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76)
“여기였구나.”
헌원중천은 등이 달려 있는 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주먹을 쥐고 벽을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얇고 안쪽이 비어 있는 것 같으면 울림이 감지되는데 이 벽에서는 아무런 울림도 들려오지 않았다.
“상당히 두껍다는 소린데…….”
그 벽에 손바닥을 댄 채 중얼거렸다.
“응?”
헌원중천의 눈이 커졌다. 벽이 그의 내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얼른 내기를 손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전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벽은 헌원중천의 내기를 빨아들였다.
“천좌!”
헌원중천은 제갈영우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대천좌.”
“벽이 내기를 빨아들이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벽이 내기를 빨아들인단 말입니까?”
“그렇다.”
“저도 해 볼까요?”
“해 봐라.”
헌원중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영우는 벽에 손바닥을 대고 내기를 주입했다.
두 사람의 내기가 주입되자 벽에서 뿌연 광채가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도 내기를 주입해라!”
헌원중천은 소리쳤다.
보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양 손바닥을 대고 내기를 주입했다.
광채가 흘러나오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더니 이윽고 호수 표면처럼 변했다.
쑥!
그리고 대고 있던 손바닥이 벽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이건?”
헌원중천은 깜짝 놀랐다.
“통로가 열린 것 같습니다.”
제갈영우가 말했다.
“우리가 벽의 비밀을 풀어낸 거라고 생각하느냐?”
헌원중천은 제갈영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비밀은 우리가 아니라 해왕 일행이 풀었을 겁니다.”
제갈영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면 이 일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잠기지 않은 문을 열 때도 당기거나 밀어야 합니다.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어 봤자 절대 열리지 않지요.”
“내기를 주입하는 것이 문을 여는 행위라는 말이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들어간다.”
헌원중천은 발을 내디뎠다.
잠시 후 그들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위를 살피는 거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위를 살피고 온 자들이 보고했다.
“출발하라!”
헌원중천은 명령을 내렸다. 일행은 곧 자리를 떴다.
그들이 떠나고 잠시 후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척사랑과 태월령이었다.
이어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척사랑의 호위 화花였다.
“너는 밖에서 대기해.”
척사랑은 화를 보며 말했다.
“저기…….”
화는 말끝을 흐렸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이다. 이런 곳은 소수이면서 강자만 가야 한다. 화 너는 대원들과 함께 위에서 기다려라!”
“그럼 저만이라도…….”
“부하들을 지휘할 사람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도록 내가 나오지 않으면 먼저 돌아가 있어라. 절대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나가라!”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화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그만 가요.”
척사랑은 태월령을 보며 말했다.
“네.”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몸을 날렸다.
마치 누군가 만들어 놓은 통로처럼 내부는 단조로웠다. 태월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척사랑이 물었다.
“천산파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고대에 지어진 건물이 있고 붉은 강이 흐른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여긴…….”
크아아앙!
캬우우우우!
“아악!”
“으악!”
“크아악!”
느닷없이 앞에서 괴성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고대 건물이나 붉은 강은 없어도 생명을 위협하는 뭔가는 있는 모양이네요.”
척사랑이 말했다.
“그러게요.”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지 가 볼까요?”
“네.”
척사랑과 태월령이 몸을 날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한 식경 후 두 사람은 헌원중천 일행이 싸우는 장소에 도착했다.
특별히 엄폐물이 보이지 않자 두 사람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엎드린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덩치의 동물이었다. 키만 해도 이 장에 달하는 동물들이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무인들의 몸이 찢겨 나갔다.
물론 헌원중천 일행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처음 보는 동물들의 힘은 엄청났다. 아니, 동물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뭐죠?”
척사랑은 태월령을 보며 물었다.
“나도 처음 봐요.”
“천산에 서식하는 동물이 아닌가요?”
“저런 괴물이 횡행하는 곳이라면 천산파 같은 문파가 생겨날 리가 없잖아요.”
“그렇겠죠.”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 있는 것들은 무인도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 저런 괴물이 한두 마리만 있어도 공포의 산으로 변하고 말 텐데 저것들은 떼로 몰려다닌다.
그런 산에서는 사람이 살 수가 없다. 태월령이 말하고 싶은 건 바로 그 점일 테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저 괴물들은 이 안에서만 사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척사랑은 코를 찡그렸다.
그는 종종 어떤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을 때 코를 찡그리곤 했다.
“왜 그러세요?”
“저 녀석들이 그동안 무얼 먹고 살았을지 궁금해서요.”
“뭘 먹고 살았겠냐고요?”
“공기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 소협은 저것들 말고도 또 있을 거라는 거죠?”
“자연의 이치잖아요. 저것들보다 약하고 작겠지만 수는 훨씬 더 많은 어떤 괴물이 존재할 거예요.”
“그럼 그 반대는 어떨까요?”
태월령은 물었다.
“그 반대요?”
척사랑은 태월령을 돌아보았다.
“저기 있는 괴물이 최상위 포식자가 아니라면요.”
“……그럼 이 안은 지옥이 되겠지요.”
척사랑은 나직하게 말했다.
* * *
“차앗!”
