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8)
금장생이 대담한 놈일 뿐 아니라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혈탑. 묻음. 나를 쫓는 자들을 없애 주면 돌려줌.
지휘관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놈은 이미 자신을 쫓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쫓는 자들을 없애 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아니, 그보다 더 짜증 나는 건 혈마탑을 묻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놈을 죽일 수가 없다. 아니,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놈이 죽으면 혈마탑을 찾을 수 없으니까.
“원하는 대로 해 준다. 그리고 혈마탑을 찾는 순간 널 죽인다.”
지휘관은 짓씹듯 중얼거렸다.
“창하!”
그리고 부하를 불렀다.
“네.”
“대원들에게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없애라고 전달하라!”
“존!”
창하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아악!”
최초의 비명이 들려온 건 명령이 하달되고 이각 후였다.
비명 소리에 가장 놀란 자는 대력철후 찰미하와 최곤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왕궁 터로 보이는 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비명을 지른 자가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누가 비명을 지른 거냐?”
“누구냐?”
최곤과 찰미하는 동시에 고함을 내질렀다.
“아악!”
“으아악!”
이번에는 연속해서 두 번이었다.
“저, 적입니다”
“적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아군이 공격받았다는 것도 알았다.
찰미하와 최곤은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전 대원은 공터로 집합하라!”
“조선 무인은 이쪽으로 와라!”
두 사람의 외침이 고대의 유적 폐허를 뒤흔들었다.
“조선 무인?”
흑지 무인 지휘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론 조선은 산동성 동쪽 바다 건너에 있다. 그런데 수만 리 떨어진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조선 무인이 이곳까지 왜 왔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지휘관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저도 잘…….”
“그렇겠지. 아무튼 전 대원을 지상으로 올려 보내라.”
“적은 예순 명 정도고 대부분 일륩니다. 특히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은…….”
“나는 혈랑血狼 태무륵이다, 창하.”
지휘관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이 너무 강해 창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역시!’
창하의 눈동자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흑지의 지존인 신강태존新疆太尊 태천야는 삼남 이녀를 두었는데 다섯 자식들이 전부 뛰어나 천랑天狼 태무황과 흑랑黑狼 태무영, 혈랑 태무륵은 신강삼랑으로 불리고 두 딸인 백사白沙 태일령과 흑사黑沙 태월령은 신강이화와 신강이살 두 가지로 불린다.
가장 아름다우면서 가장 잔인한 심성의 소유자란 뜻이다.
신강의 율법이 그렇지만 일찍이 신강태존 태천야는 흑지를 적자에게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자가 흑지의 주인이 될 거라고 하였다.
보통은 가장 강한 자라고 하면 세 아들이나 딸 둘을 포함한 다섯 자식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태천야는 그마저도 적시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가장 강한 자는 흑지에서 가장 강한 자를 말한다.
흑지의 모든 문도들에게 지존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물론 하급들에게는 꿈같은 소리다. 하지만 목에 힘깨나 주는 자들과 차곡차곡 실력을 쌓은 자들은 야망을 꿈꿔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태천야의 다섯 자식은 전보다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지금 보여 주는 무공 경지다.
‘문제는 다른 자식들은 이곳에 혈마탑이 있다는 걸 모르냐 하는 건데.’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까지 오면서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다. 객잔 주인을 없앤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숨길 수는 없다는 게 창하의 생각이었다. 처음엔 헤맸겠지만 지금쯤 이곳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게 분명하다.
“그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태무륵 또한 창하와 같은 생각이었다.
형제들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가급적 서둘러 마치고 싶어 했다.
태무륵과 창하는 곧 지상으로 올라갔다.
“이제 다 나갔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금장생과 백사였다.
“그놈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보니 이게 대단한 물건이긴 한가 보다.”
금장생은 혈마탑을 꺼내 들고 싱긋 웃었다.
“카!”
“얼레? 이젠 말까지. 이 정도에서 그만해, 백사. 네가 계속 사람에 가까워지면 나중에 해강할 때 힘들어진단 말이야.”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광장에는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증거를 대라면 할 말은 없지만 육감은 분명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눈엔 보이지 않았다.
