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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41화 (41/524)

황금가 (41)

누구냐, 넌?

사남 이녀가 정좌를 한 채 둥글게 앉아 있다.

나이는 이십 대 초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비교적 젊었다. 여자들은 얼굴의 눈 아래쪽만 가리는 면사를 쓰고 있었다.

여섯 명 뒤편으로는 각각 스무 명 정도가 역시 같은 자세로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으로 보건대 앞에 있는 자들과는 주종 관계인 모양이었다.

“헤어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 년이 흘렀구려.”

정북쪽에 앉은 삼십 대 초반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내는 눈빛이 깊고 입술은 얇았다. 이렇게 생긴 사내는 무공보다는 머리를 쓰는 데 집중하는 모사형이 많은데 이자는 달랐다.

이자의 이름은 삼천마뇌三天魔腦 제갈영우였다. 그는 빼어난 머리와 뛰어난 무공으로 이미 강호상에 이름이 나 있는 무인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제갈 형은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구려.”

제갈영우 건너편에 앉은 자가 말을 받았다.

그는 청랑전객靑狼戰客이란 별호를 가진 막시후였다.

막시후는 이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였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바윗덩어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따로 차고 있는 무기는 없다.

“무기를 버린 모양이죠?”

제갈영우 왼편에 앉은 여자가 막시후를 보며 물었다.

얼굴을 제외한 모든 것이 큰 여자였다. 키는 어지간한 남자만 하고, 숨을 내쉴 때마다 풍만한 가슴은 민망할 정도로 요동쳤다.

대력철후大力鐵后 찰미하.

강호인들이 그녀에게 준 별호였다.

“무기를 버린 게 아니라 수백 개를 얻었소.”

막시후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완성한 모양이죠?”

“뭘 완성했다는 거죠?”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찰미하 건너편에 앉은 여자였다.

그녀는 찰미하와 정반대였다. 키도 작고 체격도 작아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다.

동영 출신인 그녀는 천하십대자객 중 서열 이 위에 올라 있는 사화死花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없다.

이곳에 있는 이들 또한 그녀의 또 다른 정체는 모르고 화화花花라고만 알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소라였다.

“막 소협이 투왕백팔무鬪王百八舞를 익힌 걸 몰랐어요?”

찰미하는 되물었다.

“투왕백팔무면 박투술의 최고봉이라 부르는 무공 아닌가요?”

“맞아요.”

찰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 전 적수공권으로 천하를 제패한 투왕의 무공을 완성하다니 대단하군요. 축하드려요.”

소라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투왕鬪王 적철인.

그는 육체보다 더 강한 무기는 없다고 공언하였던 무인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비무행에 나섰다. 그리고 비무행에 나선 지 십 년 만에 천하제일인 자리에 올랐다.

그는 십 년 비무행 끝에 완성한 자신의 박투술을 투왕백팔무라 칭했다.

“투왕백팔무가 아무리 대단한들 동영 최강 무공인 태양이도류太陽二刀流만 하겠습니까?”

막시후의 시선이 소라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장도와 단도 두 자루가 나란히 자리했다. 동영제일도라 불리는 도로, 장도는 태양도太陽刀, 단도는 월음도月陰刀란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래 봐야 동영 무공일 뿐이지요.”

“자신을 비하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소라 소저의 태양이도류는 중원의 어떤 무공과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소라 옆에서 들려왔다.

소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말을 한 자는 상투를 튼 조선인으로, 이름은 최곤이고 별호는 군자검君子劍이었다.

별호는 군자검이지만 애병인 귀면검鬼面劍은 군자와는 거리가 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의 무기 중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는 잔인한 무기다.

온화함속 속에 잔인함을 숨기고 있는 자.

그가 바로 최곤이었다.

“높게 평가해 주어서 고마워요.”

소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요새 마가魔家는 어떻소?”

제갈영우의 시선이 왼편 덩치 사내에게로 향했다.