“타하!”
“하아!”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캑! 꾸엑! 캑!
“아악!”
“으아아악!”
“크아악!”
무인의 기합과 괴물의 몸통이 잘려 나가는 소리, 괴물과 무인의 비명, 죽은 자를 씹어 먹는 소리가 뒤섞인 이곳은 척사랑의 말처럼 지옥이었다.
‘도대체 저건?’
금장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인들을 공격하는 괴물은 고양이, 아니 표범이다.
그런데 얼굴은 완전히 달랐다. 표범보다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얼룩무늬가 선명한 몸통은 짧은 털로 뒤덮여 있지만 얼굴은 매끈했다. 싸울 땐 두 발로 서고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는 표범처럼 네발로 달린다.
인간과 표범의 양면성을 간직한 괴물들이었다.
‘뭔지 알아?’
금장생은 백사에게 물었다.
―수인족의 일종이다.
‘수인족獸人族?’
―짐승과 인간의 중간 형태를 말한다.
‘인간과 닮은 점은 얼굴 말고 뭐가 있지?’
―직립보행을 할 줄 알고, 집안일을 하는 건 물론이고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털과 꼬리가 달린 인간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
―꼬리는 나도 있다.
‘맞다, 그렇지. 그럼 너도?’
―나는 좀 다르다.
‘어떻게 다른데?’
―너희 중원인들은 나를 암흑인이라고 불렀다.
‘암흑인?’
―저들이 우리를 부르는 명칭은 마족이다.
백사는 바로 옆에 있는 두 강시를 가리켰다.
‘마족이라……. 그런데 저들을 부르는 명칭도 있어?’
금장생은 두 강시를 가리켰다.
두 강시는 비슷한 듯하면서 달랐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강시는 덩치가 크고 당당했다. 그리고 딱히 뭐라고 말하기 힘든 기운이 전신에 흐르고 있다.
반면에 그 옆에 있는 강시는 덩치 큰 강시나 백사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평범했다.
―덩치 큰 저자는 상천인으로 불렸고, 적신천사마공赤神天使魔功을 완성한 자다.
‘적신천사마공?’
―그렇다.
‘날개를 만들어 낸다는 말 같은데 맞아?’
―좌우측에 네 개씩, 여덟 개의 날개를 만들어 낸다.
‘그럼 저 강시는?’
―그자는 중천인으로, 이곳 무인과 비슷한 실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다르다는 거지?’
―무슨 의미냐?
‘암흑인, 상천인, 중천인이 다르다는 말 아냐?’
―맞다. 우리 세 종족은 완전히 다르다. 만일 중원으로 오지 않았다면 서로 싸우다가 멸종했을 것이다.
‘멸종?’
―그렇다.
‘그럼 중원은 세 종족의 멸종을 막기 위한 돌파구였던 셈이라는 거야?’
―그렇다.
‘흠!’
금장생은 생각에 잠겼다.
백사와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어떤 걸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동영이 내전으로 인해 축적된 힘을 외부로 방출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전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표범 닮은 수인족이 수가 많기는 했지만 무인들의 상대가 되지는 않았다.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듯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출발한다!”
백리장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자는 방문자의 후손이야?’
금장생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방문자란 말도 아느냐?
‘네 암흑창을 발견했던 곳에 적혀 있었어.’
―그랬구나.
‘맞아?’
―적운신갑赤雲神鉀을 지니고 있는 걸 보면 맞다. 그리고 저자는 중천인의 후예다.
‘중천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거야?’
―아니다. 내가 저자를 중천인의 후예라고 하는 건 성격 때문이다.
‘성격이 어때서?’
―중천인은 대를 이어 가며 과업을 완수하는, 아주 집요한 성격을 지닌 종족이다.
‘성격으로 보면 완전 인간이네.’
―인간 맞다.
‘그러니까 세 종족 중 중천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인간이란 거지?’
―그렇다.
휘익! 휘이익! 휘이이익!
느닷없이 전방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쥐다! 조심하라!”
이어 선두에서 달려가던 무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차앗!”
“타하!”
“이얍!”
무인들은 무기를 휘둘렀다.
슈캉! 슈캉! 슈캉! 슈캉!
박쥐가 잘려 나가면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턱!
“크악!”
무인 한 명이 목을 그러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목에는 박쥐 한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는데, 대롱처럼 기다란 혀가 사내의 갑옷 사이 작은 틈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쭈우욱! 쭈우욱!
이어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피를 빨아 먹는 소리가 분명했다.
털썩!
잠시 후 피를 모두 빨린 무인이 풀썩 쓰러졌다.
“저것들도 무섭네.”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조심해라.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휙!
턱!
바로 그 순간 박쥐 한 마리가 금장생의 오른편 어깨로 내려앉았다.
금장생은 얼른 왼손을 휘둘렀다.
그의 왼손에는 붉은 비수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의 혀가 파고드는 건 막아야 했다.
박쥐의 혀를 잘라 내려는 순간, 그보다 먼저 박쥐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금장생은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먼저 박쥐를 잡아챈 손의 주인은 백사가 상천인이라고 하였던 그 강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