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7화 (47/524)

황금가 (47)

금장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신발을 거꾸로 신고 십 리를 더 동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갈 때 짚었던 발자국을 다시 딛는 수고까지 했다.

쫓는 자들이 발자국 끝자락에 당도했을 때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의심할 수가 없다. 왜냐면 바람에 지워졌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쫓는 자들이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고 이곳으로 방향을 틀어 버린 것이다.

“나는 허점이 없었다.”

처음이라면 허점을 남겼을 수도 있지만 금장생이 추격자들을 따돌린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보다 더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미세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숨었다.

“그런데도 쫓는 자들이 이쪽으로 온다는 건 우리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지. 어쩌면…….”

금장생의 시선이 오른편 벽 위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글 한 줄이 씌어 있었다.

나는 드디어 전설의 선선국鄯善國을 점령했다.

다른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이곳이 선선국이란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중원인들이 선선국이라 부르는 이곳은 바로 잃어버린 왕국이라 부르는 전설의 누란이었다.

“여기가 누란이란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리고…….”

금장생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천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었다.

얼굴을 가린 건 복면이 아니라 검은 천을 둘둘 만 것이었다.

저런 식으로 얼굴을 가리는 건 사막 부족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사막, 즉 신강에 있는 단체에 소속된 자들이라고 봐야 한다.

“저자들은 왜 오는 걸까?”

금장생은 창 옆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추격자들에 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까지. 어떤 상황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안다고 해도 딱히 대처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는 등짐 속에 넣어 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객잔에서 백사가 없앤 자들 중 한 명에게서 나온 상자였다. 짐 속에 넣어 두고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돈이라도 들어 있으면 좋겠네.”

그는 상자 뚜껑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뚜껑을 열 수 있는 장치는 돌출돼 있지 않았다.

잠시 상자를 살피던 그는 한 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철컥!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똑똑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여기를 하도 많이 눌러서 표시가 나 있어. 그래서 바로 알아차린 거야.”

금장생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의 대화 상대는 백사였다.

금장생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에계!”

그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상자 안에는 돈이나 금이 들어 있는 게 아니고, 그의 눈에는 지극히 쓸모없는 낡은 탑 하나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탑은 붉은색이었다.

“이게 금인가?”

금장생은 탑을 꺼냈다.

탑의 길이는 한 자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무거웠다.

“금은 이것보다 더 가벼운데.”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혈탑을 자세하게 살폈다.

혈탑은 총 사 층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정교함은 최고네.”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보통 탑에 비해 수백 배 작지만 정교함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일 층부터 시작해서 사 층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한 면만 보는 게 아니었다. 오른편으로 돌려 가며 각 면을 자세하게 살폈다.

한 번을 보고 나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어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사방을 훑고 다녔다. 뭔가를 찾는 자들처럼 보였다.

“저자들은 숨어서 상황을 살피고 있고.”

이어 그의 시선이 사막 부족에게로 향했다.

사막 부족도 먼저 온 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달그림자 속에 숨어 먼저 온 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자들이 움직이면 그때 우리도 움직일 거야.”

자리에 앉은 금장생은 다시 혈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꼼꼼하게 살폈다.

“내가 왜 시간 차를 두고 보는지 알아? 뭔가를 찾고자 할 때 연속해서 보게 되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어. 왜냐면 잔상이 남아 있어 다른 점이 있더라도 같게 보이거든. 그럴 땐 잠시 한편으로 치워 두었다가 다시 보는 거야. 그럼 처음 봤을 때와 다른 모양으로 다가오게 돼.”

금장생은 혈탑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맨 아래층에서 발견한 게 뭔지 알아?”

금장생은 혈탑을 상자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숫자야.”

혈탑 일 층을 빼곡하게 채운 건 고대에 쓰인 숫자였다.

상자 뚜껑을 닫고 짐 속으로 집어넣었다.

“일어나!”

그리고 백사를 보며 말했다.

백사가 벌떡 일어났다.

금장생은 창밖을 흘끔 바라보았다.

사막 부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짐을 정리한 것도 그들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가자!”

그와 백사는 아래로 내려갔다.

일 층으로 내려간 그는 한편 구석에 나 있는 작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구덩이의 깊이는 일 장가량이었다.

그런데 구덩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벽에 붙어서 아래로 계단이 나 있었다.

탑을 오르기 전에 확인해 둔 계단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휙!

금장생과 백사가 계단 아래로 사라진 순간 두 명이 뛰어들어 왔다.

두 사람은 재빨리 안쪽을 살폈다.

“여기 발자국이 있습니다!”

오른편에 있던 자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휙! 휙휙! 휙!

그러자 십여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청랑전객 막시후 일행이었다.

“발자국이 어디로 이어져 있느냐?”

막시후가 부하를 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나갔습니다.”

부하는 밖을 가리켰다.

“어쨌거나 놈이 이곳에 있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어쩌면 기연도 얻고 임무도 수행할 수 있겠구나.”

막시후는 싱긋 웃었다.

이번 출행은 여러 면에서 운이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수색하라!”

막시후는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위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왕국 전체를 살펴볼 참이었다.

