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61)
“이게 뭡니까?”
금장생은 둘둘 말린 종이를 보며 물었다.
그가 난주와 천수 중간 지점에 있는 정서의 한 객잔으로 들어온 건 어둠이 짙게 깔리고 난 후였다. 회색 장포로 강신술사 복장을 완벽하게 숨겼다.
그런데 처음 보는 자가 찾아와 장주 서찰을 내민 것이다.
“석 총관님이 보낸 겁니다.”
“석 총관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죠?”
“총관 이름은 석관영입니다.”
“아, 그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내 고개를 갸웃하고는 서찰을 펼쳤다.
먼저 천산으로 가서 이 지도에 나온 장소로 가시오.
석관영
무작정 천산으로 가라는 것 말고는 이런저런 상황 설명도 없었다.
“가져가세요.”
금장생은 서찰을 원래대로 말아 사내에게 건넸다.
“서찰은 절 주어도 되지만 지도는…….”
사내는 금장생을 보았다.
“나는 강시를 낙양까지 운송하는 걸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다른 일을 시키려면 계약을 추가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그건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논의해도…….”
“우리 아버지 말씀이 믿지 말아야 할 약속 중 일 위는 ‘끝나고 줄게.’, 혹은 ‘마치고 난 후에 계산할게요.’라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고요. 저는 오늘 밤 이곳에서 묵고 내일 천수로 갈 예정입니다. 천수에 머문 후 보계로 갈 생각이고요.”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됩니까?”
“천산까지 가는 비용 삼천 냥에 생명 수당 이천 냥을 더해 오천 냥을 주셔야 합니다. 아무튼 그 돈과 계약서가 내 수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낙양을 향해 갈 거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금장생은 단호하게 말하고 주인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사내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객잔에서 나갔다.
“그래도 되는 거야?”
듣고 있던 태월령이 물었다.
“뭐가요?”
“가는 도중에 행선지를 변경했다는 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걸 뜻하는 거잖아. 그런데…….”
“그래서 이천 냥이나 더 요구한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원래는 천산까지 가는 비용 이천 냥에 생명 수당 일천 냥을 합쳐 삼천 냥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점을 보였습니다. 돈을 내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자들이라면 추가 금액을 요구하지 않았을 거지만 그들은 이천 냥을 더 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잡니다.”
“그러다가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려고?”
“당하지 않도록 해야지요.”
“자신 있나 보지?”
“지금까지도 잘해 왔잖습니까.”
“하긴…….”
“빨리 먹고 자죠.”
금장생은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언제 출발할 거냐?”
태월령은 식사를 하며 물었다.
“내일 아침에 가죠 뭐.”
“알았다. 그런데 그건 언제 풀 거냐?”
“혈마탑을 말하는 겁니까?”
“맞다.”
“잘못 누르면 비밀이 영원히 묻힐 수도 있습니다. 신중 또 신중해야 합니다.”
“끙!”
태월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튼 얼른 먹고 씻고 자자고요.”
“그러자.”
잠시 후 두 사람은 식사를 마쳤다.
“나는 씻고 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세요.”
“알았다.”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 층 객실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금장생은 주인을 불렀다.
“여기엔 어떤 술이 있죠?”
“특별히 좋은 술은 없고, 제가 담근 술이 있습니다.”
“반병에 얼맙니까?”
“그냥 드리겠습니다.”
“공짜로요?”
“네.”
“그럼 한 병 주십시오.”
“풋! 알겠습니다.”
주인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특이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얼마가 됐든 돈을 지불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엔 반병을 달라고 했다가 공짜라고 하자 한 병을 달라고 하는데,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저 정도면 얼굴이 아니라 마음에 철판을 깔았다고 봐야 한다.
주인은 술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금장생은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양피지로 된 책이었는데, 오래된 듯 심하게 낡아 있었다.
그는 첫 장을 펼쳤다.
혈마 목지광이 남긴다.
나는 우연히 이 비급을 얻었다. 앞에 있는 건 내가 얻은 비급의 원본이고 뒤편에 있는 건 원본을 바탕으로 만든 무공이다.
창피한 말이지만 나는 앞에 나온 무공, 아니 무공인지조차도 일 길이 없지만 무공이라고 말하겠다. 그 무공의 절반도 익혀 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나는 초인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러니 원본보다 약하다고 해서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맨 앞장에 적힌 내용이었다.
금장생은 다음 장을 넘겼다.
‘갑골문이네.’
두 번째 장에 적힌 건 고대에 쓰였던 갑골문이었다.
적신천사마공赤神天使魔功.
무공 이름이었다.
“어?”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무공 명칭을 정할 때 ‘사’ 자는 죽을 사死, 뱀 사蛇,간사할 사邪를 주로 사용한다. 반면 적신천사마공에 쓰인 ‘사使’는 관직 이름에 주로 사용한다.
무공 명칭을 그대로 해석하면 붉은 몸을 가진赤神 천사天使의 마공이란 뜻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천사라는 직책은 없었다.
“어떤 무공인지 볼까?”
금장생은 비급을 읽어 내려갔다.
“헐!”
그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적신천사마공을 완성하면 온몸이 붉게 변한다는 건 적신이란 의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적신천사마공을 익히면 붉은 날개가 생겨난다는 거였다.