각진 얼굴에 전형적인 투사형으로 생긴 이자는 투웅鬪雄 혁련마우였다.

혁련마우는 고개를 돌려 제갈영우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알고 싶은 게 뭐요?”

“현재 팔왕이 부재중이라고 하던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요?”

“팔왕께서는 잠시 휴가를 떠났을 뿐 아무 일 없소. 만일 우리 마가에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여기 있을 수 없겠지요.”

“흠! 그렇군요. 아무튼 이제 인사는 끝난 것 같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제갈영우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처리해야 할 자는 세 명뿐인데 굳이 이렇게 모여서 상의할 필요가 있나요?”

찰미하가 물었다.

“그들과 우리뿐이라면 그렇겠지만 지금 이곳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오.”

“그럼 누가 더 있다는 거죠?”

“이 산의 주인인 곤륜파가 나섰소이다.”

“곤륜파가 왜?”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르오. 내가 아는 건 곤륜파가 그들을 잡기 위해 천라지망을 펼쳤다는 거고, 우리와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거요.”

“만일 곤륜파 문도들과 부딪치게 되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

“이번 일은 지난 일천이백 년 동안 유지돼 왔던 팔왕가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고, 일을 벌인 당사자 해왕과, 사정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한 마왕을 제외한 여섯 분의 왕은 천역에서 꺼낸 시체를 우리가 연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소이다. 그건 곧 강시의 회수는 그 어떤 일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걸 뜻하오.”

“충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군요.”

“먼저 대화를 하고, 그때도 듣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알았어요.”

찰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시를 얻고 난 후 모일 장소는 어디요?”

이번에 투웅 혁련마우가 물었다.

“곤륜산 아래쪽에 보면 운상이란 객잔이 있소. 그 객잔에서 보도록 합시다.”

“알았소이다.”

혁련마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일어납시다.”

제갈영우의 말에 일행은 일제히 일어났다.

“닷새 후 객잔에서 봅시다. 가자.”

가장 먼저 제갈영우가 자리를 떴다.

두 번째로 자리를 뜬 자는 투웅 혁련마우와 청랑전객 막시후였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남은 사람은 군자검 최곤과 대력철후 찰미하, 화화花花 소라였다.

“참! 그 사람 소식 알아요?”

찰미하가 소라를 보며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죠?”

소라는 되물었다.

“동영 비고에서 보았던 그 사내 말이에요. 이름이…….”

“아! 마모루守.”

“맞아요. 마모루였어요.”

찰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자는 왜…….”

소라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소저를 보니까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올라서요.”

“몰라요.”

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먼저 갈게요. 그럼.”

찰미하는 인사를 하고 부하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나도 가겠소. 만나서 반가웠소.”

마지막으로 최곤이 부하들과 자리를 떴다.

“마모루라…….”

“이거 받으세요.”

“뭐죠?”

“뇌물입니다.”

“나는 뇌물을 받을 정도의 직위를 가진 사람이 아닌데요?”

“동료들에게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해 달라는 건가요?”

“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그분께 마모루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분이라면…….”

“죄송합니다.”

“말할 수 없다는 건가요?”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셔서요. 제가 드린 뇌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동영 최강 인자술인데 받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동영 사람인가요?”

“아닌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 사내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예리하시군요.”

“조선인인가요?”

“아닙니다. 중원인입니다.”

“아! 그렇군요.”

마모루와 이야기를 나눈 건 그게 전부였다.

하루 종일 책장 사이를 오가는 마모루를 보고 다른 이들은 일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고, 책이 꽂힌 자리를 묻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모루는 찾는 책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찾아 주었다.

마모루가 없어진 건 석 달 후였다.

나중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가 비고에 머문 기간은 육 개월이었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이름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찰미하로 인해 마모루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받은 은혜는…… 언젠가는 갚게 되겠지. 가자.”

“하이!”