“개똥도 약에 쓰려니까 없다고 하더니, 발에 치이던 귀신 하나도 안 보이네.”
금장생의 말대로였다.
이 정도 공간이면 지박령 하나 정도는 살 만도 한데 아무도 없었다.
“여긴 완전 귀신 청정 지역이네.”
“아악!”
“으아악!”
“크아악!”
지상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모양이다.”
금장생은 기둥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갔다.
특이하게 지하 광장 한가운데에는 다섯 개의 기둥이 서 있었다.
“천장을 떠받칠 용도라면 힘을 분산해야 하니까 여기저기에 서 있어야 해. 그런데 지하 광장에서 기둥은 여기뿐이야. 그게 무슨 뜻일까?”
금장생은 기둥을 살폈다.
기둥 표면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게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섯 개의 기둥을 다 살펴본 후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상자 안에 넣어 두었던 혈마탑을 꺼내 살폈다.
창! 창창창! 창창!
“아아악!”
“으아아악!”
“크악!”
싸움이 격해지는 듯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장생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혈마탑에 집중돼 있었다.
“전부 삼백예순다섯 개야.”
금장생은 혈마탑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그가 혈마탑 일층 네 벽에서 찾아낸 숫자의 개수였다.
“삼백예순다섯 개 하면 생각나는 거 없어?”
금장생은 백사를 보았다. 하지만 백사가 대답할 리가 없었다.
“뒤에 날짜를 나타내는 일日을 붙이면 삼백육십오 일, 즉 일 년이 되는 거야.”
금장생은 혈마탑을 다시 원래 자리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섯 개의 기둥을 보았다.
“찾았네.”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시선을 분산시킨 후 다시 보자 한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기둥 앞뒤에 나 있는 홈이었다.
기둥의 앞뒤 중앙에는 폭과 깊이가 한 치 정도 되는 홈이 바닥에서부터 위쪽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처음 관찰할 때도 보았다.
이번에 금장생이 발견한 건 그 홈과 이어진 바닥 선이었다. 먼지로 덮였는지 아니면 숨기기 위해 흙이나 돌가루로 막아 버렸는지 모르지만 바로 보이지 않았다.
“한번 그어 볼까?”
금장생은 선을 그을 물건을 찾았다. 하지만 바닥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천생 이것뿐이네.”
그는 혈마탑의 꼭대기 부분을 홈에 찔러 넣고 힘을 줘서 죽 그었다.
처음엔 홈이 잘 파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힘을 쓰자 홈이 나타났다.
홈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었다. 그렇게 기둥을 따라 홈을 다 파자 커다란 원이 나타났다.
“원이 전부가 아니겠지?”
금장생은 다시 바닥을 이리저리 팠다. 그러자 또 다른 홈이 나타났다.
그는 그 홈을 전부 팠다.
태무륵 일행이 보면 기겁할 노릇이지만 금장생이 홈을 팔 때 사용한 도구는 일관되게 혈마탑이었다.
“넌 이게 뭔지 알아?”
금장생은 그가 파 놓은 홈으로 시선을 주었다.
바깥쪽에는 원 두 개가 연이어 그려져 있고 내부에 그려진 건 별 문양이다.
저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 와!”
금장생은 백사를 불렀다.
백사는 곧 금장생 곁으로 갔다.
“이 가운데 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금장생은 똑바로 선 채 전면을 응시했다.
파앗!
그의 예상대로였다.
느닷없이 기둥에서 푸른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면에 있는 기둥에서 흘러나온 광채는 옆 기둥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섯 기둥 모두 푸른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두 개의 원이 외부 원부터 차례로 푸른 광채를 뿜어내더니 안쪽 원도 푸른색 광채를 뿜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별 모양의 홈이 광채를 뿜어냈다.
금장생과 백사는 푸른색 광채에 휩싸인 상태가 되었다.
“저거 보여?”
금장생은 전면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폭 일 장, 높이 일 장의 통로가 생겨나 있었다.
금장생은 그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우린 엄청난 진식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통로를 따라 걸으며 금장생이 말했다.
그의 지식으로는 지금 현상을 진식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금장생은 특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수백 년 동안 인적을 거부한 신성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기분이 온몸을 적셨다.
