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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57화 (57/524)

황금가 (57)

장사꾼, 진짜 장사꾼

태월령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흙으로 된 천장이었다.

“여긴…….”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천장이 전부 흙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눈에 익었다.

‘그 동굴이네.’

이내 피식 웃었다.

그녀는 누운 상태 그대로 몸 내부를 살폈다. 단전에서 솟구친 내기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몸 상태는 정상이었다.

‘언제 기절한 거지?’

태월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물속으로 뛰어들고 적을 다섯 명 없앤 것까지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 숨어 있던 동굴 안이다.

그녀는 누운 상태 그대로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내부를 확인했다.

오른편에 금장생과 강시가 나란히 누워 있다. 금장생은 깊이 잠들어 있고, 강시는 그런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어떨 때 보면 살아 있는 사람 같아.’

태월령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끙!”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러나 있는 가슴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가슴 부분이 떨어지는 바람에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걸 확 입을 막아 버릴까?’

태월령은 금장생을 쏘아보았다.

손가락만 튀기면 금장생을 바로 없앨 수 있다. 그러면 수치스러운 느낌을 떨쳐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서라. 가슴 아니라 더한 곳까지 다 보여 주었으면서…….”

태월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몸을 드러낸 건 금장생 탓이 아니었다. 금장생은 찾기 쉬운 곳에 옷을 두었지만 입기를 거부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옷부터 사 입어야지, 이건 뭐.”

그는 동굴 입구로 갔다. 입구는 처음 만들 때와 비슷한 상태였다.

엎드린 채로 밖을 내다보았다. 동굴 앞에 있던 시체도 없고, 월아천에 사람도 없었다.

“대단한 녀석.”

태월령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 같으면 절대 다시 이곳으로 올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금장생은 다시 이곳으로 왔고, 적의 추격을 따돌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 누구나 알고 수색을 마친 지역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 숨기 위해서는 큰 배짱이 필요하다.

그리고 설사 숨는다고 해도 저리 태평스럽게 잘 수가 없다. 전전긍긍하며 밖을 살필 게 분명하다.

아무튼 여러모로 놀라운 녀석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가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때 상당히 많은 수의 적이 호수 안으로 들어왔다. 기절한 사람과 강시를 데리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궁금했다.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될 테고, 나도 좀 더 자야겠다.”

태월령은 금장생 옆으로 누웠다.

“그런데 이 녀석 이름이…… 킥!”

태월령은 피식 웃었다.

몇 날 며칠을 함께 왔고, 함께 죽음의 위기를 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대단하다.”

태월령은 눈을 감았다.

푹신한 침대가 간절했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시 잠에서 깬 건 옥죄어 오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금장생에게 등을 댄 채로 안겨 있었다.

금장생이 누워 있는 위치는 아까 보았던 그 자리였다. 그렇다면 자리를 이동한 사람은 그녀라는 뜻이 된다.

아마 밤이 돼 기온이 떨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곳을 찾아 이동했는데 그게 금장생의 품이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안기지 않고 등을 맡긴 건 사랑하는 사내가 아니라 경계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으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이건 또 뭐냐고?’

태월령은 시선을 내렸다.

손 두 개가 포개진 채 왼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가슴을 움켜 쥔 손은 금장생의 손이고, 그녀의 손은 그런 금장생의 손등을 덮고 있었다.

상황으로 보건대 먼저 금장생이 가슴을 쥐고 그걸 뿌리치고자 그의 손을 잡은 건 절대 아니었다. 잠을 자던 금장생은 느닷없이 따뜻한 물체가 자기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렸을 것이다.

오른팔 위에 걸쳐져 있던 그의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긴 건 그녀다. 즉, 옷 사이로 스미는 찬 바람을 막기 위해 금장생의 팔을 이용한 것이다.

“내가 그런 건가요?”

그때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자지.”

태월령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손 놔도 되나요?”

“응.”

태월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금장생은 손을 놓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혹시 밖은 살펴봤어요?”

“이름이 뭐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 질문을 했다.

“이름요?”

“응.”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말했다면 내가 알지 않을까?”

“그러네요.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래 살라고 그렇게 지은 건가?”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사내들이 단명했나 보지?”

태월령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처음엔 어색해서 등을 보이고 앉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금장생을 마주 보았다.

가슴이 드러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아니고, 제가 얼마 살지 못하는 절맥을 안고 태어났거든요. 치료를 하기는 했지만 절맥이라는 게 완치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병이잖아요. 그래서…….”

“어떤 절맥인데?”

“아홉 개의 맥이 막힌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구양절맥?”

태월령의 눈이 커졌다.

구양절맥은 그녀도 아는 병이다.

혹자는 남자는 양기를 지니고 여자는 음기만 지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양기와 음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데 남자는 양기가, 여자는 음기가 약간 더 많을 뿐이다.

그런데 음기나 양기가 아예 없이 태어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 사내는 구양절맥, 여자는 구음절맥이라고 한다.

음기나 혹은 양기가 없다 보니 태어난 지 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내는 말라 죽고 여자는 얼어 죽는다.

때로는 삼 년 이상 사는 사내나 여자가 있기도 한데, 그런 이들은 완전한 구양절맥이나 구음절맥이 아닌 경우다.

그렇다고 해도 수명이 십 년 늘어난 것일 뿐 죽는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금장생이 그런 절맥을 앓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절맥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같은 증상을 가진 여자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다.

