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69화 (69/524)

황금가 (69)

혈전

“네가 가야 할 곳이 정확하게 천산 어디지?”

태월령은 차를 마시며 물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찻잔의 재질은 옥이었다. 강가에는 상당히 많은 옥이 굴러다녔는데 그것들 중 크기가 적당한 걸 골라 찻잔 세 개를 만들었다.

“천산에 대해 잘 아십니까?”

금장생은 되물었다.

“어릴 때 오 년 동안 천산파에서 머문 적이 있어.”

천산에는 천산파라는 무림 단체가 있다.

천산에서 도를 닦던 도인들의 모임에서 유래한 문파인데, 그리 강하진 않지만 사막 부자들은 자식들을 천산파로 보내 수학시키고 있다.

“일종의 유학인가 봐요?”

듣고 있던 척사랑이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산파는 어때요?”

척사랑은 다시 물었다.

“유학을 할 때는 대단해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리 크지 않다는 건가요?”

“세상은 천산보다 훨씬 넓다는 걸 깨달은 거죠 뭐.”

“훗!”

척사랑은 피식 웃었다.

“정말 남자 맞아요?”

태월령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내와 여자는 여러 차이가 있지만 웃음도 그중 하나다. 얼굴 표정이나 행동을 바꿀 수는 있지만 웃음까지 바꾸는 건 쉽지가 않다.

그런데 태월령의 웃음에서 여자 얼굴이 자꾸만 보였다.

“저기 물도 있는데 함께 목욕할까요?”

척사랑은 강물을 가리켰다.

“아뇨, 됐어요.”

태월령은 피식 웃었다.

공연한 의심이라는 걸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그보다…….”

그녀는 금장생을 보았다.

“지도에는 어둡게 칠해져 있을 뿐 지명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어둡게 칠해진 부분이 길어?”

“지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깁니다.”

“지옥곡地獄谷으로 가는 거구나.”

“어떤 곳입니까?”

“우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그리고 바닥 아래에는 붉은 강이 있다는 전설이 내려와.”

“가 보셨습니까?”

“가면 죽는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렇군요.”

“하지만 이런저런 소문에 의하면 지옥곡 바닥에는 고대 유적이 있다고 해.”

“고대 유적이라고요?”

“천 년 이전에 건설된 아주 오래된 유적이래.”

“누가 그런 곳에다 건물을 세우죠?”

척사랑이 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천산파 사람들도 아는 게 없는 것 같았어요.”

“비밀을 안고 있는 곳이라는 거…… 응?”

척사랑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왜 그러십니까?”

금장생은 척사랑을 보았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척사랑은 전음을 보냈다.

금장생은 태월령을 돌아보았다.

―아주 많아.

그녀 역시도 인기척을 감지한 상태였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말해도 됩니다.”

강기로 주위를 감싸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한 척사랑이 말했다.

“적은 얼마나 됩니까?”

“수백 명입니다.”

“어떤 자들인지는 알 수 없겠죠?”

“다른 건 모르겠고, 최소한 전에 싸웠던 마적들보다는 강해요.”

“만일 싸우면…….”

“동쪽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북쪽과 남쪽, 강 건너까지 다 있어요.”

“그럼 포위된 거네요?”

“그런 셈이에요.”

“하지만 우리를 볼 수 있는 쪽은 저기뿐이죠.”

금장생은 동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동쪽이라면…… 아!”

척사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금 있는 곳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금장생이 이곳을 야영지로 택했을 때, 바람을 막기 위한 장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린 강으로 들어가서 북쪽으로 갈 겁니다.”

금장생은 강을 가리켰다.

‘역시…….’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이 이곳을 택한 건 포위됐을 때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북쪽으로 가죠?”

여기서 천산으로 가려면 강을 거슬러 남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금장생은 북쪽으로 간다고 한 것이다.

“쫓는 자들이 우리 목적지가 천산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없어지면 바로 알아차릴 텐데요?”

“우리 모형을 만들면 됩니다.”

“모형요?”

“다행히 여기엔 마른 갈대가 아주 많습니다. 그것들과 두 분의 옷이면 모형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닥불이 약하기 때문에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은 가짜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닥불도 약하게 피운 거였군요.”

문득 금장생이 치밀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강신술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쫓기는 자는 늘 도망칠 궁리를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이 기다려 줄까요?”

“그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아무튼 지금은 기다릴 겁니다.”

금장생의 말대로였다.

오십 장 떨어진 곳에 엎드려 있는 헌원중천은 포위망을 완벽하게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투루판 사구에서 본 시체 이백 구였다.

다른 자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구의 시체들에서 알아낸 무기의 수는 세 개였다. 그 말은 곧 그들 이백 명을 없앤 자가 세 명이란 뜻이 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저 앞에 있는 자들은 강신술사를 제외하면 세 명이다.

‘강시는 최소한 활시다. 내가 아는 한 활시는 금강불괴지신에 가깝고.’

헌원중천은 낭인성 무인을 없앤 세 명 중 한 명은 강시라고 확신했다.

‘일단은 기다린다.’

그가 바로 공격하지 않는 건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낭인 이백 명을 없앨 정도면 고수라고 봐야 하고, 그런 그들이 도망쳐 버리면 현재 대원들의 몸 상태로는 추격이 어렵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태 소저와 내가 모르는 게 있군요.”

