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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31화 (31/524)

황금가 (31)

‘태극선의라…….’

금장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걸 찾아 입으면 암왕칠구에 걸려 있는 봉인을 풀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암왕칠구에 걸린 봉인을 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 경우엔 보통 어떤 업보를 떠안게 되는 경우가 많지. 나는 그런 게 싫거든요.”

금장생은 아래쪽 동정을 살폈다.

그는 귀신이 말한 것 중에서 책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자네가 가장 좋아하는 게 들어 있네.’라는 말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모두 자는 듯 조용했다.

금장생은 조심스럽게 절벽을 내려갔다. 바닥까지는 칠 장 정도였다.

아래로 내려와서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혹시 일월태극문 폐허를 감시하고 있는 곤륜파 문도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잠시 후 일월태극문 본관으로 들어섰다. 초저녁에 피웠던 불씨마저 꺼진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는 중앙으로 갔다.

태극 문양 안쪽에 있는 점은 불을 피울 때 이미 확인했다. 두 점 중간에 서서 오른손과 왼손으로 점을 동시에 눌렀다.

철컥!

그러자 그가 앉아 있는 곳 바로 아래쪽에서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한편으로 물러나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살폈다.

그가 발견한 건 작은 홈이었다. 태극 문양 머리 부분에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홈이 나 있었다.

그곳에 손가락을 넣고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가로세로 길이 한 자, 두께 세 치 정도 되는 돌이 들어 올려졌다.

돌 아래쪽에는 보자기 하나가 들어 있었다. 금장생은 보자기를 들어 올렸다.

보자기는 제법 묵직했다.

‘응?’

보자기를 풀려던 금장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빌어먹을, 하필 이때에…….”

그는 보자기를 다시 본래 자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줌이 마려운 것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를 한 채 밖으로 나갔다.

나갔던 그가 들어온 건 잠시 후였다. 그의 얼굴엔 개운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다시 본래 자리로 가서 돌을 들어 올리고 보자기를 꺼내 풀었다.

안에는 책 한 권과 전표 열 장이 들어 있었다.

금장생은 먼저 전표를 집었다. 백 냥짜리 무기명 전표였다.

“귀신같은 사람이네. 아니, 귀신 맞지.”

그는 히죽 웃었다.

“귀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네. 앞으로는 친해지도록 노력해야겠어.”

귀신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금장생은 흡족한 얼굴로 돈을 챙겼다. 그리고 책을 집어 들었다.

맨 앞장엔 금박으로 일월신공日月神功이라 씌어 있었다.

“비급인가?”

그는 책장을 넘겨 보았다.

“일월태극문의 문주 무공이에요.”

입구 쪽에서 수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수어린이 문에 기대서 있었다.

금장생은 보자기를 접어 구덩이 안에 집어넣고 돌을 놓은 다음 일어났다. 그리고 수어린이 있는 곳으로 가며 물었다.

“언제 왔습니까?”

“당신이 뭔가를 품속으로 집어넣을 때부터요.”

“그럼 다 본 거네요?”

“아마도…….”

“이건 돈입니다.”

금장생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전표를 꺼내 보여 주었다.

“돈이라고요?”

“백 냥짜리 무기명 전표 열 장요. 필요하다면 한 장 정도는 양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돈보다 그 책에 관심이 더 많아요.”

수어린은 일월신공을 가리켰다.

“돈보다 책이 좋다고요?”

“네.”

“이상한 성격이네요. 자요.”

금장생은 일월신공을 수어린에게 건넸다.

“내가 이상해요?”

“돈보다 책이 좋다는데 이상할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이 책은…….”

“오백 냥만 주십시오.”

“네?”

“나는 맨 앞에 있는 것만 봤을 뿐이니까 안 본 거나 마찬가집니다. 한번 읽어 보고 마음에 들면 오백 냥만 내고 사라는 겁니다.”

“마음에 안 든다면?”

“그럼 한 번 본 값만 내면 되고요.”

“한 번 본 값은 얼마로 책정돼 있죠?”

“원래 가격의 십분의 일입니다.”

“그럼 쉰 냥이네요?”

“너무 많나요?”

“끙!”

수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월신공은 강호에 풀리면 혈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보물이다. 그런데 돈을 받고 팔 생각을 하다니.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걸 훔친 겁니까?”

금장생이 물었다.

“네?”

수어린은 깜짝 놀랐다. 금장생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그자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건 우리를 공범으로 확신했다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뭔가를 훔쳐 낸 도둑이 죽었다는 걸 뜻하기도 하고요.”

굳이 그게 아니라도 무량진인 일행이 떠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피한 건 도둑과 한패라는 걸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말해 줄 수 없어요.”

수어린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거울인가 보죠?”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거 살 건가요?”

금장생은 비급을 가리켰다.

“나와는 맞지 않는 무공이에요.”

수어린은 비급을 돌려주었다.

“아쉽네요. 혹시 북궁 소협이나 카밀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북궁 소협은 몰라도 카밀은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북궁 소협에게 말해 봐야겠네요.”

