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73화 (73/524)

황금가 (73)

혼자 왔다는 구라다의 말은 맞았다. 그 후로 금장생을 쫓는 자는 없었다.

아니, 쫓는 자가 없는 게 아니라 헌원중천 일행이 금장생과 백사를 놓친 상황이라고 해야 했다.

두 사람은 방해를 받지 않고 천산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대낮에 움직인 건 아니었다. 낮에는 카레즈로 숨어들어 몸을 숨기고 밤에만 이동했다.

천산으로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밤에만 이동했다.

지도에 표시된 지옥곡은 천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즉, 천산을 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쫓는 자들이 없으니까, 산을 오르는 것 말고는 어려울 게 없지.”

금장생은 걸음을 옮겼다.

체력이 좋기는 하지만 천산은 험했다. 게다가 길도 없었다.

금장생이 의지하는 건 태양과 달과 별이었다. 그러다 보니 직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계속 직진하는 건 성격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길이 없기 때문이야.”

절벽을 올라가면서 금장생이 백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산을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가장 낮은 봉우리를 택했는데도 사흘이나 걸렸다.

도중에 맹수를 만나기도 했지만 백사의 위협에 덤벼 보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꼭대기에서 밤을 보낸 금장생과 백사는 아침이 되자 바로 출발했다.

새벽 천산의 희뿌연 세상이었다.

각 계곡이 뿜어낸 안개는 새벽바람에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저기로 가면 돼.”

금장생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산봉우리는 천산에서 가장 높았다.

금장생은 태양을 보며 방향을 정했다.

“저기로 가다 보면 천신상이 보일 거야. 그 천신상 아래쪽이 최종 목적지야.”

금장생은 남서쪽을 가리켰다.

“크!”

백사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암흑창을 뽑아 들고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베어 냈다.

그녀의 손은 자연스러웠다.

암흑창을 휘두르는 데 끊기는 부분도 없고, 어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유연해 보였다.

쉬지 않고 나아가던 백사가 멈춘 건 두 시진 후였다.

백사는 암흑창을 금장에게 내밀었다.

“나보고 하라고?”

“크!”

“나는 이걸로 할게.”

금장생은 왼팔을 내밀었다.

몇 번의 싸움으로 악마수를 완벽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적안赤眼이라고 한다.

악마수에 힘을 주입하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안요?’

―그렇다.

‘왜 눈이라고 이름을 지은 거죠?’

―혈반은 원형이지만 속도를 내면서 날아가면 타원형 형태가 된다. 그 형태가 악마의 눈동자를 닮았다고 해서 적안이라고 불렀다.

‘적안은 혈반 몇 개를 날리는 초식입니까?’

―최소 서른 개다.

‘불러 주십시오.’

―구결은…….

악마수의 자아는 악마수의 첫 번째 무공인 적안의 구결을 구술해 주었다. 구결은 상당히 길었다.

‘됐습니다.’

한 번의 구술이 끝나자 금장생이 말했다.

―이제 한 번인데?

‘제가 머리가 좀 좋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가르쳐 주느냐는 질문이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도 머리가 좀 좋다.

‘그렇군요.’

―내가 이제 알려 준 건 먼저 혈반을 스무 개 이상 발출하지 못하면 구결이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겠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흑안과 백안의 구결을 알려 주겠다.

악마수의 자아는 두 초식의 구결을 불러 주었다.

‘비슷하네.’

세 초식을 듣고 나서 내린 결론이었다.

악마수로 펼치는 적안, 흑안, 백안은 전에 천병총에서 얻은 세 자루의 검으로 펼치는 무공, 즉 혈잔, 흑우, 무망과 비슷했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다른 무공처럼 보였다.

‘진작 가르쳐 줄 것이지는.’

―뭐라고?

‘아닙니다.’

금장생은 힘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건틀릿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런데 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건틀릿만 붉게 변했는데 이번엔 금장생의 왼팔 전체가 붉게 변했다.

“타하!”

기합과 함께 금장생이 왼팔을 휘둘렀다.

슉! 슉슉슉! 슉슉슉! 슉슉슉!

그러자 수십 개의 혈반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혈반은 거치적거리는 걸 전부 베어 냈다.

