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8)
마왕은 여자였다?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속도로 떨어지다가 바닥과 충돌하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가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연한 짓을 했다면서 후회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뭔가가 받치는 것처럼 속도가 뚝 떨어졌다.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마치 늪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숨 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데 공기가 물속처럼 농밀했다.
이 농밀한 대기가 몸을 잡아 줌으로써 떨어지는 속도가 늦춰졌다.
그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더니 마침내 바닥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곳과 달리 주위는 상당히 밝았다. 바닥에는 벽돌이 깔려 있었다.
금장생은 주위를 살폈다.
어디로 갔는지, 먼저 뛰어내린 북궁창은 보이지 않았다.
척!
잠시 후 카밀과 청명진인이 차례로 내려섰다.
“우리가 뛰어내린 그 동굴 바닥 맞습니까?”
금장생은 카밀을 보며 물었다.
“아닌 것 같아서 그러는 거냐?”
카밀은 되물었다.
“다른 곳으로 떨어질 리가 없으니까 맞는 것 같은데 저걸 보면 다른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금장생은 머리 위를 가리켰다.
환한 바닥과 달리 머리 위는 동굴 입구처럼 검었다.
“같은 곳이다.”
카밀은 걸음을 옮겼다.
동굴 바닥에는 왼편으로 통로가 나 있었다. 폭과 높이가 각각 일 장 정도였다. 일행은 카밀을 따라나섰다.
통로는 구불구불 이어졌다.
기온도 뚝 떨어져 털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거의 반 시진 정도를 걸었을까, 일행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사라졌던 북궁창은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은 높이가 삼 장이 넘고 너비는 이 장이나 되었다.
카밀은 문 앞에 섰다.
‘어떻게 열지?’
문을 바라보던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대한 크기의 문임에도 불구하고 손잡이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기관 장치로 열지도 모르겠네. 기관 장치의 핵심은 저 천도경이고.’
금장생의 시선이 카밀이 들고 있는 천도경으로 향했다.
그때 카밀은 천도경으로 문을 비춰 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살피자 열쇠고리 모양의 홈이 문에 나타났다. 그 홈의 모양과 크기는 천도경과 꼭 같았다.
카밀은 그 홈에 천도경을 밀어 넣었다.
철컥!
“헐!”
금장생은 어이없는 얼굴로 천도경이 박혀 들어간 곳을 보았다.
조금 전에는 분명 평평한 면이었다. 그런데 천도경이 장착되는 것처럼 바위 면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금장생은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파앗!
느닷없이 천도경에서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천도경을 중심으로 물결무늬가 생겨났다.
그 물결무늬는 점점 커지더니 한 사람이 들어갈 크기에서 멈췄다.
“혹시 저게 입군가요?”
수어린이 물었다.
“그렇소.”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이번에는 금장생이 물었다.
“물을 통과해 간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옷은 젖지 않는다는 말이겠죠?”
“그렇다.”
“가시죠.”
“내가 먼저 가겠소.”
이번에도 북궁창이 먼저 들어갔다.
물처럼 생긴 곳을 통과하는 건 동굴로 뛰어내리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카밀을 제외한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카밀은 끼워 넣었던 천도경을 뽑아 들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거대한 대전이었다.
반대편까지 거리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삼십 장은 돼 보였다.
‘또 보네.’
벽을 바라보던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천수총 지하에서 보았던 그 등이 이곳에도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이곳에 있는 등이 훨씬 밝았다.
기온은 바깥처럼 서늘했다.
“저기다.”
카밀은 대전 중앙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허리 높이의 단이 있고 단 위에는 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관 바로 옆에는 수염이 가슴까지 뒤덮인 자가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상태로 보건대 아주 오래전에 좌화한 시신 같았다.
일행은 관 앞으로 갔다.
금장생은 관을 바라보았다.
크기는 칠 척七尺(210센티미터) 정도고, 좌우측 측면과 윗면은 수많은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다. 조각들은 대부분 금장생이 알 수 없는 동물들이었다.
관을 살핀 그는 이번에는 좌화한 시체로 시선을 주었다.
‘서역인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는 중원인처럼 검었다. 그런데 덩치는 칠 척에 육박했고, 코도 중원인에게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높다.
‘그러고 보니…….’
가부좌를 하고 있는 시신은 초상화 속 인물과 비슷했다.
시신 바로 앞에는 수갑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수갑은 길이가 한 자 정도로 꽤 길었는데, 위쪽은 직사각형 형태였다.
문득 수갑 위쪽의 직사각형은 뭔가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거 좀 봐도 되나요?”
금장생은 수갑을 가리켰다.
“가져도 된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금장생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년은 족히 된 물건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건 어떤 용도이건 간에 보물이란 뜻이 된다.
금장생 생각에 그런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줘 버리는 건 경솔한 행동 같았다.
“예정에 없던 모험을 하게 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이걸 받고 추가 비용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잘 아는구나.”
“그럼 안 할랍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안 해?”
카밀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노인 앞에 놓인 물건을 알고 있다. 그가 사는 나라에서는 소위 기사라고 부르는 자들이 손목과 손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무구로, 건틀릿이라 부른다.
