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72화 (72/524)

황금가 (72)

천산

흐르는 물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모든 흐름에는 반대로 흐르는 역류逆流가 존재한다.

다만 육안이나 혹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 있다.

특히 빠름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 역류를 연구해야 한다.

마주 보는 상태에서 상대보다 늦게 출수하고도 더 빨리 목표 지점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있는 비법이 역류에 있기 때문이다.

금장생은 그 반대로 흐르는 원리를 이용한 검법을 역류검이라 부른다고 배웠다.

역류검을 익히는 첫 번째 단계는 역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역류를 찾아내는 것이다.

역류는 움직임이 없는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만 진공상태를 제외하곤 완전하게 정지한 공간은 없으니까 흐름이 있고 역류가 있다.

하지만 그걸 힘으로 이용하기엔 너무 미약하다.

역류를 힘으로 이용하려면 어느 정도 흐름이 존재해야 하고, 흐름이 빠를수록 역류도 강해진다.

세 번째는 역류를 타는 것이다.

빠른 흐름 속에서 역류를 찾고, 그 역류에 검을 실으면 비로소 역류검이 완성된다.

역류를 배우는 가장 좋은 장소는 강이다.

공기보다 밀도가 높고, 조용해서 집중력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빨리 흐르기 때문에 역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백사의 허리를 틀어쥔 금장생은 그 역류를 찾아 몸을 실었다.

물론 워낙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가만있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두 발을 놀리는 건 필수다.

금장생이 물을 헤치고 나아가는 속도는 강물이 흐르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그와 백사가 헌원중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멀리 갈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물론 금장생은 간혹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쉬어야 했다.

‘여긴?’

금장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갑자기 물의 흐름이 약해진 거였다. 아울러 역류가 한 방향으로만 생기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호수네.’

흐름이 약해지고 여러 방향으로 역류가 생겨난다는 건 고인 물이라는 뜻이고 그런 장소는 호수뿐이다.

‘그리고 강 상류에 호수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날 리가 없으니까 누군가 팠다는 게 되고, 그 누군가는 마을 사람이겠지.’

금장생은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했다.

그의 예상은 맞았다. 호수 가장자리는 흙이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돌로 쌓아 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인공 호수를 만드는 건 카레즈 때문이기도 하지.’

십여 장을 더 걸어가자 수중 동굴이 나타났다.

수중 동굴은 절반은 물에 잠기고 나머지 절반은 풀로 뒤덮여 있었다. 외부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위장을 해 놓은 게 분명했다.

‘이게 사막에 있는 샘의 원천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금장생은 수중 동굴로 들어갔다.

앞으로 갈수록 수위는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오 장여를 나아가자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제 호수 물은 폭과 높이가 한 장 반 정도인 수로를 따라 흘러갔다.

“저 수로를 카레즈라고 하고, 천산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의 젖줄이기도 해.”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백사를 내려 주었다.

“이제 괜찮아?”

금장생은 백사를 보며 물었다.

물속을 통해 오는 동안 이마에 붙여 두었던 부적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도 백사는 발광을 하지 않았다.

백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툭툭 쳤다.

“부적 붙여 달라고?”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알았어.”

금장생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물통으로 사용하던 양가죽이 나왔다.

그는 그 양가죽 물통 안에 중요한 물건을 보관했다. 원래 물통으로 사용하던 거라, 입구만 잘 막으면 물속으로 집어넣어도 물이 전혀 스며들지 않았다.

입구 부분을 묶었던 줄을 풀고 밖으로 비어져 나온 가느다란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둘둘 말린 채 묶인 부적이 나왔다.

금장생은 줄을 풀고 한 장을 꺼내 백사에게 건넸다.

척!

백사는 부적을 자신의 이마에 붙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처럼 하려고 그러는 거야?”

금장생은 백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사와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알았어. 모른 척할게.”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백사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가자.”

금장생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레즈는 길었다. 상당히 오래 걸은 것 같은데도 위로 뚫린 우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쉬었다가 가야 할 모양이다.”