날개의 수는 성취 정도에 따라 다르게 생겨나는데, 삼 성을 익혔을 때 좌우측에 한 장씩 두 장, 육 성을 익히면 네 장, 구 성을 익히면 여섯 장, 십이 성을 익히면 여덟 장의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돼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날개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날개는 무쇠를 두부처럼 잘라 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하였다.
‘왜 익히지 못한 거지?’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공심법까지 전부 씌어 있었다. 그가 보기엔 익히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갑골문을 해석하지 못해서…….’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보다, 날개를 만들어 내는 부분은 거의 쓰이지 않는 글자로 구성돼 있어 해석이 쉽지 않았다.
혈마 또한 그 부분에서 고생을 하다가 결국 포기를 해 버린 모양이었다.
‘날개라는 건 날기 위해 만든 건데…….’
문득 허공답보나 천상제 혹은 능공허도처럼 날개를 이용해서 하늘을 날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겠네.”
그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응?’
그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따가운 시선이 정수리에 와 꽂히는 게 감지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면을 보았다.
두 탁자 건너편에서 삼십 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자가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인? 미남?’
얼굴은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그런데 사낸지 여자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머리에 쓴 상투관이 작은 얼굴과 참으로 어울렸다.
“비녀가 아주 멋지네요.”
금장생은 먼저 말을 걸었다.
비녀로 상투관을 고정시켰는데, 얼굴보다 더 큰 비녀에는 갖가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환수각의 각주 척사랑이었지만 변장을 한 상태고 또 금장생은 그의 얼굴도 몰랐다.
“그건 무공 비급?”
척사랑은 턱으로 비급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
“어떤 사람에게는 보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제겐 아닙니다.”
“조금 전에 객실로 올라간 그분께는 보물이란 뜻인가요?”
“밖에서 감시하고 있었나 보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일각 전에 들어온 분이 한 식경 전에 객실로 올라간 태 소저를 알고 있다는 건 밖에서 보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니까요.”
“내가 들어온 걸 알고 있었어요?”
척사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들어올 때 금장생은 비급에 몰두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위를 살피는 건 쉽지가 않다. 그런데 금장생은 시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보통이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자란 생각이 들었다.
“제가 귀가 좀 밝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무슨 비급이죠?”
“죄송합니다.”
금장생은 비급을 덮었다.
“천만에요. 그런데 뒤쪽은 아직 보지 않은 것 같은데 덮어도 돼요?”
“뒤편은 제가 봐선 안 되는 부분이라서요.”
“앞은 봐도 되고 뒤는 봐서는 안 된다는 건 무슨 뜻이죠?”
“앞부분은 주인이 없지만 뒷부분은 주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무공의 앞뒤 주인이 다른 경우는 처음 보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참! 전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난 사랑이에요. 그런데 그 술, 혼자 다 마실 게 아니면 나눠 마시죠?”
척사랑은 금장생 오른손 앞에 놓은 술병을 눈빛으로 가리켰다.
“이런, 주인이 술을 가져다 놓은 것도 몰랐네.”
금장생은 주인을 보았다. 그리고 감사의 말을 했다.
“천만에요. 책에 워낙 몰두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조용히 놓고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두 분 다 오세요.”
금장생은 척사랑과 주인을 모두 불렀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손님이 없어 심심했던 듯, 주인은 못 이긴 척 금장생의 탁자로 와 앉았다.
“이거 잔이 부족하군요. 안주도 없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탁자 위를 살피던 주인은 일어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척사랑은 금장생의 탁자로 와 건너편에 앉았다.
“비급의 주인은 아까 그 여자분인가 보죠?”
척사랑은 다시 비급 이야기를 꺼냈다.
“비급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걸 보면 무림인인가 보죠?”
“맞아요.”
“그래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였군요. 맞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맞다는 거죠?”
“비급의 주인이 태 소저가 맞다는 말입니다.”
“비밀을 못 풀었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군요.”
“도대체 언제부터 밖에 있었던 겁니까?”
금장생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오천 냥을 내놓지 않으면 천산으로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부터 들었어요.”
“그럼 다 들은 거네요.”
“그런가요?”
척사랑은 빙그레 웃었다.
“안주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 두 사람 옆으로 와 앉았다.
그런데 그는 안주만 가져온 게 아니었다. 술도 두 병 더 있었다.
금장생은 두 사람의 술잔과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거국적으로 한잔하죠.”
그리고 술잔을 들었다.
“좋아요, 위하여.”
“위하여!”
세 사람은 크게 소리치고는 술잔을 비웠다.
“어?”
“응?”
금장생과 척사랑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이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이 술, 직접 담갔다고 했던가요?”
금장생은 주인을 보며 물었다.
“네. 술에 무슨 이상이라도…….”
주인은 불안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그는 술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술맛이 너무 좋아서 그럽니다.”
“술맛이 너무 좋아요?”
주인의 눈이 커졌다.
“아마 저분도 술이 너무 좋아서 놀란 표정을 지은 걸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금장생은 척사랑을 보며 물었다.
“맞소. 이 술은 내가 먹어 본 술 중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좋소.”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랑 사업 한번 해 보지 않겠습니까?”
금장생은 주인을 보며 말했다.
“어떤 사업을 하자는 건지…….”
“사장님과 제가 함께할 사업은 바로 이겁니다.”
금장생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술을 팔자는 말씀이십니까?”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