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50)
“그나저나…….”
태월령은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태무영처럼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나가는 길도 알지 못한다. 길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강신술사를 찾는 게 더 빠른 방법이었다.
“응?”
지하 공간을 헤매던 그녀는 옷을 발견했다.
“훗! 악마소 주인은 심성이 악하다고 했는데 내가 잘못 본 건가?”
태월령은 피식 웃었다.
웃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공과 관련된 웃음은 세 가지다.
첫째는 환락소로, 색공의 극을 이루면 저절로 얻어진다. 환락소를 완성하면 웃음만으로 적을 색의 노예로 만들 수가 있다.
네가 얻어야 할 미소다.
두 번째는 천살소天殺笑다.
천살소는 수많은 살인을 통해서 얻어지며, 살인의 극이라 불린다. 어린아이를 죽이고도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냉혈한으로 살인과 일상을 구분하지 않는다.
천살소를 확인하는 방법은 환하게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득한 살기가 감지되거나, 웃는 얼굴을 짓이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구친다면 그자는 백이면 백 천살소의 소유자다.
세 번째는 악마소惡魔笑다.
악마소의 구분은 쉽다. 활짝 웃는 얼굴에 공포의 기운이 가득 들어 있다면 십중팔구는 악마소다.
악마소를 얻은 자의 특징은 아주 독종이라는 거다. 하나의 일에 몰두하면 그 일이 아무리 사소한 거라고 해도 목숨까지 걸고 마는 특이한 종자들이다.
미친놈의 웃음이라고 해서 일명 광기소狂氣笑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미소들 중 가장 무서운 걸 꼽으라면 나는 악마소라고 단언한다. 왜냐면 맨정신인 자는 어떻게 든 상대할 수 있지만 미친놈은 어찌해 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태월령이 색공을 전수해 준 사부로부터 배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강신술사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가 바로 그 악마소였다.
“성의는 고맙다만…….”
태월령은 자신의 옷에서 요대만 빼 들었다.
요대 양 끝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검집에 비수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녀의 무기인 일월쌍비日月雙匕였다.
그녀는 요대를 허리에 찼다.
알몸에 요대를 차면 우스꽝스러울 법도 한데 그녀는 달랐다. 오히려 알몸에서 흘러나오는 요기가 더욱 강해졌다.
태월령은 그 상태로 금장생과 백사를 찾아 나섰다.
그 시각.
금장생과 백사는 새로운 장소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지금까지 지나쳐 왔던 장소와 달랐다. 벽면 가득 글이 남겨져 있었다.
그 글 역시 금장생은 읽을 수 있었다.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처럼 변하지 않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 세월 속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묻었다.
이제는 고향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돌아갈 길을 찾는 우리를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이라며 욕한다.
문득 회의감이 밀려든다, 저런 자들을 위해 그런 노력을 해야 했는지.
더하여 반란의 조짐도 보인다.
그자들은 호수 물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우리 탓이라고 소문을 내고 있다.
만일 내가 이곳에 다시 글을 남긴다면 그땐 여기를 떠날 때가 될 것이다.
이곳은 과거에 살았던 누군가의 개인 공간이었다. 아마도 종이 같은 게 없어 벽에 일기를 남겨 둔 것 같았다.
지독한 놈들이다.
아니, 그자들이 그렇게 강할 거라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우리가 패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전에도 노예였고, 후에도 노예여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이건 또 뭐지?”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본 것과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금장생은 다른 글로 시선을 주었다.
이제 이곳을 떠난다.
돌아가는 길은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건,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끝이 아니라는 걸.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돌아올 테고, 다시 이곳의 주인이 될 것이다.
“……!”
글을 전부 읽었지만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았다.
가장 큰 의문은 이 글을 남긴 자가 누구냐 하는 거였다. 아무리 집중해서 읽어도 글을 남긴 자의 정체가 짐작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세상 사람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너는 이해가 가?”
금장생은 백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답답해서 해 본 소리였다.