조금 넓은 장소가 나오자 금장생은 카레즈 한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백사가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을 익혀 놓고도 안 그런 척하는 게 이상하다는 눈빛이네? 맞아?”

금장생은 백사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하지만 백사는 대답이 없었다.

“너와 같다고 할 수 있어. 가장 큰 이유는 귀찮아지기 때문이야. 그동안 왜 숨겼냐고 물으면 대답을 해 줘야 하고, 또 무인들은 얼마나 강하냐 하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에게 배웠는지도 중요하게 여겨. 즉 사문을 말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무공을 밝히면 과거도 함께 밝혀진다는 문제가 발생해. 자랑할 만한 과거가 아니라서 말이야.”

금장생은 백사를 가만히 보았다.

이편을 바라보고 있기는 한데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바라만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너도 그렇잖아. 나와 대화를 하게 되면, 사람인지 아닌지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너에 대한 많은 걸 설명해 줘야 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을 거야. 결국 너는 설명하다 지칠 테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는 게 더 낫지. 안 그래?”

백사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다 쉬었으면 가자.”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금장생을 따라나섰다.

“여기에 왜 호수가 있느냐?”

구라다는 마을 사람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네?”

사내는 겁먹은 얼굴로 구라다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잠에서 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검을 뽑아 든 채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여기에 왜 호수가 있느냐?”

“카레즈에 물을 대려면 호수가 아니면 안 됩니다.”

“카레즈가 뭐냐?”

“지하에 만들어진 수로를 카레즈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하에 수로가 있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럼 호수에 있는 그 수중 동굴이?”

구라다가 마을 사람을 붙잡고 추궁하고 있는 건 우연히 발견한 수중 동굴 때문이었다.

강 상류인 이곳에 호수가 있는 것도 이상한데 호수 안에 있는 수중 동굴은 더 이상했다. 그것도 자연 동굴도 아니고 인공으로 판 동굴이었다.

금장생과 백사가 그곳을 통해 도망친 것 같기는 한데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로 들어와, 마을 사람을 붙잡고 동굴에 대해 확인하는 중이다.

“네. 곳곳으로 뻗어서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물을 어떻게 공급한다는 거냐?”

“카레즈 물은 우물 바닥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근처에 있는 우물의 물은 이 호수에서 공급해 준다는 거냐?”

“네.”

“가장 가까운 우물이 어디 있느냐?”

“거긴…….”

휙!

이야기를 듣고 난 구라다의 신형이 밖으로 쏘아져 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모양이었다. 카레즈는 길고 눅눅하고 어두웠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금장생은 수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어?”

금장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직각으로 뚫려 있던 수로가 갑자기 원형으로 변했다. 그건 곧 저곳이 우물이란 뜻이었다.

“드디어 나가게 되는 모양이다.”

금장생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창문처럼 나 있는 작은 공간 위로 별이 보였다.

금장생은 우물 벽을 살폈다. 좌우측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돌이 보였다.

아마도 우물을 청소하기 위해 내려올 때 사용하는 디딤돌인 모양이었다.

“올라가자.”

금장생은 위로 올라갔다.

우물은 꽤 깊었지만 두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금장생과 백사는 밖으로 나왔다.

“후아! 좋다.”

금장생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깨끗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가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사람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야 해.”

금장생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른편으로 천산이 보였다. 카레즈를 따라오느라 천산과 더 멀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더 이상 쫓아오진…….”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왼편으로 오 장 떨어진 곳에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우물에서 나올 때 보았지만 노숙을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사내는 특이하게 상투를 틀고 있다. 동영 사람들만의 특징이었다.

“날 기다렸던 겁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그렇다.”

구라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의외인가 보구나.”

“나를 쫓는 자들이 오백 명이 넘는 걸로 압니다. 그런데 이곳에 혼자 왔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왔다.”

“아! 혼자 공을 세울 생각이시군요.”

“잘 아는구나.”

구라다는 금장생을 행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삼 장 앞에서 멈췄다.

“자신 있습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자신?”

구라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최강의 적을 앞에 둔 자치고 얼굴색이 너무 태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 없앨 자신 말입니다.”