혈반이 날아간 거리는 오 장이었다. 그보다 더 날릴 수 있지만 조종을 위해 일부러 거리를 줄였다.

방금 그가 발출한 혈반은 스무 개였다.

그것들 전부를 조종해야 하는데 그가 제어한 건 열 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열 개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날았다.

그 결과 깔끔한 길이 만들어지지 않고 한 번 더 손이 가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금장생은 다시 혈반을 발출했다.

또다시 스무 개의 혈반이 쏘아지고 길이 생겨났다.

처음엔 변화가 없었다. 금장생이 처음으로 뭔가를 깨달은 건 오십여 번 정도를 발출하고 회수했을 때였다.

“그림이었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혈반이 펼쳐졌다.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금장생은 혈반의 수를 헤아렸다. 열 개였다.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혈반의 수가 하나 늘어났다.

‘하나 더.’

그러자 또 하나가 늘었다.

그렇게 혈반의 수를 늘려 나가자 어느새 서른 개가 되었다.

더 늘려 보려고 시도했지만 머리만 깨질 듯 아플 뿐 더 늘어나지 않았다.

‘아프다고 포기하면 끝까지 못하지.’

금장생은 더욱 집중했다.

그는 가던 걸음조차 멈춘 채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그리고 온 정신을 혈반에 쏟았다.

우웅!

자신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는 알지 못했다.

‘나타나지 않으면 만들어 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혈반을 만들어 내는 데 집중했다.

양쪽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뚝 돋아나오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크윽!”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머릿속에서 전해져 왔다.

‘이 정도쯤은……!’

금장생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스윽!

마침내 혈반 하나가 더 생겼다.

그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혈반을 만들어 갔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땀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금장생은 혈반 만들기를 계속했다.

고통을 받은 만큼 성과는 있었다.

혈반은 꾸준히 만들어졌고, 어느새 마흔 개를 넘어섰다.

고통은 점점 가중되고 급기야 학질 걸린 것처럼 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금장생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걸 금장생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깨달음은 오래전에 떠났던 친구가 느닷없이 방문한 것처럼 찾아온다고 하였다.

친구가 방문했을 때 아무도 없으면 그 친구는 다시 떠나고 언제 올지 모른다. 왔을 때 잡아야 한다.

금장생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고통으로 인해 얼굴을 일그러지고 손톱이 파고들어 간 장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입가에 이어 코에서도 피가 흘렀다.

그런 상황에서 혈반은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쉰 개가 늘어섰다.

금장생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맺혔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해낸 것이다.

그는 혈반을 바라보았다. 머릿속과 끈으로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가장 왼편에 있는 혈반으로 향했다.

‘회回!’

명령을 내리자 혈반들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합合!’

돌아가던 혈반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크기가 커지고 두께도 두꺼워졌다.

‘산散!’

합쳐졌던 혈반이 다시 흩어졌다.

‘성공이네.’

금장생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털썩!

그리고 시체처럼 쓰러졌다. 심력을 너무 소모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크!”

백사는 금장생 앞으로 갔다.

금장생이 허리에 감은 천승을 풀고 들쳐 업은 다음 자신의 허리에 묶었다. 그리고 암흑창을 휘둘러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그동안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암흑창의 기세도 점점 강해졌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오 장에 달하는 길이 생겨났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백사가 걸음을 멈춘 채 손바닥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손바닥을 보았다.

손가락 부분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그 물기를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았다. 그러고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암흑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금장생이 정신을 차린 건 세 시진 후였다.

차가운 느낌에 눈을 떴다.

“응?”

그의 눈이 커졌다. 바로 앞에 작은 호수가 있고, 백사가 거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가 놀란 건 신이 빚은 듯한 몸매 때문이 아니었다. 물을 끼얹을 때마다 몸에서 뿌연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체온이 높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드디어 사람이 됐네.’

금장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을 마친 백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옷은 금장생 바로 앞에 있었다.

옷 앞까지 온 백사는 금장생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방귀 뀌었어?”

금장생은 물었다.

“크!”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낸 백사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편에 두었던 부적을 이마에 붙였다.

하지만 부적이 붙지 않았다.

