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60화 (60/524)

황금가 (60)

척사랑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밭에서 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열심히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호미가 땅을 헤집을 때마다 잡초가 딸려 나왔다.

시골 촌로처럼 생긴 이 사람은 낙양 진가장의 장주이자 팔왕가 중의 한 곳인 해가의 가주 해왕海王 백리장광이었다.

“접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삼십 대 중반의 젊은이가 노인 뒤편으로 다가왔다.

그는 전에 금장생 일행에게 일거리를 주었던 석관영이었다.

“어떻게 됐느냐?”

백리장광은 잡초를 파내며 물었다.

“수어린 일행은 쫓던 자들을 따돌리고 섬서성으로 들어와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가곤륜에서 파낸 강시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둔황으로 들어온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누가 쫓고 있느냐?”

“일곱 왕가는 대외사라는 조직을 급조하여 헌원중천을 사주로 앉혔습니다.”

“화왕이 꽁꽁 숨겨 두었던 아들을 드러낸 걸 보면 급해진 모양이구나.”

“아울러 가곤륜에서 발굴한 강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참! 강시에 대해 이야기 좀 해 보아라.”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우린 그곳에 마천인魔天人이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을 알아내기 위해 고대 서적을 전부 뒤졌습니다.”

“알아낸 게 있느냐?”

“키가 크면서 머리에 뿔이 난 종족은 암흑인暗黑人밖에 없었습니다.”

“암흑인?”

“방문자들 중 한 종족입니다.”

“그 강시가 방문자의 후예란 말이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방문자일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

방문자와 방문자의 후예에는 차이가 있기에 묻는 말이었다.

“방문자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방문자였다면 마천인이 후계자로 삼지 않았을 거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나머지 두 곳에서 발굴한 강시는 상천인과 중천인이라고 했더냐?”

“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위치는 파악할 수 있느냐?”

“하루만 주시면 파악이 가능합니다.”

“위치 파악이 가능하다면 연락도 할 수 있겠지?”

“네.”

“작전을 변경한다.”

“어떻게 변경하시는 겁니까?”

“그들에게 암역暗域 지도를 건네라.”

“암역 근처에서 강시를 인계받으실 겁니까?”

“그럴 참이다.”

“그럼 그들의 귀환을 위해 세웠던 작전은 어떻게 할까요?”

“강시 귀환 작전을 그대로 유지해야 칠왕들은 강시의 목적지가 여기라고 확신할 것이다.”

“그들의 이목을 이곳에 묶어 두고 암역을 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강신술사들에게 지도를 제공하면 일이 끝나기도 전에 암역의 위치가 알려지게 될 겁니다.”

“강시를 건네받고 나면 강신술사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관영.”

“직접 가시겠습니까?”

“폭풍단暴風團만 데리고 갈 참이다.”

“이백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게 되면 바로 알아차릴 겁니다.”

“모두 따로 움직이다가 암역에서 만나면 된다.”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먼저 폭풍단을 내보내고 난 후에 가야겠지.”

“준비하겠습니다.”

“멀리 여행 가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것처럼 꾸며야 한다.”

“네.”

“그리고 강시에 대해 소식이 들어오면 지체하지 말고 보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석관영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가 금장생에 대한 소식을 접한 건 이틀 후였다.

다른 이들은 하루 만에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는데 금장생만은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보고를 하러 갔다.

“정말 난주에 있단 말이냐?”

보고를 받은 백리장광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왕의 아들 헌원장천이 쫓고 있다고 하였다. 헌원장천이 직접 나섰다는 건 그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도 감숙성에서 가장 큰 도시인 난주에 있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헌원중천 일행은 파단길림사막과 기련산맥을 헤매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고용한 개방 방도들도 그쪽에 있고요.”

“그 강신술사가 헌원중천 일행을 따돌렸다는 거냐?”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두 곳으로 간 것처럼 꾸며 놓고 자신은 하서회랑을 따라 이동했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대단한 녀석이구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자에게도 빠른 시일 내에 암역으로 가는 지도를 전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 떠나실 겁니까?”

“오늘 밤이다.”

“그럼 해왕의 대리는?”

“그 역시 내가 떠나는 순간 활동을 시작할 거다. 의심하는 자가 없도록 잘 보필하도록 해라.”

“걱정 마십시오.”

“그래. 그럼 수고해라.”

