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6화 (36/524)

황금가 (36)

금장생의 말대로였다.

나무들은 벌판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숲과 벌판이 서로 다른 세계인 것처럼 경계선상에 서 있을 뿐 넘어오지 않았다.

“아이고!”

그제야 일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처 좀 보게요.”

수어린은 북궁창과 금장생 곁으로 다가왔다.

“상처보다, 수 소저는 옷부터 입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수어린의 하체를 턱으로 가리켰다.

“옷이라고요?”

수어린은 고개를 숙였다.

“맙소사!”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기절하게도 아래쪽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가릴 생각도 못 했다.

“무량수불!”

청명진인이 도호를 외더니 얼른 털옷을 꺼내 수어린의 앞을 가려 주었다.

수어린은 도망치듯 벌판으로 달려갔다.

벌판은 무릎까지 오는 풀로 뒤덮여 있었다. 바로 주저앉은 후 등짐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그사이 금장생은 북궁창의 상처를 살폈다.

나뭇가지는 배꼽과 명치 부분에 하나씩 박혀 있었다. 여전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금장생은 북궁창을 보며 물었다.

“모르겠소. 이물감 같은 것도 없고…….”

북궁창은 고개를 갸웃했다.

몸속에 나뭇가지가 박혔으면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그런데 고통은 고사하고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튼 튀어나온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해야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옷을 갈아입고 온 수어린이 서 있었다.

“나보고 자르라고요?”

수어린이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수어린은 검을 들고 북궁창 옆으로 앉았다. 그리고 피부에 최대한 밀착해서 검날을 나뭇가지에 댔다.

“악!”

천천히 힘을 주는데 북궁창이 비명을 내질렀다.

수어린은 얼른 검을 멈췄다.

“왜……?”

그녀는 북궁창을 보았다.

피부는 조금도 건들지 않았다. 그런데 북궁창이 비명을 내지른 것이다.

“피부를 배어 내는 것처럼 아프오.”

“네에?”

수어린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오. 아무래도 이건 그냥 둬야겠습니다.”

북궁창은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네, 네.”

수어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북궁창은 옷을 여몄다.

“걸을 수 있겠는가?”

카밀이 북궁창에게 물었다.

“무공을 펼치는 것도 가능합니다.”

북궁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출발하도록 하세.”

카밀은 다시 천도경을 들어 올렸다.

천도경이 달처럼 밝아지더니 길이 나타났다. 길은 벌판을 가로질러 나 있었다.

카밀이 앞장서고 나머지는 뒤를 따랐다.

조금 전 나무의 공격을 경험한 터라 일행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뭔가 나올 것처럼 으스스하네.”

청명진인이 팔 상박을 쓸며 중얼거렸다.

“꼭 공동묘지에 들어온 것 같죠?”

금장생도 청명진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상한 벌판이 아니라 망산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말이네. 여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청명진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서가던 카밀이 우뚝 멈췄다.

“왜 그러십…… 귀, 귀신!”

금장생은 청명진인의 팔을 꽉 틀어쥐었다.

오십여 장 건너편에서 검은 물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귀신이 아니고 장수네.”

검은 물체들을 지켜보던 청명진인이 말했다.

“장수라고요?”

금장생은 검은 물체를 보았다.

땅속에서 기어 나온 자들은 오십여 명가량이었는데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갑옷과 투구가 중원의 그것들과는 많이 달랐다.

“더 이상 죽지 않는 자들…….”

카밀은 신음을 내뱉었다.

“저자들을 아세요?”

수어린이 물었다.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전설로, 중원의 강시와 비슷합니다.”

“강한가요?”

“죽일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처음인가요?”

“나도 전설로만 접했을 뿐 실체를 보는 건 처음입니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놈들이 강시라는 겁니까?”

청명진인이 물었다.

“비슷하다고 했지 강시라고 하지는 않았소.”

“목을 쳐도 죽지 않는다는 말 같은데 그렇습니까?”

“그것 역시 나도 모르오.”

카밀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까?”

이번에는 금장생이 물었다.

“길을 잃으면 우린 이 안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 우리도 저놈들처럼 되고 말 것이다.”

카밀은 장수들을 가리켰다.

“뚫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맞다.”

카밀은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카밀을 따라 천천히 벌판 안으로 들어갔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느닷없이 투구를 쓴 자들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폭사되었다. 그리고 검을 높이 쳐들고 일행을 향해 달려왔다.

“맙소사!”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쉰 마리 말이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쩐 자가 이런 진식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엄청난 진식이었다.

일행과 기병 사이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졌다.

“떨어지지 마세요.”

가장 먼저 수어린이 몸을 날렸다.

“타핫!”

기합과 함께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곧 무시무시한 기운을 머금은 검강이 전방을 갈랐다.

스악! 스악! 스악! 스악!

그녀의 무공은 엄청났다. 순식간에 기병 다섯 명의 몸통이 조각조각 잘려 나갔다.

“차앗!”

“이얍!”

이어 북궁창과 카밀이 공격을 했다. 도강과 커다란 불덩어리가 전방을 강타하고 기병 십여 명이 사라졌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이름만…… 억?”

금장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시체 조각에서 푸른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자성을 가진 것처럼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잘리기 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건 말도 안 돼.”

금장생은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들이 길을 뚫어 줄 때 어서 빠져나가게!”

청명진인이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금장생은 기회를 엿봤다.