구양절맥을 타고난 사내는 반드시 구음절맥을 타고난 여자를 만나 합방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의 절맥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구양절맥이나 구음절맥을 타고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짝이 정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건 합방이 가능할 때까지 살아남은 이들의 치료법이지, 삼 년을 넘기지 못할 상황에서는 써먹을 수가 없잖습니까.”

“그럼 어떻게 치료하는데?”

“체질을 바꾸는 방법이 있잖습니까?”

“아! 벌모세수?”

태월령은 나직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벌모세수를 하려면…….”

무가가 아닌 곳에서 태어난 자식을 벌모세수시키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

태월령은 금장생을 보았다.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어릴 때는 우리 집이 좀 살았거든요.”

“그랬구나.”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밖을 한번 살펴볼까요?”

금장생은 입구 쪽으로 가서 엎드렸다. 그리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월아천을 살피고 다음으로 월아천 근처 숲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내일 저녁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금장생은 돌아누워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내일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고?”

태월령 역시 금장생처럼 돌아누웠다.

다시 가슴이 드러났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남아서 감시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거든요.”

“원래 성격이 그렇게 철두철미해?”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동안 금장생과 함께 오면서 파악한 성격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하다는 것이었다.

“생존에 대해서만 그래요.”

“그럼 할 말 없네.”

태월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음식 줄까요?”

“그럼 좋고.”

태월령은 배를 슥슥 문질렀다. 갑자기 극심한 허기가 밀려왔다.

금장생은 등짐에서 음식을 꺼내 태월령에게 건넸다.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각자 일을 했다.

금장생은 혈마탑을 꺼내 살폈고, 태월령은 운기행공을 했다.

금장생은 살피던 혈마탑을 내려놓고 태월령을 보았다. 악다문 입술이 참 고집스럽게 보였다.

“이복동생으로 산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제대로 잘 컸네.”

둥실!

느닷없이 태월령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내공이 삼 갑자를 넘어야 보일 수 있다는 부공삼매 현상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강해진 건지도 모르겠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으니까.”

금장생은 다시 혈마탑을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일부터 십이까지 숫자가 적힌 이 층이었다. 이 층에는 각각의 면에 열두 개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그의 시선이 사 층으로 향했다.

“꽃이 봄에 피고 삼월, 사월, 오월이니까…….”

그의 시선이 삼 층으로 향했다. 한 달에 해당하는 숫자가 적혀 있는 층이었다.

그는 삼三 자를 꾹 눌렀다.

철컥!

나직한 소리와 함께 삼 자가 쑥 들어갔다.

“그리고 이 층에서는?”

사四 자를 꾹 눌렀다.

이번에도 역시 쇳소리와 함께 사 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맨 아래층에서 금장생이 누른 숫자는 오五였다.

일 층의 숫자까지 누른 그는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번에는 비 내리는 풍경이 그 앞으로 오게 했다.

“비는 여름을 나타내지. 여름을 나타내는 숫자는 육, 칠, 팔이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이 층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눌렀다. 이번에도 역시 숫자는 그르릉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금장생은 순서대로 눌렀다.

여름과 가을이 끝나고 겨울도 맨 아래층만 남겨 둔 상태에서 금장생은 손을 멈췄다.

바로 앞에서 다소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들었다. 운기행공을 끝낸 태월령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 얼굴은 어떤 기대감으로 인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금장생은 혈마탑을 내려놓았다.

“왜 그만두는 거지?”

태월령은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비밀을 풀고 나서 가격을 말하겠다고요.”

“혈마탑의 비밀을 내게 팔겠다는 거야?”

“네.”

“얼마에 팔 건데?”

“십만 냥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내게 그런 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십만 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현재 자신 입장에서 십만 냥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제가 받아야 할 가격이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즉 흑지 수장이 된다거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얻게 되면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를 하셔야 합니다. 물론 문서로도 남겨 주셔야 하고요.”

“십만 냥을 다 그때 갚아도 된다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우선 최소한 일 할은 줘야 합니다.”

“일 할이라고 해도 일만 냥이나 된다. 내 입장에서 만들 수 있는 돈이 아니다.”

태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흑지 지존의 따님이 일만 냥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을 믿으란 말입니까.”

“창피하지만 사실이다.”

“그럼 비밀도 없습니다.”

금장생은 매몰차게 말했다.

“널 죽일 수도 있다.”

“날 죽이면 흑지 지존의 꿈은 정말로 물거품으로 변하겠지요.”

“제길!”

태월령은 금장생 앞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내 몸을 얼마 쳐줄 거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밀을 넘긴다면 내 몸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말이다.”

“저에 대한 비밀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비밀?”

“저는 여자보다 돈을 백배는 더 좋아합니다. 돈 한 냥과 몸매 좋은 미인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백이면 백 한 냥을 선택합니다.”

“넌 사내가 아니구나.”

“이 세상에 성별이 없는 새로운 종족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진짜 장사꾼입니다.”

“진짜 장사꾼?”

“돈을 추구하는 자들은 장사꾼이라 하고 돈을 좋아하는 자들을 진짜 장사꾼이라고 합니다.”

“추구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돈을 추구하는 자는 좀 더 나은 생활, 즉 고급스럽게 살기 위해 돈을 법니다. 그들의 특징은 돈을 많이 버는 만큼 많이 쓴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좋아하는 자들은 생활을 위해 돈을 벌지 않습니다.”

“그럼?”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을 법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은, 돈이 많아진다고 해도 절대 생활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을 쳐다보며 포근한 미소를 짓는 사람은 거의 그런 부류라고 보면 됩니다.”

“포근한 미소?”

“네.”

“헐!”

태월령은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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