뒤편에 서 있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곧 동영 무인들은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 * *

스아악! 휘이익!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어쩌면 우중충한 밤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금장생은 생각했다.

휙!

가만히 어둠을 응시하고 있는데, 정찰하러 나갔던 수어린이 돌아왔다.

“어떻소?”

수어린이 자리에 앉자 카밀이 물었다.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어요.”

“천라지망의 세기는 어느 정도요?”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북궁창이었다.

“살기가 중첩돼 있어요.”

“최고 단계란 말이군요.”

“네.”

“천라지망에도 단계가 있소?”

카밀이 물었다.

“천라지망에 대해 아시오?”

“많은 수를 요소요소에 배치해서 도망치는 자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걸 천라지망이라고 한다고 들었소.”

“그건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아주 초보적인 천라지망입니다. 주로 양민들을 동원해 펼치는 거고요.”

“무인들이 펼치는 천라지망은 다르오?”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위력을 지녔기에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구려.”

“내가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일 무인이 살기에 노출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반응을 하겠지요.”

“맞습니다. 무인은 살기를 감지하면 즉각 반응하게 됩니다. 그 살기가 한두 번이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살기를 접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지고 근육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게 됩니다. 카밀 님도 잘 아시겠지만 근육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게 되면 순간 대처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아울러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신경은 판단도 흐려지게 만들고요.”

“적이 공격해 오면 속절없이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구먼.”

“그래서 천라지망을 단순한 포위망이 아니라 진식이라 부르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두 가집니다. 첫째는 최대한 빠르게 천라지망을 빠져나가는 것과, 두 번째는 살기에 반응하지 않으면서 가는 겁니다.”

“둘 중 어느 방법이 더 나은가?”

“그건…….”

“빠르게 빠져나가는 게 최선입니다.”

북궁창이 말끝을 흐리자 금장생이 대답했다.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간다고?”

카밀은 금장생을 보았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슨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거냐?”

“이것 때문입니다.”

금장생은 혈종을 들어 올렸다.

“종?”

“강시를 움직이는 데 이 혈종은 필숩니다.”

“지금까지 너는 종을 거의 치지 않았다.”

“계속 직진하는 상황이었고 행동의 변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굳이 종을 쳐서 강시를 조종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하지만 은밀히 빠져나가려면 수시로 앉고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이 혈종을 치지 않으면 조종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구나.”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카밀은 수어린과 북궁창에게 말했다.

“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밀을 따라갔다.

세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다시 금장생이 있는 곳으로 왔다.

“나눠서 가기로 했다.”

카밀이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나눈다는 겁니까?”

“너와 강시만 여기에 남는다. 우리는 적을 유인해 갈 것이다.”

“여기서 하루나 이틀을 머물다가 낙양으로 직행하라는 거군요.”

“현재로선 그게 최선이다.”

“하지만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사람이 부족하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겁니다.”

“인원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와 강시를 대신할 사람이 곤륜산 어딘가에 숨어 있군요.”

문득 곤륜파에서 천도경을 훔쳐 냈다는 사실이 떠올라 물었다.

하지만 카밀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당부의 말만 했다.

“곤륜산이 잠잠해지면 나와야 한다, 알겠느냐?”

“숨는 건 내 전문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만 갑시다.”

카밀은 다른 이들을 보며 말했다.

“수고하세요.”

“수고 좀 해 주시오.”

“몸조심하게. 그리고 이거 받게.”

수어린, 북궁창에 이어 작별 인사를 하던 청명진인이 뭔가를 내밀었다.

“뭡니까?”

“강시 객잔의 위치가 나와 있는 지도와 예비용 부적이네.”

“강시 객잔도 있습니까?”

“노숙을 할 수만은 없지 않겠나.”

“그렇다고 해도 강시 객잔은 생소하군요.”

“그래서 그리 많지 않네.”

“그렇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낙양에서 보세.”

청명진인은 금장생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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