“강시 몸을 극복해서 그래. 정 붙이고 싶으면 머리카락으로 묶어서 고정해야 할 거야.”

“크!”

백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어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한쪽을 손가락으로 쥐고 결대로 쪼갰다. 그런 다음 쪼갠 부분을 벌려 머리와 부적을 동시에 끼웠다.

“크!”

백사는 이마를 금장생 앞으로 가져갔다.

“그 정도면 됐어. 이제 자자! 너도 잘 수 있지?”

금장생은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백사에게 업혀 오면서 실컷 잔 덕분인 듯했다.

“네가 날 업고 온 거구나?”

금장생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가 목표로 삼았던 천신상이 바로 뒤쪽에 있었다.

지도상의 검은 부분, 즉 태월령이 말한 지옥곡은 천신상이 있는 절벽 아래쪽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너와 함께 자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겠구나.”

정이 들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문득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강하고 예쁘기까지 하니까 너는 잘 살 거야. 우리 아버지 말이,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쉽게 극복할 수 있대. 너도 그렇게 살아.”

금장생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잠을 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겨운 일을 떠올리는 거다.

그는 머릿속에 혈반을 그려 나갔다.

한번 완성한 거라 그런 듯 혈반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금세 쉰 개의 혈반이 머릿속에 생겨났지만 머리가 아프진 않았다.

그는 쉰 개의 혈반은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수만 가지 모양을 만들어 냈다.

그중 가장 압권은 쉰 개의 혈반을 하나로 만드는 거였다. 그리고 회전을 시켰다.

엄청난 크기의 혈반이 도는 모습은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어느 순간 금장생은 깜빡 잠이 들었다.

그가 잠에서 깬 것 새소리 덕분이었다.

문득 몸이 다른 때보다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장생은 눈을 떴다.

‘풋!’

그는 피식 웃었다.

백사와 꼭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백사를 껴안은 게 아니라 자신이 백사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가 안겨 있었다.

보통 남녀가 잠자는 그림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따뜻하네.”

완전한 상태가 된 듯 백사의 몸은 아주 따뜻했다.

그때 백사가 눈을 떴다.

“뭐 좀 먹어 볼래?”

금장생은 물었다.

“크!”

백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먹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 먼저 물을 마시고, 그다음엔 우유 그리고 국물, 죽, 채소, 생선, 밥, 고기 등 순서로 말이야.”

“크!”

백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자.”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호수 앞에 나란히 앉아 세수를 했다.

“이거 받아.”

금장생은 조두를 건넸다.

조두를 받아 든 백사는 물과 섞은 후 천천히 비벼 거품을 낸 다음 얼굴을 문질렀다. 그녀는 거품으로 뒤덮인 얼굴을 물속에 비춰 보았다.

“크!”

만족스러운 듯 살짝 미소를 짓더니 물로 헹궜다.

얼굴을 씻고 난 두 사람은 천신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백 장 정도를 걷자 엄청난 높이의 절벽이 나타났다. 천신상은 그 절벽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저기로 가야 해.”

금장생은 천신상을 바라보며 걸었다.

오십 장을 걷자 동굴이 나타났다. 높이는 십오 장, 폭은 십 장이나 되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금장생은 동굴 앞에 섰다. 곤륜에서 보았던 동굴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그는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지옥곡 입구라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둘은 커다란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거의 사라질 무렵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얼마나 깊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서늘한 바람이 올라오고 있는 걸 보면 저 아래쪽은 동굴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내려가자.”

금장생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깊었다. 백여 장을 내려간 것 같은데도 바닥이 나오지 않았다.

바닥에 도착한 건 이백 장을 더 내려간 후였다.

바닥은 지름이 이십 장이나 되는 원형 광장이었다.

광장 전면에는 높이가 십 장 정도 되는 커다란 문이 있었는데, 그 문 위쪽에 금장생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등이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라고 한 것 같은데…….”

금장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네. 자네의 임무는 여기까지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동굴 오른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왔다.

일행을 이끌고 있는 자는 오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다른 이들에 비해 키는 작았지만 풍기는 기운은 어떤 사내보다 더 강했다.

이 사람이 바로 이번 일을 주도한 해왕 백리장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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