“도대체 어디로 이어지기에…….”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이 들어온 곳을 보았다.
“젠장, 막다른 길이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 그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빛의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곧 들어왔던 곳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뜻했다.
“이건 완전 외통수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금장생이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 푸른색 광채를 뿜어내는 공간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눈동자는 네 개였고, 주인은 남자와 여자였다.
둘은 많이 쳐준다고 해도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였다. 사내는 검은색 장포를 걸쳤고, 여자는 홍의를 걸쳤는데 몸매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육중해 보이는 가슴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두 사람은 신강태존 태천야의 다섯 자식 중 흑랑 태무영과 백사 태월령이었다.
태무영은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의 소유자고 태월령은 태무영과 정반대의 피부색, 즉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피부만으로도 두 사람이 이복형제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봤어?”
사내가 물었다.
“그 사내 녀석이 우리 흑지의 지존신물인 혈마탑으로 선을 그리는 광경을 똑똑히 봤어요.”
태월령은 혀로 입술을 스윽 핥으며 대답했다.
“으음!”
그런 태월령의 모습을 바라보던 태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친오빠인 자신의 가슴이 뛸 정도로 태월령의 행동은 선정적이었다.
“나는 네 오빠다, 월령.”
“오빠이면서 사내죠. 그리고 우린 이복이고요.”
“나를 유혹해도 된다는 말이냐?”
“내가 유혹하는 사람은 강자지 오빠가 아니에요. 그리고 방금 그건 유혹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네가 유혹의 눈빛을 던질 자격이 안 된다는 말이구나.”
“맞아요.”
“나를 전부 안다고 생각하느냐?”
“그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속속들이 다 안다고 확신했는데 지금 바로 수정했어요. 이젠 모르겠어요.”
“다행이구나.”
“뭐가 다행이라는 거죠?”
“나를 완벽하게 아는 자는 전부 죽었거든.”
태무영은 아직 푸른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월령은 그런 태무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오빠로부터 죽인다는 말을 들은 사람의 얼굴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건 바로 조소였다.
“안 갈 거냐?”
“가야지요.”
태월령은 성큼성큼 걸어 푸른색 광채에 휩싸인 공간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뒤편에 통로가 나타났다.
“우리만 가도 되는 건가요?”
“나는 그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저 통로 밖에 있는 뭔가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가 보죠?”
“독차지할 생각은 없다. 절반이면 충분하다. 물론 혈마탑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지만.”
“그럼 통로 밖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좋지.”
파앗! 파앗!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을 찼다.
통로는 생각보다 짧았다. 반 각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어?”
두 사람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먼저 들어간 금장생과 백사였다.
“나와 백사가 몸을 숨기고 나면 들어올 줄 알았는데.”
금장생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금장생은 태무영의 말을 잘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하지 말라는 거냐?”
“이름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나요?”
“맞다.”
“말해 줘도 모르니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 이름을 알아야 한다.”
“왜 알아야 합니까?”
“그래야 그 혈마탑의 주인이 나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이게 당신 거라는 건 당신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저분 소저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금장생은 태월령을 가리켰다.
“나는 태월령이에요.”
“내놓지 않으면 죽는다, 놈!”
태무영의 전신에 살기가 갑옷처럼 씌워졌다.
“지금 나를 죽이겠다고 했습니까?”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다.”
“풋!”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내 말이 우스운 게냐?”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 속담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있다던데 네놈이 그 꼴이구나.”
태무영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옆에 있는 태월령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금장생을 없애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다.
“나는 겁을 먹어야 하는 상황인가요?”
“그렇다, 놈! 너는 잔뜩 쫄아서 오줌을 지려야 한다.”
“아닙니다, 잘못 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날 오줌 지리게 할 존재는 귀신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도 얼마 전에 친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엔 이 악귀를 오줌 지리게 할 존재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건 내기해도 좋습니다. 내 목숨을 걸라고 해도 걸겠습니다.”
금장생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얹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미소는 점점 커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얼굴 전체를 덮었다.
그러자 금장생의 얼굴은 사라지고 주름으로 뒤덮인 이상한 얼굴만 남았다.
“아, 악마소惡魔笑!”
금장생을 지켜보던 태월령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