아울러 갑옷의 일부분일 뿐 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중원인들은 뭔지 모른다. 금장생 또한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오랜 세월을 견뎠으니까 보물이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인심 쓰듯 줘 버린 거였는데, 처음엔 좋다고 하다가 돈 이야기가 나오자 거절한 것이다.
“저걸 위해 돈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써먹을 수 있을지 그것도 알 수 없고요.”
금장생은 수갑을 가리켰다.
“이건 손과 손목을 보호하는 무구다.”
카밀은 건틀릿을 집어 들었다.
“착용하는 방법은…….”
카밀은 말끝을 흐렸다. 손을 집어넣는 부분이 막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밀어 보았다. 하지만 막힌 부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 강하게 힘을 주어 밀어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건틀릿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혹시 입구를 열 수 있는 장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들겨 보고 이곳저곳을 눌러도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너나 가져라!”
카밀은 금장생에게 휙 던졌다.
턱!
금장생은 바로 받았다.
“정말 주는 겁니까?”
금장생은 확인차 물었다.
“그렇다.”
“남아일언…….”
“나는 서역인이다.”
“그럼 낙장불입이라든가 일수불퇴라는 말은?”
“모른다.”
“아무튼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깁니다.”
“물론이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헤벌쭉 웃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혹시 이 녀석, 이름 있나요?”
“우리 서역에서는 건틀릿이라 부르는 갑옷의 일부분이다.”
“건틀릿이라…… 멋진 이름이네요.”
금장생은 방긋 웃으며 손을 집어넣는 부위에 왼손을 가져다 댔다.
“그건 막힌 거라 손이 들어가지 않는…….”
카밀의 눈이 커졌다.
거짓말처럼 금장생의 손이 건틀릿 안으로 쑥 들어간 것이다.
“어?”
카밀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게 어떻게…….”
그는 금장생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탐내지 말아야 할 건 남의 부인뿐만이 아닙니다, 카밀. 이 장생의 물건을 탐내는 놈치고 천수를 누리는 걸 못 봤습니다.”
금장생은 왼팔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탐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해서 그러는 거다, 이 녀석아.”
카밀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놈 정말로 갑옷의 일부분 맞습니까?”
금장생은 건틀릿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처음 건틀릿을 끼울 때는 약간 큰 감이 없지 않았다. 좌화한 자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클 수밖에 없었다.
헐렁해서 쓸모가 없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크기가 손에 꼭 맞게 줄어든 것이다.
“맞다. 그리고 용도는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손과 손목을 보호하는 것이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뭔가 있다면 나중에 알게 되겠지.’
금장생은 관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는 관을 열 테니까 너는 준비해라.”
카밀이 관 앞으로 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등짐을 풀었다. 그리고 안에서 붓과 영사액을 꺼내 놓았다.
그르릉!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관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어?”
“세상에.”
“무량수불!”
호기심 어린 얼굴로 관 안을 바라보던 이들의 입에서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건?”
놀란 사람은 수어린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관 뚜껑을 연 당사자인 카밀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체가 썩기라도 한 겁니까?”
금장생은 관 앞으로 갔다.
“헐!”
그 역시 반응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눈은 커지고 입은 쩍 벌어졌다.
“제 생각엔 이 관이 만들어진 지 천 년이 훨씬 넘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금장생은 카밀을 돌아보며 물었다.
“맞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시체가 천 년 이전에 죽은 게 맞다는 말이네요.”
금장생은 관 안의 시체를 가리켰다.
시체는 여자였다. 그런데 키는 무려 칠 척에 달했다. 아니, 칠 척이 넘어 보인다.
머리카락은 검고, 코는 오뚝하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난생처음 보는 미녀라는 것도 상관없었다.
금장생을 가장 놀라게 한 건 산 사람보다 더 탄력적으로 보이는 시체의 피부였다.
“나도 좀 혼란스럽기는 하다.”
카밀 역시 믿기지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관 속에 육십 대 후반의 노인이 들어 있을 줄 알았다.
건틀릿을 앞에 두고 좌화한 시신은 죽은 여자의 시종쯤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건틀릿도 아무렇지 않게 금장생에게 줄 수 있었다.
‘그럼 저자가 마천인魔天人?’
카밀의 시선이 좌화한 시신으로 향했다. 그리고 금장생의 왼팔로 향했다.
‘저건 악마수惡魔手일 테고.’
그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한 악마수는 최강의 무기였다. 아울러 주인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처음 악마수를 잡고 손을 밀어 넣었을 때 끼워지지 않았다. 그건 악마수가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그랬던 악마수가 장생을 주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서역인이 아닌 중원인을.
‘하지만 저놈이 죽으면 다를 수도 있지. 아직 뿌리를 내리지 않은 걸 보면.’
카밀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이 시체, 사람 맞아요?”
금장생은 카밀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키가 칠 척이나 되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흔한 건 아니지만 우리 서역에는 키가 칠 척이 넘는 여자들이 있다.”
“이 시체도 그 여자들 중 한 명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다르다는 건 무슨 뜻이오?”
카밀이 청명진인을 보며 물었다.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 시체가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카밀이 다시 물었다.
“그건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은 없습니다.”
“뿔이라고요?”
“뿔?”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시체의 머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