백리장광은 석관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 자정, 백리장광은 아무도 모르게 폭풍단 단주 광풍사객狂風死客 궁철과 함께 진가장을 나섰다.

* * *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단체를 꼽으라면 대부분 주저하지 않고 춘추오패를 꼽는다.

춘추오패는 고대의 제후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각 지역에 총단을 설치하고 호시탐탐 무림의 주인 자리를 노렸다.

천야교는 산동성에 총단을 두었고, 환수각은 사천에, 운성은 하남에, 해림은 안휘에, 그리고 마원은 운남에 총단을 두었다.

총단이 있는 지역에서 춘추오패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아울러 세력이 없는 성省, 이를테면 감숙성 같은 곳은 춘추오패 중 가까운 곳에 있는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동안 감숙성을 놓고 싸운 세력은 사천의 환수각과 하남성의 운성, 안휘성의 해림이었다.

물론 그들의 싸움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무력 충돌을 자제하고 상권 등을 이용해서 싸움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히 승부가 가려진 것은 아니지만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환수각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다른 세력이 치고 들어올까 봐 늘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던 환수각의 시야에 무인 수백 명의 움직임이 잡혀 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체를 아는 자들이었다면 주시하다 말았을 수도 있겠지만, 환수각 정보원들이 파악하기론 춘추오패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것은 곧바로 환수각 각주에게까지 보고되었다.

황금색 장포를 입고 황금 비녀로 고정하는 상투관을 쓴 자가 첩지를 읽고 있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에서 황금색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내기를 끌어 올리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몸 주위로 자연스럽게 역장이 형성되어 있는 이 사람은 무림십패의 일인이자 환수각의 각주인 천사天邪 척사랑이었다.

척사랑이 읽고 있는 첩지는 최근에 감숙성에서 올라온 보고서였다.

첩지를 다 읽고 내려놓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척사랑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오십 대 중년인이 들어왔다.

깊은 눈동자와 얇은 입술을 가진 이자는 환수각 군사 지야地爺 능천이었다.

“알아봤어요?”

능천이 와서 앉자 척사랑이 물었다.

“한쪽은 흑지 무인이고 다른 한쪽은 혈가, 철가 무인으로 밝혀졌습니다.”

“흑지는 신강무림의 절대자라는 건 알겠는데, 혈가나 철가는 뭐죠?”

혈가나 철가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자들 중 한 명을 잡아서 알아낸 것일 뿐, 저 역시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중원 어디에도 없는 단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무공 정도는 어때요?”

“흑지 무인 오백 명 정도가 그들에게 당한 걸로 보입니다.”

“오백 명이나요?”

척사랑의 눈이 커졌다.

중원 최서단인 신강에 있다고 하지만 흑지는 춘추오패 못지않은 강한 세력이다. 그런 세력 무인 오백 명을 없앨 정도면 상당히 강한 자들이라고 봐야 한다.

“네.”

능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수각이 둔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흑지 무인 시체 때문이었다.

그들이 죽은 이유를 조사하다가 강신술사와 강시를 쫓는 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세력의 출현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요?”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자들이 왜 감숙성에 나타난 거죠?”

“강신술사를 쫓고 있었습니다.”

“강신술사?”

“시체를 강시로 만들어 운송하는 자를 강신술사라고 합니다.”

“그런 직업도 있어요?”

“그쪽 분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극소수만 존재하는 게 강신술삽니다.”

“혈가와 철가 무인들이 쫓는 대상이 하찮은 강신술사는 아닐 테니까 강시를 쫓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흑지 무인이 관여했다는 건 강시를 발굴한 지역이 신강이란 뜻이 되고, 싸움을 했다는 건 강시가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게 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신술사는 어디 있습니까?”

“난주에 있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그들을 쫓는 자들은 파단길림사막과 기련산맥으로 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파단길림사막과 기련산맥은 보고서에 언급돼 있던 장소였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상황으로 보건대 그자는 자신을 쫓는 자들을 파단길림사막과 기련산맥으로 유인해 놓고, 자기는 하서회랑을 통해 난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참!”

척사랑은 피식 웃었다.

영악한 자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갔다.

혈가가 어떤 단체인지 모르지만 신강의 절대 세력인 흑지와 전쟁을 할 정도면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자들을 따돌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했을 뿐 아니라 유유히 난주로 들어와 있단다. 영악할 뿐 아니라 배짱도 좋은 자였다.

“그보다…….”

