 되었다. 굳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사흘 후였다.
사흘 만에 절세 무공 세 가지를 다 익힌다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개념은 잡은 것 같았다.
“배고파 미치겠네.”
그는 짐을 뒤져 육포를 꺼내 허겁지겁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한 주먹 이상을 먹고 나자 비로소 허기가 가셨다.
“이제 한숨 자자.”
밖으로 나가 볼일을 보고 난 그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잠자는 시간은 평소보다 긴 다섯 시진이나 되었다. 깨어나자 곧바로 운기행공을 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의 내공은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구마의 무공 여부를 떠나 이곳은 금장생에게 기연의 장소였다.
운기행공을 마치고 나서 석옥을 나섰다.
“이젠 실전을 해야겠지.”
그는 전방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도 역시 깊숙한 발자국을 남겼다.
스윽!
이십여 장 걸어갔을 때 알몸 사내가 나타났다. 그런데 사내의 몸에서 극양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죽지 않는 자 같기는 한데…….”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살아난 걸 보면 얼마 전 겪었던 죽지 않는 자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뭐냐, 넌?’
금장생이 발견한 건 죽지 않는 자에게 빙의한 것처럼 붙어 있는 불덩어리였다.
강신술사로서 단언컨대 귀신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가 본 영혼은 절대 저런 생김새가 아니었다.
영혼과는 또 다른 존재가 분명했다.
‘말 못해?’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무튼 날 공격하면 넌 죽게 될 거야.’
휙!
금장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죽지 않는 자는 몸을 날려 왔다.
“불의 상극은 물이니까.”
금장생은 빙극천월강을 끌어 올렸다.
그의 손이 서리가 낀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빙氷!”
그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왼손이 전방으로 쭉 내밀렸다.
그러자 새하얀 광채를 뿌리는 차가운 기운이 그의 장심에서 쏘아져 나왔다.
퍽!
‘죽지 않는 자’가 뒤편으로 일 장가량 물렀다. 그리고 내뿜던 극양의 기운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파앗!
한숨을 돌기도 전에 오른편에서 ‘죽지 않는 자’가 달려왔다.
극음의 기운을 간직한 ‘죽지 않는 자’ 또한 조금 전에 물리친 ‘죽지 않는 자’와 다르지 않았다. 영혼은 아닌 뭔가가 귀신처럼 빙의하여 빙강시를 조종하고 있었다.
“정精인가?”
오랜 세월 특별한 기운이 쌓이면 저절로 자아를 가진 어떤 물체가 생겨나는데 그 물체를 일컬어 정이라 한다고 하였다.
정이 귀신과 다른 점은, 귀신은 사람의 영혼에 의해 생겨나지만 정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어떤 기운이 모여 생겨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정을 자연계가 만들어 낸 귀신이라고 하여 정령精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득 저 ‘죽지 않는 자’들에게 붙어 있는 것들이 그런 정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정령이 생겨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정지된 세계 그리고 열양천과 빙한담. 그 두 가지 조건이면 충분히 정령이 만들어질 수 있다.
“어쨌거나.”
금장생은 다시 왼팔을 휘둘렀다.
차가운 기운이 어둠을 뚫었고, 둔탁한 소성과 함께 ‘죽지 않는 자’ 한 명이 뒤편으로 날아갔다.
휙! 휙휙!
‘죽지 않는 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금장생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금장생의 양팔은 쉬지 않고 허공을 갈랐다. 처음엔 작았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위력도 더 강해졌다.
“좋네.”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이화태양강과 빙극천월강의 위력이 강해지면서, 두 기운은 몸 내부에서 더욱 강하게 충돌했다. 충돌의 여파는 몸 내부를 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충돌로만 끝나는 게 아니었다. 충돌은 더 강한 기운을 만들어 냈고, 언제부터인가 그 기운은 이화태양강과 빙극천월강으로 섞여 들어갔다.
양극신공이 극에 이르면 저절로 생성된다는 양극천강이었다.
양극천강은 무림에 존재하는 강기 중 가장 강한 힘으로 알려져 있다.
양극천강이 생성되자 금장생은 수위를 더욱 높여 나갔다.
아울러 손도 바꾸었다.
지금까지는 오른손으로는 이화태양강만 발출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왼손으로도 이화태양강을 발출했다.
손이 바뀌면서 양극천강은 더욱 강해졌고, 이화태양강과 빙극천월강도 더욱 강해졌다.
‘징그럽네.’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죽지 않는 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보통 강시는 목이 잘리면 불능 상태로 변하는데 ‘죽지 않는 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잘려 나간 머리가 슬금슬금 움직여 다시 붙었다.
퍼억!
푸스스!
‘죽지 않는 자’가 가루로 변한 건 싸움을 시작하고 난 지 이틀 만이었다.
거의 반투명하게 변한 빙극천월강과 이화태양강이 격중할 때마다 ‘죽지 않는 자’들은 가루로 변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났다.
“암왕칠구 중 하나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소멸’ 주문을 쓰는 수밖에 없는 건가?”
금장생은 이화태양강과 빙극천월강을 펼치기 직전 ‘소멸’ 주문을 떠올렸다.
심장에 ‘소멸’이란 단어가 새겨지고 고리의 회전을 통해 생성된 힘과 함께 이화태양강과 빙극천월강으로 스며들어 갔다.
퍼억! 퍽퍽! 퍼억!
이화태양강과 빙극천월강에 격중된 ‘죽지 않는 자’들이 가루로 변했다.
금장생은 다른 자들을 공격하면서 조금 전 없앤 자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더 이상 부활하지 않았다.
“이제 편하게 싸울 수 있겠네.”
금장생은 이화태양강과 빙극천월강을 난사했다.
두 강기가 격중될 때마다 ‘죽지 않는 자’들은 가루로 흩어졌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금장생은 육포를 질근질근 씹으며 자리를 떴다.
이번에도 역시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발자국을 남겼다.
“흠!”
반 시진 정도를 가던 금장생은 그 자리에 멈췄다.
그 앞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있었다.
삼백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의 상태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비로소 이곳을 역천영면마진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역천영면마진은 하늘을 거역하고 영원한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역천영면마진이라고 한 모양이네.”
그는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세 구는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잘렸고, 쓰러져 있는 한 구는 복부에 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귀마존, 태양마존, 빙마존, 풍마존이네.”
죽은 시체지만 아직 남아 있는 기운만으로도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저자는…….”
금장생의 시선이 한편에 멈췄다.
그곳엔 엉망으로 망가진 시체 한 구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아 보였다.
“무혼이란 사람이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손에는 무려 육 척(180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도가 들려 있었다. 다른 시체를 잘라 낸 무기였다.
금장생은 그 무기를 들었다.
팔이 휘청할 정도로 무거웠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쉰 근(30킬로그램)은 돼 보였다.
“이건 챙겨도 되겠네.”
녹이 많이 슬고 날이 듬성듬성 나가 볼품은 없다.
하지만 삼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멀쩡하다면 일반 철로 만든 게 아니라는 뜻이 된다. 잘만 다듬으면 멋진 무기가 탄생할 것 같았다.
“결국 쟁천비무에서 승리하기 위해 데려온 자에 의해 몰락한 거네.”
삼백 년 전 마맹이 무맹 측에 패했던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금장생은 구덩이 두 개를 팠다.
한쪽에는 무혼을 묻고 다른 구덩이에는 귀마존을 비롯한 시체들을 함께 묻었다. 아무리 죽은 자들이라고 해도 원수지간이라 할 수 있는데 함께 묻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까지 세웠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합장을 하고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