“그리고 여기 말인데…….”
금장생은 한 부분을 가리켰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노예들의 능력을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완벽한 기회를 위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도 지니고 있었다.
우린 그들을 검투사로 키웠다. 무기를 쥐여 주고 검투장으로 몰아넣고 피 흘리며 싸우는 걸 보고 즐겼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혹은 도박에서 돈을 따기 위해 더 강한 검투사를 만들고자 하였고, 노예들에게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최강의 노예 검투사를 보유한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었다. 아울러 노예들을 통해 어느 가문이 더 뛰어난 무기를 만들었는지 시험하곤 했다.
그때 그들에게 쥐여 준 무기는 총 열 가지였다.
우리 가문에서 만든 무기는 악마의 눈이라고 불리는 건틀릿이다. 다른 가문 또한 검, 도, 창, 유성추, 방패, 갑옷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노예들에게 주어 싸움을 시켰다.
수십 전의 싸움 끝에 각 무기들의 서열이 정해졌다. 영광스럽게도 우리 가문에서 만든 건틀릿이 일등을 했다.
우리 가문은 한껏 들떴다.
이제 건틀릿을 대량생산하여 기사들에게 공급하면 최강의 가문으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진압한 다음 주동자 몇 명만 처단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놀랍게도 노예들은 우리가 준 무기로 무장을 했고, 각 가문에 있던 자들이 연계하여 조직적으로 대항해 왔다.
‘전란의 시대’라고 부르는 기나긴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들어 노예들을 통해 시험했던 열 가지 무기였다. 그 무기에는 우리가 가진 힘의 근원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내재돼 있었던 거다.
그래서 우리 열 가문은 그것들을 파괴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회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이미 뿌리를 내려 회수가 불가능했다.
그 일을 하면서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것들 중 일곱 가지는 파괴했다.
“카밀이 말한 그 전란의 시대 같지?”
카밀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도 ‘전란의 시대’라는 글을 보게 된 것이다.
수백 년 전 사람이 거짓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전란의 시대’는 존재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금장생은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소매가 올라가면서 건틀릿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장생은 자신이 차고 있는 건틀릿이 어쩌면 그때 만들어진 열 가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전혀 사용할 줄을 모른다는 거야.”
금장생은 팔을 힘껏 휘둘러 보았다. 뭔가가 발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건틀릿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와 인연이 아닌 모양이야.”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만 가자.”
이곳에서 많은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금장생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금장생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특이한 공간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상당히 넓었다.
반 시진 정도를 더 가자 이윽고 석문이 나타났다. 석문 왼편에는 고리가 달려 있었다.
“여기가 나가는 곳인가 보다.”
금장생은 석문 고리를 잡았다.
“멈춰!”
문을 열려고 힘을 주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르네.’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기절시켰던 여자였다. 글을 읽느라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따라잡힌 모양이었다.
‘살기가 없다는 건 날 죽일 의사가 없다는 걸 뜻하니까…….’
금장생은 고리를 놓고 몸을 돌렸다.
“어?”
태월령을 본 금장생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빛이 확연했다.
그녀는 여전히 알몸이었다.
“옷을 발견하지 못한 건가요?”
“못 봤으니까 이런 모습이겠지.”
태월령은 금장생 앞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몸의 각 부분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거라도 줄까요?”
금장생은 자기 장포를 가리켰다.
‘이놈 봐라?’
태월령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는 금장생이 잔뜩 겁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제 옷을 입을 거냐고 태연하게 묻기까지 한다.
“겁나지 않느냐?”
태월령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날 죽일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겁먹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장담하지?”
“살기가 없잖습니까.”
“살기?”
“정말로 죽일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과 위협만으로 끝나는 건 차이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널 죽일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거냐?”
“아닌가요?”
“맞다.”
태월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마음이 변해 널 죽일 수도 있다.”
“아까는 악마소라고 하면서 경악하는 것 같던데 그건 아무것도 아닌가 보죠?”