이미 이상한 나무를 겪은 후라 그런지 세 사람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들은 달려드는 자들을 없애고 조금씩 전진했다.

“저 앞으로 가면 성이 있을 거다! 거기까지 가야 한다!”

카밀이 커다란 불덩어리를 쏘아 대며 소리쳤다.

금장생과 청명진인에게 한 말이었다.

“알았습니다. 기회가 나면 전력을 다해 달려가겠습니다.”

금장생은 세 사람 뒤편으로 바싹 붙었다.

하지만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창! 창창창창! 창!

게다가 ‘더 이상 죽지 않는 자’라고 하였던 괴물들은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일정한 진형을 구축한 채로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은 검을 무기로 사용했는데, 검에는 강기와 비슷한 종류의 힘이 실려 있었다.

“헉!”

금장생은 급하게 묵야를 들어 올려 머리를 방어했다.

카앙!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거대한 힘이 묵야를 짓눌렀다.

“헙!”

금장생은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묵야 끝을 아래로 숙였다.

차르르르!

‘더 이상 죽지 않는 자’의 검이 거북살스러운 소리와 함께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악!

미끄러져 내려갔던 검이 다시 금장생의 목을 노리고 솟구쳤다.

묵야를 그러쥔 금장생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묵야를 번쩍 들어 올렸다.

“차앗!”

막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우렁찬 기합과 함께 도 한 자루가 ‘더 이상 죽지 않는 자’를 훑었다. 북궁창의 도였다.

스악!

북궁창의 도는 먼저 ‘더 이상 죽지 않는 자’의 팔을 자르고 다음에 머리를 자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통과 발목을 잘랐다.

‘더 이상 죽지 않는 자’는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잘려 나간 부위에서 피 대신 푸른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하나씩 합쳐졌다.

“나를 따라오시오!”

북궁창은 길을 트면서 소리쳤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없을 줄 알았는데.”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북궁창을 쫓아 달렸다.

북궁창은 도강을 펼쳐 ‘더 이상 죽지 않는 자’들을 공격했다.

‘강기를 펼치지 못하면 일각도 못 버티겠네.’

문득 든 생각이었다.

북궁창과 수어린은 강기를 자유자재로 펼치는 고수다. 만일 저런 고수가 아니고 일반 무인, 즉 강기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과 함께 왔다면 진작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금장생의 시선이 카밀에게로 향했다.

카밀의 공격은 화염구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화염구가 수어린과 북궁창이 펼치는 강기 못지않게 강했다.

공격 수법은 하나뿐이지만 화염구의 색과 크기에 따라 위력이 다르다. 위력은 크기에 비례해서 강해지는 것 같았다.

‘사술이라고 해도 할 말 없겠네.’

카밀이 펼치는 화염구를 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사술인지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정통 무공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콰아아아아!

바로 그때 앞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거의 성인 키 크기의 불덩어리가 전방을 휩쓸면서 나온 소리였다.

“타하!”

폭발음에 이어 북궁창의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의 도에서 쏟아져 나온 도강이 전방을 찢어발겼다.

카밀과 북궁창의 공격이 연이어 터지자 전면이 뻥 뚫렸다.

“가시오!”

북궁창이 소리쳤다.

“고맙소.”

금장생은 뻥 뚫린 공간을 향해 내달렸다.

“차하!”

“타하!”

또다시 두 사람의 기합이 들려왔다. 청명진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공격한 모양이었다.

‘일단 저기까지만…….’

쭈뼛!

느닷없이 모골이 송연해졌다.

금장생은 바로 자세를 최대한 낮췄다. 그리고 묵야를 쭉 뻗었다.

스악!

방금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더 이상 죽지 않는 자’의 검이 지나갔다. 만일 자세를 낮추지 않았다면 목이 잘릴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격한 건 ‘더 이상 죽지 않는 자’뿐만이 아니었다.

금장생 또한 자세를 낮추면서 묵야를 휘둘렀고, 날이 무딤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죽지 않는 자’가 탄 말의 다리를 잘라 냈다.

쿠웅!

한쪽 다리가 잘린 말이 처박히고 ‘더 이상 죽지 않는 자’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파앗!

말 다리의 잘려 나간 부위에서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금장생은 얼른 잘려 나간 말 다리를 집어 들었다.

“이얍!”

그리고 멀리 던져 버린 후, 카밀이 말해 준 곳으로 내달렸다.

세 사람이 막고 있는 듯 그를 쫓아가는 ‘더 이상 죽지 않는 자’들은 없었다.

오십여 장을 달려가자 다른 지형이 나타났다. 그곳은 카밀이 말한 것처럼 성이 아니라 폐허였다.

“그래도 저기로 가면…….”

금장생은 더욱 속도를 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반 장 남짓의 담을 넘어 폐허로 들어갈 수 있었다.

“휴우!”

담을 넘은 금장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대앉았다.

“저건?”

안도의 숨을 내쉬던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연기처럼 보이는 게 전면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건 그가 내쉰 숨이었다.

“저게 어떻게 보일 수 있는 거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추운 겨울이면 허연 입김이 설명이 된다. 한 뼘 정도지만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긴 춥지도 않고, 숨은 오 장 떨어진 곳으로 퍼져 나가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여기도 안전한 장소는 아닌 것 같네.”

금장생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쑥!

막 자리를 뜨려는데 조금 전 숨이 스며들었던 장소에서 뭔가가 쑥 튀어나왔다.

그건 바로 사람의 팔이었다.

“염병할!”

금장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