“응?”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막시후의 눈이 커졌다. 바닥엔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영악한 놈이군.”

대번에 쫓는 자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사막으로 향해 있는 발자국도 속임수였다.

“하지만 날 만났으니까.”

막시후는 차갑게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좌에서 우로 천천히 살폈다.

“건물 배치나 위치로 봤을 때 왕궁의 위치는…… 저기네.”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왕실은 보통 도시의 중앙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막에서는 다르다.

사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이고, 호수 옆에 왕궁을 지을 수밖에 없다.

막시후가 주시하고 있는 장소는 도시 안쪽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잔해가 전혀 없는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노프로느 호수의 한편 끝이 저기까지 들어왔다는 뜻이고, 왕궁은 저 옆에 있어야 하지.”

그는 지금 있는 곳에서 왕궁 터로 보이는 곳까지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길게 잡아야 백 장이었다.

“황사!”

막시후는 허공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네.”

대답과 함께 황토색 옷을 걸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사 넌 나와 함께 저기로 간다. 대원들에게도 그렇게 알려라.”

휙!

막시후는 창 너머로 몸을 날렸다.

“알겠습니다.”

황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맨 아래층으로 가서 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고는 막시후를 쫓아 몸을 날려 갔다.

막시후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 떠난 곳으로 사막 부족이 들어온 건 잠시 후였다. 그들 역시 막시후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사방을 훑고 다녔다.

“처음엔 두 명이 들어와서 한참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뜬 사이 추격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안을 살피던 자가 보고했다.

보고를 받는 자는 키가 컸다.

오른편 어깨에는 만곡 형태의 도 손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신월도新月刀라 불리는 사막 부족의 무기였다.

갖가지 보석이 박힌 도 손잡이는 달빛을 받아 화려한 광채를 뿜어냈다.

“처음에 들어온 자들은 밖으로 나갔느냐?”

“들어온 흔적은 있지만 나간 흔적은 없습니다.”

“하면 아직 이 안에 있거나 아니면 이 안에 있는 통로를 이용해서 다른 곳으로 갔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찾아라!”

“존!”

사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이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아낸 건 반 각 후였다.

그들은 곧 지하로 내려갔다.

“저기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사내는 벽면을 가리켰다.

“불은?”

“횃불을 준비했습니다.”

“앞장서라.”

“알겠습니다.”

삼매진화로 횃불을 밝히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의 깊이는 이 장 정도였다. 계단 아래쪽은 통로였는데, 폭과 높이가 각각 반 장 정도였다.

“여기를 통해 갔습니다.”

바닥의 발자국을 확인한 자가 말했다.

“발자국을 쫓아간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그들의 길을 인도하는 건 바닥에 찍힌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은 여기까지 찍혀 있습니다.”

바닥을 살피던 자가 보고했다.

지휘자는 시선을 들었다. 커다란 석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간 게냐?”

“문이 열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열어라!”

“존!”

사내는 석문에 손바닥을 대고 왼편으로 밀었다.

그르릉!

석문은 쉽게 열렸다.

석문 안쪽은 널따란 광장이었는데,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주위를 철저하게 살피면서 전진한다.”

“알겠습니다.”

흑지 대원들은 나직하게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내 생각엔 여긴 이런 폐허가 있을 수 없는 곳인데…….”

아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사막에 대한 공부를 누구보다 많이 했다고 자부했다. 그것들 중에서도 그가 특히 열심히 한 것은 타클라마칸사막의 역사였다.

하지만 이곳에 고대 유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었다. 만일 있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

“그건 바로 전설의 왕국 누란이지.”

아탈은 지휘관의 눈치를 보았다.

“살짝 빠져도 되겠네.”

그는 어두운 부분으로 스며들어 갔다.

턱!

자리를 잡고 자세를 낮추는 순간 숨이 막혀 왔다.

“이름?”

이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탈!”

“신분은?”

“흑지 소속…….”

“이곳으로 온 목적은?”

“상부의 지시.”

그 말을 끝으로 아탈의 의식은 끊어졌다.

“저기 아탈이 쓰러졌습니다!”

“누군가 있습니다!”

아탈을 발견한 동료들이 소리쳤다.

“저 안쪽으로 횃불을 던져라!”

휙! 휙휙!

명령이 떨어지자 세 개의 횃불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아탈이 쓰러진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깁니다.”

대원 중 한 명인 아탈이 쓰러진 뒤편 벽을 가리켰다.

그가 본 건 벽으로 스며들듯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 하나였다.

“쫓아라!”

지휘관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흑지 무인 십여 명이 검은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휘관 또한 그곳으로 갔다.

“응?”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통로 오른쪽에 작은 글이 씌어 있었다.

쫓는 이유는?

“대담한 놈이군!”

지휘관은 차가운 눈빛으로 글을 바라보았다.

놈은 흑지 무인도 자신을 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서 쫓는 이유를 물은 것이다.

“굳이 지금 알 필요 없다. 죽기 직전에 알려 주겠다.”

지휘관은 금장생이 남긴 글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러자 흙이 떨어지며 글이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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