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2)
“자리를 옮겨야겠어.”
금장생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넌 가만있어.”
백사가 일어나려고 하자 어깨를 누르면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네가 뛰면 저들이 금세 알아차리고 말 거야. 그러니까…….”
금장생은 백사의 허리로 양팔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백사와 금장생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 언제 닦고 안 닦은 거냐?”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너 아무래도 객잔에 가면 이부터 닦아야겠다. 끙!”
그렇게 말하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칠 척이 넘는 장신이 번쩍 들렸다.
“나도 한 힘 해. 그런데 다 좋은데, 넌 너무 차가워. 미인이니까 차가운 게 매력일 수도 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고.”
그는 투덜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옮겨 간 곳은 원래 있던 곳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공터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공터는 접시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백사를 내려놓고 모피를 입고 누웠다.
“백사, 누워.”
그리고 백사를 보며 명령했다.
그러자 백사가 금장생 옆으로 드러누웠다.
“코 골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반짝이는 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바로 툭 떨어질 것 같았다.
문득 별똥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빨리 소원 빌어.”
금장생은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손을 가슴에 모으고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돈을 쓰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어. 보통은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하는데 왜 쓰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냐고?”
금장생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돈은 많이 벌어서 모으는 게 아니라 버는 돈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거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버는 족족 써 버리면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는 법이야. 내 말 이해해?”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장생의 중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참! 너 사람 맞아?”
문득 생각나 물었다.
백사의 인체 구조는 사람과 꼭 같다.
물론 키, 가슴, 엉덩이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크다. 그리고 머리에 뿔이 나 있다. 겨드랑이는 물론이고 성기에도 털이 나 있지 않다.
그런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면 ‘그럼 도대체 뭐냐?’는 질문이 남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가 없다.
궤변 같지만 ‘인간이 아니면 뭐냐’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백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금장생이 내린 결론은 그랬다.
“아악!”
“으아악!”
“크아악!”
그때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시작됐군.”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너는 이상하지 않아?”
금장생은 백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레?”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백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본 것이다.
금장생과 백사는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되었다.
금장생은 오른손을 들어 백사의 눈앞으로 가져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이게 몇 개지?”
하지만 백사는 대답이 없었다.
“네가 알 리가 없지.”
금장생은 픽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까 하다 만 말인데, 사실 곤륜파가 우리를 공격하는 건 우발적인 사건이야. 다시 말해서 카밀 일행은 이번 일을 하는 데 곤륜파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런데 백사 너와 나의 대타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지. 그건 곧 곤륜파 말고 제삼의 세력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말해. 아니, 우리가 아니고 너겠지. 그들이 너를 탐내는 이유가 뭘까? 왜 너를 얻으려고 할까? 이건 오직 내 짐작인데, 어쩌면 네가 아주 중요한 장소로 들어가는 열쇠가 아닐까 싶어. 이를테면 카밀이 가지고 있는 천도경처럼 말이야.”
스윽!
바로 그때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
금장생은 백사의 입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한 번의 소리가 들려오고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금장생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띄었다.
검은 그림자는 조금 전 그와 백사가 있던 곳을 살피는 중이었다.
“여기에 머물렀습니다.”
“전부 몇 명이냐?”
‘강자네.’
금장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가 파악한 자는 한 명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 더 있었다.
“여섯 명입니다.”
“좋다, 가자.”
“네.”
휙! 휙!
나직한 소성과 함께 두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금장생은 숨을 내쉬었다.
“카밀이 속이려고 하는 자들인 것 같아. 자리를 옮기길 잘했지?”
금장생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수상한 자들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금장생은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가 그 속에서 나온 건 이틀 후 밤이었다.
낮부터 구름이 몰려들더니 비를 뿌렸다.
“일단 내려가야겠지.”
금장생이 내려가는 길로 계곡을 택했다.
이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물은 불지 않은 상태라 내려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절벽 같은 게 나타났을 때였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관절을 마음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백사는 내려갈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야 했다.
카밀 일행이 유인을 제대로 한 듯, 곤륜파나 수상한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금장생과 백사는 닷새 만에 산을 내려왔다. 금장생은 청명진인이 준 지도로 시선을 주었다.
“첫 번째 객잔이…… 여기네.”
그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강시 객잔이 있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 백사, 가자.”
그는 가볍게 종을 치면서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이라고 했지만 이곳은 타클라마칸사막 남쪽. 엿새나 걸리는 먼 길이었다.
객잔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앞에 있는 밝은 색 건물은 일반인이 머무는 객잔이고, 그곳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검은색 건물은 강시와 강시 주인이 함께 머무는 강시 객잔이었다.
객잔 종업원은 금장생의 옷을 보자마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강시 객잔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일반 객잔의 주인과 생김새가 비슷한 자가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일반 객잔 주인과 쌍둥이인 모양이었다.
“저렇게 키가 큰 강시는 처음 보네요.”
주인은 백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덩치 하지요.”
“여자 강시네요?”
“그렇습니다. 얼맙니까?”
“하룻밤에 닷 냥입니다.”
“닷 냥요?”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닷 냥이면 다섯 식구 한 달 생활비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닷 냥에는 손님의 식사비는 물론이고 강시의 목욕비도 포함돼 있습니다.”
“강시를 목욕시켜요?”