“…….”

수어린은 황당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그만 갈까요?”

“그, 그러죠.”

수어린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절벽을 앞에 두고 섰다.

금장생은 절벽 오를 준비를 했다.

“내가 해 줄게요.”

수어린은 금장생의 허리를 잡고 바닥을 찼다. 그녀와 금장생은 곧 동굴 입구로 내려섰다.

“이런다고 쉰 냥을 깎을 생각 하면 안 됩니다.”

“쉰 냥?”

“일월신공 본 값을 말하는 겁니다.”

“나는 끝까지 보지도 못했는데요?”

“끝까지 본 것과 대여료를 내는 건 별갭니다. 일단 빌렸으면 돈을 내야 합니다.”

“그건 강매 아닌가요?”

“그게 싫으면 구입하면 되잖습니까.”

“네?”

“아무튼 쉰 냥 빚졌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 두 번째 불침번인가요?”

“네.”

“그럼 전 내려가서 자겠습니다.”

금장생은 아래로 내려갔다.

수어린은 그런 금장생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 앉았다.

일행은 이틀 동안 꼬박 동굴에서 머물렀다. 그사이 곤륜파 문도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일행은 동굴을 나왔다.

“쉬지 않고 달릴 건데 따라올 수 있겠느냐?”

카밀은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이제 스물세 살밖에 안 됐습니다.”

“체력에는 자신 있단 말이냐?”

“오십이 넘은 노인네들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요?”

꿈틀!

카밀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금장생의 말에 기분이 상한 탓이었다.

그런 그에게 금장생은 결정타를 날렸다.

“무공만 믿고 설치다가 개피 본 사람을 아주 많이 봤습니다.”

“…….”

카밀은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다가 곤륜파 문도가 들이닥치면 빼도 박도 못합니다.”

“건방진…….”

카밀은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전방으로 내달렸다.

신법을 펼친 듯, 그가 나아가는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그는 이 정도 속도면 금장생이 따라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산중이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중이다. 젊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지형이 절대 아니다.

‘어디 얼마나 견디나 보자.’

카밀은 더욱 속도를 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반 시진을 달렸다.

“이건…….”

카밀은 의아했다.

그의 생각에 진작 앓는 소리가 나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쉬었다가 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흘끔 고개를 돌렸다.

“저놈?”

그의 눈이 커졌다.

금장생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두 다리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보폭도 일정하고 앞뒤로 젓는 팔에도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습니까, 내 앞에서 체력 자랑하다 개피 본 노인네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흥!”

카밀은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몸을 날렸다.

휙! 휙휙!

금장생 일행이 떠나고 두 시진 후 곤륜파 도인들이 일월태극문 폐허로 모여들었다.

“모, 몽완이 죽었습니다.”

도인 한 명이 무량진인 앞으로 가 보고했다.

“어디냐?”

무량진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이쪽입니다.”

보고하던 도인은 무량진인을 데리고 갔다.

“사인은 뭐냐?”

죽은 문도를 바라보던 무량진인이 물었다.

“뒤쪽으로 접근해서는 머리를 돌려 목뼈를 부러뜨렸습니다.”

“살인자가 접근할 동안 몽완은 자고 있었단 말이냐?”

“그건…….”

보고하던 도인은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몽완은 감시 중이었고 혼자 있다가 당했다. 어떤 상태에서 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알 리가 없겠지. 그보다 놈들의 흔적은 찾았느냐?”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내려가는 게 아니고?”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추격한다.”

“알겠습니다.”

도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놈들을 추격한다!”

파앗! 파앗! 파앗!

곤륜파 도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 * *

금장생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백 장이 넘는 수직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습니까?”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 청명진인을 보며 물었다.

“지금 날 걱정하는 건가?”

청명진인은 금장생을 돌아보았다.

“얼레?”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그렇게 달렸는데 청명진인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였다.

“무인이었군요.”

“신법만 배운 사람도 무인이라고 한다면 맞네.”

“신법만 익혔다고요?”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대머리 아닌가. 비 맞는 걸 정말로 싫어해서 말이네.”

“비 맞는 게 싫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우산 없이 비 맞는 거네.”

“신법만 익힌다라…… 괜찮은 방법이네요.”

금장생은 싱긋 웃으며 절벽으로 달라붙었다.

이제부터는 등산이 아니라 암벽 타기를 해야 했다.

그가 절벽을 올라가는 속도는 빨랐다.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앞서 나갔다.

“절벽 타는 게 처음이 아닌 모양이구먼.”

청명진인이 금장생을 따라붙으며 말했다.

그는 금장생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러자 굳이 잡을 곳을 찾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절벽을 오를 수 있었다.

“수도 없이 탔습니다. 그래서 대충 보면 잡을 곳이 눈에 보입니다.”

“아무튼 카밀 저 사람, 자네를 물먹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물을 먹은 셈이구먼.”

“물은 무슨…….”

“저기다! 저기 놈들이 도망친다!”

“어?”

금장생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수십 명이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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