척사랑은 능천을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흑지 무인 수백 명을 없앨 정도면 상당한 강자라고 봐야 하는데, 춘추오패의 눈을 피하면서 세력을 키우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불가능하긴 합니다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거죠?”

“상단입니다.”

“상단으로 위장한 채로 세력을 키우면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건가요?”

“상단 운영은 많은 위험에 노출되게 돼 있습니다. 중원을 오갈 때는 산적 걱정을 해야 하고 변방으로 나가면 마적의 약탈에 대비해야 합니다. 보통은 낭인 시장에서 낭인을 사서 쓰곤 하는데, 일부 상단은 자체적으로 무인을 키워서 호위를 맡기곤 합니다.”

“상단이 무인을 거느리고 있는 건 이상할 게 없다는 건가요?”

“네.”

“중원 상권을 쥐고 있는 상단은 몇 개나 되죠?”

“우선은 상계의 춘추오패라고 불리는 이대상단이 있습니다. 원래는 삼대상단이라 불렸는데 황금전가가 망하는 바람에 이대상단으로 바뀌었습니다.”

“대륙황가와 상천금가를 말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또 어디가 있죠?”

“이대상단보다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상단이 있는데, 낙양의 진가장, 중원의 표국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 천하표국, 바다 무역과 강을 장악하고 있는 신월해운, 주로 동영 물건을 취급하는 태양상인, 조선의 인삼과 종이 등을 판매하는 상인이 있습니다.”

“그들이 전부 무인을 거느리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사된 바 없습니다. 저희가 상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황금전가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

“참! 황금전가 멸망에 대한 조사는 진척이 있나요?”

“지금까지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무인이 관련돼 있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 어떤 세력에 의해 어떻게 멸망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황금전가에서 운영하던 사업체까지 전부 망했다는 겁니다. 중원삼대상단의 한 곳이라 불리는 그런 곳을 완벽하게 멸망시킬 수 있는 단체는 상단밖에 없다는 게 저희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여전히 황금전가의 멸망은 오리무중입니다.”

“그런데 단서를 찾았다는 건가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혈가나 철가의 짓일 수도 있고, 그들이 상단의 주인일 수도 있다는 거군요.”

“아직은 짐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일 황금전가를 멸망시킨 세력이 상단이라고 했을 때 단일 세력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보세요?”

“아닙니다. 최소한 두 곳입니다. 그리고 무림 세력도 관련돼 있고요.”

“상단은 상권 다툼 때문에 황금전가를 없애려고 했다고 해도 무림 세력이 관여했다는 건 조금 억지 같은데, 아닌가요?”

“우리가 무림 세력이 관여했다는 결론을 내린 건 상단의 입장 때문입니다.”

“상단의 입장이 어째서요?”

“그들은 무림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걸 철저하게 숨겨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금전가를 칠 때 자신들의 힘으로 하면 무림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게 바로 드러나고 말죠. 그건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입니다.”

“하지만 무림 세력에도 부담이 되지 않을까요?”

“일반 무림 세력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황금전가와 외상 거래가 아주 많은 세력이라면 상황이 달라지지요.”

“설사 그렇게 해서 외상값을 갚지 않게 된다 해도, 그 사실이 중원무림에 알려지면 신뢰가 땅에 떨어지게 될 거예요. 내 생각에는 외상값 때문에 황금전가를 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아요.”

“전면으로 나섰을 때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황금전가를 없애려고 하는 측에 무인만 빌려주면,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 수가 있죠.”

“그렇군요.”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하실 겁니까?”

“감숙성으로 가 볼 생각이에요.”

“감숙성은 왜?”

“거대 세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런 면에서 볼 때 혈가나 철가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가문일 가능성이 높아요. 앉아서 보고를 받는 것보다 직접 확인해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해도 직접 간다는 건…….”

“우리예요.”

척사랑은 말했다.

“우리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황금전가와 외상거래를 가장 많이 한 문파가 바로 우리 환수각이라고요.”

“네?”

능천의 눈이 커졌다.

“물론 돈을 빌린 건 내가 아니고 조부님이에요.”

“얼마나 되는데…….”

“조부님이 써 준 차용증의 금액을 현 시세로 환산하면 환수각을 두 번 사고도 남아요.”

“저, 정말입니까?”

능천은 말을 더듬었다.

척사랑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문제는, 난 황금전가를 없앨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척사랑은 전면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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