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44화 (44/524)

황금가 (44)

태극선의

금장생은 벽을 바라보았다.

이곳 욕실 벽은 나무를 바둑판 모양으로 잘라 마감했다. 즉, 표면은 나무지만 안은 돌이나 혹은 흙일 가능성이 높다.

“이 나무판을 떼어 내면 뭔가 나오겠네.”

금장생은 장포를 놓아둔 곳으로 가서 묵야를 가져왔다.

묵야를 뽑아 들자 귀신이 저만치 물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금장생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거…….

귀신은 묵야를 가리켰다.

‘이게 귀신을 물리치는 법기이긴 하지만 그렇게 멀리 도망칠 정도는 아닌데요?’

―네가 잘못 알고 있다. 나는 귀신으로 살면서 많은 법기를 보았다. 하지만 네가 가진 그것보다 강한 법기는 본 적이 없다.

‘그건 영감님이 약해서 그런 겁니다.’

금장생은 피식 웃으며 묵야 끝을 바둑판 문양 사이 홈으로 찔러 넣었다. 그리고 아래로 쭉 내리그었다.

오른편에 이어 왼편과 위쪽, 아래쪽의 작업을 마치고 다시 홈으로 찔러 넣고, 옆으로 젖혔다.

툭!

그러자 나무판이 떨어져 나왔다.

예상대로 안쪽은 텅 빈 공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귀신이 돼 여기 남은 겁니까?”

금장생은 안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에는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운송하던 강시를 목욕시켰다. 그런데 그 녀석들 중 한 녀석의 부적이 떨어졌는데 나는 몰랐다.

‘그럼 강시에게?’

금장생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검은색으로 채색돼 있었다.

―완전 개죽음이지.

‘그래서 떠나지 못한 거였군요.’

―강시에게 맞아 죽어서 떠나지 못한 건 아니다. 내가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건, 내 일을 완수하지 못해서다.

‘책임감이 아주 강한 분이시군요.’

금장생은 상자를 열었다.

‘……?’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상자 안에는 검은색 옷 한 벌이 들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강신술사 옷이었다.

그는 장포를 꺼내 들었다.

―오!

귀신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앞에 문양이 있는데 보이느냐?

금장생은 펼친 장포의 앞을 보았다.

앞에는 절반의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옷과 같은 검은색이라 구분이 힘들었지만 반쪽의 태극 문양이 분명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뒤에도 있느냐?

금장생은 장포 뒷면을 보았다. 그곳에도 역시 태극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있습니다.’

―헐!

귀신은 입을 쩍 벌렸다.

‘왜 그러십니까?’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우리 강신술사들이 꿈에서도 얻고 싶어 하는 태극선의太極仙衣다.

‘태극선의요?’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태극선의가 있으면 암왕칠구에 걸린 봉인을 풀 수 있다고 하였던 귀신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이게 태극선의란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태극선의라는 건 아니다.

‘그, 그렇겠지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론 태극선의는 천잠사로 짜서 도검이 불침하는 보물이다.

‘추위는…….’

―물론 추위와 더위도 어느 정도 막아 주는 걸로 안다.

‘그거 참 갈등 때리게 만드네.’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 그는 태극선의를 걸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입는 순간 뭔가 사건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

아니, 지금까지의 삶이 달라질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도검이 불침한다고 했을 때도 시큰둥했다. 무림인이라면 흥분했겠지만 그와는 거리가 먼 기능이었다.

하지만 더위와 추위를 막아 준다면 다르다.

여름이면 얇은 옷을 살 필요가 없고, 겨울이면 두툼한 솜옷을 살 필요가 없다. 봄가을은 그냥 입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건 속옷뿐이다. 일 년 내내 속옷 몇 벌이면 옷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

옷을 사 본 사람은 안다.

일 년에 들어가는 옷값이 장난 아니라는 걸.

그 옷값을 고스란히 저금할 수 있다.

“아! 아버지!”

문득 평생을 옷 한 벌로 버틴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평생을 때운 옷은 수백 년을 버틴 태극선의 같은 건 아닐지라도 보물인 게 분명했다.

―아버지라니, 무슨 말이냐?

귀신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도검이 불침한다고 했을 땐 시큰둥하더니 한서 불침이라니까 무지하게 좋아하는구나.

‘한서 불침이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입을 방법이 떠올라서입니다.’

―어떻게 입는다는 게냐?

‘일단 목욕부터 하고요.’

금장생은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전 백사를 씻길 때 쓰고 남은 조두를 잔뜩 풀어 머리를 감고 몸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헹구고 밖으로 나왔다.

수건으로 닦고 옷을 입었다. 먼저 속옷과 바지 상의를 입고 태극선의를 걸쳤다.

그런 다음 태극선의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그의 손길이 잠시 멈춘 부분은 암왕칠구가 자리할 곳이었다.

‘제길!’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암왕칠구가 들어갈 곳이 만들어져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태극선의였다.

―맞춘 것처럼 맞구나.

빈말이 아니었다. 입지 않았을 땐 좀 커 보였는데 입고 나자 몸에 맞춘 것처럼 맞았다.

‘이 옷 위에 저걸 걸치면 된다는 겁니다.’

금장생은 벗어 두었던 장포를 걸쳤다.