척사랑은 금장생이 자신과 태월령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울러 숨기고 있는 어떤 게 쫓는 자들의 발목을 묶고 있는 매개체가 분명했다.

“어쩌면 저들이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금장생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알았어요.”

두 사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여기서 벗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일어나더니 게르 옆 갈대숲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확인할 수 있겠네요.”

태월령은 척사랑을 돌아보며 말했다.

“뭘 확인할 수 있다는 거죠?”

“성별 말이에요.”

“왜 그런 거에 관심을 갖죠?”

“마음에 드는 사내에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마, 마음에 들어요?”

척사랑은 뜨악한 얼굴로 태월령을 보았다.

“척 소협은 내가 싫어요?”

“우린 싫다 좋다 그런 걸 따질 만큼…….”

“아무튼 들어가도록 해요.”

태월령은 옷을 벗었다.

“끙!”

척사랑 역시 태월령과 마찬가지로 옷을 벗었다.

둘은 강 앞으로 가 나란히 섰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두 사람은 몸에 물을 묻히고는 강물로 들어갔다.

그사이 금장생은 갈대를 한 아름 가져와 게르 뒤편에 놓았다.

“백사, 정찰하고 와!”

척사랑과 태월령의 옷을 흘끔 쳐다본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크!”

금장생이 말하자 백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숙여라!

백사가 다가오자 헌원중천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백사는 그들이 숨어 있는 곳에서 오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왼편으로 이동했다.

백사가 정찰하는 데 보낸 시간은 일각 정도였다. 그리고 게르로 돌아갔다.

“물이 찬가 보네요. 나는 안으로 들어가 잠시 눈 좀 붙이겠습니다. 한 시진 후에 깨워 주세요.”

고개를 들고 있는 헌원중천의 귓전에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원중천은 전면을 보았다.

물속으로 들어갔던 여자 두 명이 어느새 나와 구부정한 자세로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강신술사와 강시는 보이지 않았다.

―공격 준비 끝났습니다.

그때 제갈영우의 전음이 들려왔다.

헌원중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다려라!

헌원중천은 차갑게 말했다.

냉랭한 목소리 탓인 듯, 제갈영우는 그 후로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그가 다시 전음을 보낸 건 반 시진 후였다.

―저들이 이상합니다, 대천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혹시?’

헌원중천은 빠르게 나아갔다

―전진하라!

그러자 제갈영우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동편에 숨어 있던 자들은 쏜살같이 나아갔다. 잠시 후 그들은 게르 앞에 당도했다.

“빌어먹을!”

헌원중천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그들을 반긴 건 갈대로 만든 인형 두 개였다.

헌원중천은 게르를 향해 일 장을 날렸다.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게르가 뒤집어졌다. 게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부르르!

헌원중천은 온몸을 떨었다.

또 당했다는 생각에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무기력하게 당한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그러다가 분노의 화살을 금장생에게로 돌렸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강신술사 놈!”

휙!

헌원중천은 천산을 향해 몸을 날려 갔다.

“대천좌를 따라간다!”

제갈영우는 크게 소리치고는 헌원중천을 쫓아 달렸다. 그에 이어 대원들도 일제히 천산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이 먼저 달려가자 서쪽과 북쪽에 있던 자들도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모닥불 주위엔 적막이 감돌았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 지났을까.

강물 위로 검은 덩어리 두 개가 나타났다. 그들은 금장생과 백사였다.

주위를 둘러본 금장생은 밖으로 나왔다.

“자식, 게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금장생은 먼저 게르를 살폈다. 구멍만 뚫려 있을 뿐 나머진 멀쩡했다.

그는 게르를 똑바로 앉혔다. 그리고 불씨가 남은 모닥불 위로 나무를 올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곧 불길이 올랐다.

금장생은 척사랑과 태월령 옷에서 갈대를 꺼냈다, 그리고 갈댓잎을 털어 낸 다음 강가로 가져다 놓았다.

잠시 후 강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그들은 먼저 떠났던 척사랑과 태월령이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모닥불 앞으로 가 앉았다.

“물속에 더 있다가는 얼어 죽겠네.”

척사랑은 부들부들 떨며 불 앞으로 다가앉았다.

“천산에서 내려온 물이라 그럴 겁니다. 여기요.”

금장생은 물이 담긴 옥잔을 척사랑과 태월령에게 건넸다.

“찬물 아냐?”

태월령이 물었다.

“두 분께는 삼매진화라는 아주 멋진 기술이 있잖습니까?”

“알아서 데워 마시라는 거네?”

“찬 걸 더 좋아하면 차게 드셔도 됩니다.”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이걸 그냥!”

태월령은 금장생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삼매진화로 물을 데워 마셨다.

“이제 살겠네.”

태월령은 싱긋 웃었다.

뜨거운 물이 들어가자 비로소 한기가 가셨다.

그녀와 척사랑은 따뜻한 물을 전부 마셨다.

“정말 살았다고 생각하느냐?”

차가운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헉!”

“억!”

“응?”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보았다.

“끙!”

금장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 장 떨어진 곳에 조금 전 고함을 내지르며 떠났던 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북쪽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강 건너와 남쪽 그리고 동쪽에도 수십 명씩 서 있었다. 이편을 노려보는 자들의 몸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당했네.”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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