“그 강시를 믿는 모양인데, 절대적인 빠름 앞에서는 쇠붙이도 무용지물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절대적인 빠름 운운하는 걸 보니까 광도류光刀流의 전수자인 모양이죠?”

“응?”

구라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광도류는 동영의 무공으로, 중원 사람이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네가 광도류를 어떻게 아느냐?”

구라다는 물었다.

“놀랐나요?”

“광도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구라다는 금장생 반 장 앞에 멈춰 섰다. 검을 뽑으면 바로 찔러 넣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그리고 왼발을 천천히 앞으로 내디뎠다.

완벽한 대결 자세였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금장생을 이렇게 경계하는 건 광도류의 전수자란 말 때문이었다.

그걸 안다는 건 자신 또한 비슷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뜻한다. 아울러 그가 아는 한 광도류와 비슷한 무공은 빠름을 자른다고 하여 절쾌류切快流라고 부르는 뇌섬류雷閃流뿐이다.

하지만 뇌섬류는 이십 년 전에 완전하게 사라졌다. 그 무공이 나타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온다.

“나는…….”

금장생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작은 검 손잡이가 잡혀 들었다. 천병총에서 얻은 세 자루 검 중 붉은색 검인 혈잔이었다.

“뇌섬류의 전수잡니다.”

“타하!”

금장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라다의 도가 뽑혔다.

허리춤 검집을 벗어난 검은 엄청난 속도로 금장생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금장생 또한 품속으로 집어넣었던 손을 뽑아냈다.

밖으로 나온 그의 손은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구라다의 도刀 옆으로 향했다.

시작은 늦었지만 속도는 더 빨랐다.

문제는 무기의 길이였다. 구라다의 왜도는 장도인 반면 금장생의 혈잔은 장도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내가 이겼…….”

구라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지워진 건 순식간이었다.

혈잔의 끝에서 붉은색 광채가 솟구쳐 구라다의 목으로 파고들어 갔다.

구라다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의 도 끝은 금장생의 심장 바로 앞에 멈춰 있었다.

“검강과 이 혈잔을 더한 길이는 당신이 가진 카타나刀와 같습니다.”

“기, 길이로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승에 가면 그분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누, 누구를 말하는 거냐?”

“요시아키足利義昭 님입니다.”

“그, 그가 죽지 않았었단 말이냐?”

구라다의 눈이 커졌다.

저승에 가면 안부 전해 달라는 말은 곧 임종을 지켰다는 말이 된다.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가 살아 있다고 했다면 절대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죽었습니다.”

금장생은 기운을 풀었다. 그러자 혈잔의 끝에서 솟구쳤던 검강이 스러졌다.

“커억!”

비로소 구라다의 입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츄아아악!

그리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그분은…….”

“이걸 제게 넘겨주셨습니다.”

금장생은 왼손을 구라다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내민 왼손의 가운뎃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분의 목을 직접 쳐 드렸소?”

구라다의 말투가 공대로 바뀌었다.

“편안하게 웃으며 가셨습니다.”

“그렇군요.”

구라다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 반지의 의미를 아십니까?”

“십육대 쇼군을 뜻합니다.”

“그런데?”

“장사꾼과 쇼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장사꾼을 선택한 겁니까?”

“네.”

“그렇군요.”

구라다의 신형이 그대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진 게 아니었다.

“천지황天地皇의 주인이 됐다는 건 운명의 선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쇼군께서 바라는 삶을 살기 힘들 겁니다.”

“노력할 겁니다. 그럼 편히 가시길!”

금장생은 몸을 돌렸다.

“목을 쳐 주십시오.”

금장생은 걸음을 멈추고 구라다를 돌아보았다.

구라다는 피를 뿜어내면서도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사답게 죽고 싶은 겁니까?”

“살아서는 운명에 휩쓸려 다녔지만 죽어서만큼은 당당해지고 싶습니다.”

“……!

“부탁입니다.”

구라다는 상체를 숙였다.

“알았소.”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라다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한편에 놓인 구라다의 도를 주워 들었다.

“편안한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광입니다, 쇼군!”

스악!

금장생이 쥔 도가 허공을 갈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