“무공을 익힌 자가 악마소를 가졌다면 겁을 먹어야겠지만, 너도 알겠지만 지금 너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니까 악마소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걸 가졌다고 해도 의미 없다는 건가요?”
“잘 아는구나.”
“그렇다고 해도 소저는 날 죽이지 못합니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믿는 건 바로 이겁니다.”
금장생은 혈마탑을 꺼내 들었다.
“그 혈마탑은 검으로 후려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혈염강철血炎鋼鐵로 만들어져 있다. 네가 아무리 강한 힘으로 내던져도 절대 부술 수 없다.”
태월령은 금장생이 혈마탑을 부숴 버리겠다는 걸로 협박해서 위기를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날 협박할 건 아무것도 없다.”
태월령은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금장생과 그녀 사이의 거리는 반 장도 되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태월령의 몸에 난 점까지 금장생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그러십니까?”
“네가 걱정해야 할 건 내 미래가 아니라 네 미래다.”
태월령은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검은 피부에 진득한 살기가 입혀지기 시작했다.
“꼭 죽이진 않더라도 사지 중 한 곳 정도를 잘라 버릴 생각이군요.”
“역시 머리가 좋구나. 맞다. 나는 네놈의 눈 두 개 중 하나를 뽑아 버릴 생각이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제 눈을 못 쓰게 하는 건 절대 못 합니다. 이건 내기해도 좋습니다.”
“내기?”
“네.”
“지금 내기를 하자는 거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기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내기를 하고 싶구나.”
“우리 아버지 말씀이 이 세상에는 백해무익한 게 여럿 있는데 그중 최고는 도박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기를 하지 않으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태월령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에 뿌연 광채가 어렸다. 그건 검강劍罡보다 더 익히기 어렵다는 장강掌罡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소저는 어떤 내기를 하고 싶습니까?”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종이 되는 거다.”
“누군가의 인생을 걸고 하는 내기는 원칙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기는 반드시 살인으로 끝나게 돼 있습니다. 왜냐면 패한 사람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상대를 죽이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기에 응하지 못하겠다는 거냐?”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너는 어떤 내기를 하고 싶으냐?”
“내가 이기면 한 가지를 부탁할 생각입니다.”
“어떤 부탁을 하겠다는 거냐?”
“호윕니다.”
“호위?”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저를 쫓는 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로부터 저를 지켜 달라는 겁니다.”
“좋다.”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그녀도 바라는 바였다. 쫓기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기 조건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소저가 바라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이기면 한 가지를 들어주면 된다.”
“어떤 겁니까?”
“그건 나중에 말하겠다.”
“제 신체를 제약하는 거나 현재 상황을 넘어서는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걸 확실히 해 주셔야 그 내기에 응할 수 있습니다.”
“물론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현재나 십 년 후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너다.”
“십 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 거란 말입니까?”
“강신술사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느냐?”
“……!”
금장생은 할 말이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신술사라는 직업은, 죽는 사람이 없진 않을 테니까 망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발전할 가능성도 없다. 전쟁이 나서 떼로 죽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닙니다. 적어도 십 년 뒤에는 지금과 다를 겁니다.”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여러 개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은 사장이지만 그때는 여러 사장을 거느린 회장이 돼 있을 겁니다.”
“회장이 뭐지?”
“무림의 회주와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 업체를 거느리는 게 꿈이라는 거지?”
“물론입니다.”
“좋다. 그건 네 꿈이니까 네가 알아서 하면 될 테고, 내가 네 눈을 뽑지 못하는 이유를 대라.”
태월령은 거둬들였던 내기를 다시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뿌연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 눈이 달린 살벌한 내긴데 제가 너무 태연했네요.”
금장생은 품속에서 혈마탑을 꺼냈다.
“나는 인내심이 바닥에 닿았다.”
마침내 태월령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소저가 내 눈을 뽑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이 탑 일 층의 비밀을 풀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이기지 않았습니까?”
금장생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