―……!

귀신은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지금은 초여름이다. 굳이 옷을 두 벌이나 입을 이유가 없다.

설사 겨울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태극선의가 한서 불침이라 껴입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굳이 두 벌을 입은 것이다.

귀신은 금장생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 때문입니다.’

금장생은 등에서 혈라를 꺼내 보여 주었다.

―아!

귀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금장생은 귀신을 보았다.

―나타난 이유가 알고 싶다는 거냐?

‘심심해서 말을 건 건 아닌 것 같아서요.’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내 육신은 지금 강시들과 함께 묻혀 있다.

‘따로 묻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내가 부탁하는 건 강시들을 해강시켜 달라는 거다.

‘어디에 묻혀 있습니까?’

―강시 객잔 뒤뜰이다.

‘알겠습니다. 강시를 해강시켜 드리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런데…….’

금장생은 귀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죽을 때 가진 돈 없었습니까?’

―돈?

‘네.’

―돈은 왜?

‘내가 꼭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고, 돈이라는 건 감사 표시를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배워서요.’

―공짜로는 못 해 주겠다는 말이구나.

‘꼭 그런 게 아니라, 공짜로 해 주면 상대방이 제게 너무 미안해할 거 아닙니까? 그런 마음의 짐을 지우지 말자는 게 제 주의라서. 그리고 공짜로 해 주는 건 상대방을 모욕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돈을 내지 않으면 못 해 주겠다는 말 아니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다 살다 귀신에게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

귀신은 어이없는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대가 없는 노동은 없다는 것도 제 신조거든요.’

―귀신에게 돈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죽기 전에 가진 돈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게 어디 있는지만 가르쳐 주면 됩니다.’

―참, 나.

귀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많습니까?’

―삼백스물 한 냥이다.

‘강시가 열두 구나 됐다면서 삼백스물한 냥뿐이라는 겁니까?’

―경비 이상의 돈을 들고 다니면 산적들의 표적밖에 더 되겠느냐? 사실 그 돈도 빌린 돈을 갚으려고 가져온 거지 경비와는 거리가 멀다.

‘그랬군요. 그 돈은 누가 가져갔습니까?’

―강시 여관 주인이다.

‘그 돈은 저 주시는 거 맞죠?’

―가져가라.

‘그럼 바로 해강하러 가겠습니다.’

금장생은 욕실에서 나갔다. 욕실 밖에는 백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참, 넌 말을 못하지.”

금장생은 혈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치며 말했다.

“따라와!”

퉁! 퉁!

강시는 통통 튀면서 금장생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금장생은 강시 여관 주인과 마주했다.

“괭이와 삽을 빌려 달란 말이오?”

주인은 금장생과 백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네.”

“혹시 이 강시를 묻기 위해…….”

“있습니까?”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 좀 빌려주십시오.”

“알았습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고로 가 삽과 괭이를 꺼내 왔다.

“강시들이 썩지 않았아야 할 텐데…….”

삽과 괭이를 받아 든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응?”

강시 객잔 주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멀어지는 금장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금장생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강시 객잔 뒤뜰이었다.

“저긴?”

강시 객잔 주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금장생이 괭이로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금장생이 파고 있는 장소는 그도 잘 아는 곳이었다.

그곳엔 강시 열두 구와 시체 한 구가 묻혀 있다.

‘빌어먹을!’

강시 객잔 주인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객잔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객잔 근처의 허름한 술집이었다. 술집 한편에서는 거친 기운을 풍기는 자들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시체 장사가 여긴 웬일이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우리 신강오웅은 싸구려 일은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강시 객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네들 입으로는 신강오웅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론 신강오흉이라 부른다.

무공이 제법 강하긴 하지만 간이 작아 무림으로 진출은 못 하고 이곳 신강에 죽치고 살면서 빌려주고 못 받는 돈을 받아 주는 걸로 먹고산다.

한마디로, 약간 강한 무공을 지닌 삼류 건달들이다.

“그래서 이걸 준비해 왔습니다.”

강시 객잔 주인은 주머니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자 다섯 명 중 한 명이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백 냥입니다.”

강시 객잔 주인이 말했다.

“백 냥이라…….”

사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시 객잔 주인을 보며 말했다.

“좀 적은 감이 없진 않지만 안면도 있고 하니까 해 주겠소. 무슨 일이오?”

“강시 객잔에 든 손님이 있습니다. 그자를…….”

“이렇게 해 달라는 거요?”

사내는 손바닥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네.”

강시 객잔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자는 왜 없애려고 하는 거요?”

“그건…… 원한 때문입니다.”

강시 객잔 주인은 둘러댔다.

“아! 복수를 하는 거구려.”

“그렇습니다.”

“무인이오?”

“강시를 데리고 있습니다.”

“강신술사란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언제 해 주었으면 좋겠소?”

“지금 처리해 주었으면 합니다.”

“알았소.”

사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머지 네 명도 따라 일어났다.

술집을 나선 다섯 명은 곧바로 강시 객잔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다섯 명은 강시 객잔에 도착했다.

그 시각 금장생은 강시 객잔 뒤뜰에 묻혀 있던 강시와 시체 한 구를 파내 나란히 눕혀 놓고 해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에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응?”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섯 사내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건 분명 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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