금장생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혹시 강시 운구가 처음이십니까?”
“네.”
“어쩐지 좀 어설프다 했는데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지금부터 제가 강시 객잔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주인은 금장생을 데리고 갔다.
잠시 후 안쪽에 나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허리 높이까지 오는 단 백여 개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는 강시의 침실입니다. 각 침실당 한 냥을 받습니다.”
“강시를 재우는 비용은 별도란 말인가요?”
“네.”
“완전…….”
‘도둑놈이네.’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장사하는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손님처럼 강시의 수가 적은 분들은 방에서 재우기도 합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욕을 시켜 주셔야 합니다.”
“강시 목욕은 왜 시키는 거죠?”
“보통 강시는 손님의 강시처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부패한 강시도 아주 많거든요. 만일 그런 강시들을 씻기지도 않고 객실에서 재우게 되면 다음 손님을 받을 수 없지요.”
“그렇군요. 강시 욕실은 어딥니까?”
“저쪽입니다.”
주인은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은색의 커다란 욕조가 있었는데, 물은 채워진 상태였다. 물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물이 깨끗하네요?”
“욕조에 채워진 물은 실은 강물의 일붑니다. 강 위에 건물을 세우고 욕실을 만든 거라 물이 계속 흘러가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깨끗할 수밖에 없지요.”
“사람은 어디서 씻죠?”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님들이 사용하는 욕조가 따로 있습니다.”
주인은 왼편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그렇군요. 참, 이 녀석 옷이 필요한데, 있습니까?”
“옷이 있기는 한데 워낙 커서 맞는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맞출 수는 없습니까?”
“가능합니다.”
“얼맙니까?”
“한 냥만 주시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총 여섯 냥을 드리면 되겠군요.”
금장생은 여섯 냥을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손님방은 이층 사 호실입니다.”
“여기에 다른 사람도 있나요?”
“오늘은 손님 혼잡니다.”
“알았습니다.”
“먼저 강시의 치수를 재겠습니다.”
주인은 계산대로 가서 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백사의 치수를 쟀다.
“식사는 일반 객잔으로 가서 아무거나 주문하시면 됩니다. 그럼.”
주인은 인사를 하고 계산대로 돌아갔다.
금장생은 백사를 데리고 그의 객실로 들어갔다.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하네.”
금장생은 조심스럽게 걸었다.
오래된 건물은 발을 옮길 때마다 아우성쳤다. 객실에는 침대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도둑놈들!”
절로 욕설이 나왔다. 침대 하나 내주면서 다섯 냥이나 받아먹은 주인의 행태가 괘씸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따뜻한 음식과 침대가 너무 그리웠기 때문이다.
“내가 을乙인데 어쩔 수 없지. 넌 누워.”
금장생은 백사를 보며 말했다.
백사는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밥 먹고 올 테니까 자고 있어.”
짐을 내려놓은 금장생은 밖으로 나와 방문을 잠그고 일반 객잔으로 향했다.
번쩍!
금장생이 나가자마자 백사가 눈을 떴다.
백사의 눈동자가 좌우로 또르르 굴렀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백사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팔을 들었다.
팔이 수평으로 들어 올려지자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구부러지지 않는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백사는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팔은 굽혀지지 않았다.
“치!”
백사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왼팔을 들어 올리더니 팔꿈치 안쪽을 툭 쳤다.
우둑!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팔이 구부러졌다.
백사는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팔이 원래대로 펴졌다.
그 상태에서 다시 힘을 주었다. 오른팔은 천천히 안으로 굽어졌다.
백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 상태에서 이번엔 왼손으로 오른 손가락을 잡고 힘껏 구부렸다.
툭! 툭툭툭! 툭!
손가락 마디가 구부러지면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마디를 끝내고 두 번째 마디를 구부렸다. 그렇게 손가락을 전부 구부린 후 이번에는 손목을 구부렸다.
손목을 구부릴 때도 역시 왼손의 도움을 받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손목도 구부릴 수 있게 됐다.
오른팔이 자유를 되찾자 이번에는 왼팔을 짝 펴고 관절 부분을 내려쳤다.
우둑!
조금 전에 흘러나왔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왼팔 각 부분에서 흘러나왔다.
자유를 찾은 오른손 덕분에 왼손은 더욱 쉬웠다.
잠시 후 백사는 양팔의 자유를 모두 되찾았다.
양팔이 끝났으니 이번엔 두 다리 차례였다.
두 다리의 자유를 되찾는 건 일어선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무릎을 구부리고, 발목과 발가락 순으로 이어졌다.
다리가 끝나자 허리와 목의 관절을 풀었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끝내고 전체적으로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허리를 좌우로 틀고, 팔을 들어 올려 굽히고 다리를 차올렸다.
그 동작은 한 식경 동안 이어졌다.
처음엔 어색했다. 그러다 점점 동작에 익숙해지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보통 사람처럼 유연성을 보였다.
열심히 맨손운동에 매달리던 백사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부적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녀는 부적을 손으로 잡았다.
전엔 불가능했지만 관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은 가능했다.
부적을 잡고 힘껏 잡아챘다.
“……크아아아아!”
턱!
괴성을 듣자마자 부적을 다시 붙였다.
털썩!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던 백사는 벌러덩 드러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