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9)
천도경
산을 올라가는 자는 도달하는 높이에 따라 불사不死, 령靈, 신神이 될 수 있다.
산의 모양은 위쪽은 넓고 아래쪽은 좁은 역삼각형이다. 정상에는 신기한 동식물이 살며, 그것들을 복용하면 불사의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장소다. 극히 일부분만이 그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금장생은 곤륜산을 오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책에 나온 내용은 비현실적인 것이 더 많았다.
금장생은 카밀을 보았다.
“말이 안 된단 거냐?”
금장생의 내심을 알아차린 카밀이 물었다.
“이 책에 보면 곤륜산은 역삼각형 모양이고 정상은 수천만 리가 넘는다고 돼 있습니다. 장성의 길이가 만 리밖에 안 되는데 수천만 리가 넘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삼각형 모양의 정상 아래쪽은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나타내고, 수천만 리는 끝없이 넓은 땅이란 의미라면?”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금장생은 책 한 부분을 읽었다.
남방 바다 밖에 조요국이란 소인국이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척이나 왜소해서 석 자만 돼도 큰 키에 속한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옷을 입었고 모자를 썼으며 예의 바르고 점잖았다. 그들은 굴속에서 살았으며 매우 총명하여 기발한 물건들을 만들어 냈다.
“그런 사람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느냐?”
“그건…….”
금장생은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살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에도 살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하면 너는 ‘전란의 시대’를 아느냐?”
이번에는 카밀이 물었다.
“전란의 시대요?”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금전가 자식들은 싫어도 공부는 해야 했다. 금장생도 다르지 않았다. 선생을 초빙해 각 분야를 배웠다.
금장생이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역사였는데, 역사 중에서도 고대사를 가장 재미있게 공부했다.
갑골문자도 고대사를 좋아해서 익혔다.
수년 동안 배운 역사 지식을 총동원해도 ‘전란의 시대’라는 말은 없었다.
“하면 춘추전국시대는 아느냐?”
“압니다.”
“전란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벌어진 대전쟁을 말한다.”
“그건…….”
“글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웃기는 거다. 수만 년 전에도 사람이 살았고, 그들은 전쟁을 했다. 우리가 그 전쟁에 대해 모르는 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당시 통용됐던 문자를 몰라서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카밀 말은 ‘전란의 시대’는 기록되지 못했을 뿐 존재했다는 거네요?”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카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 시간이 끝났으니 다시 출발해야 했다.
일행은 다시 산을 올랐다.
곤륜산을 오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수천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았던 도인들이 남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길도 그들이 남긴 것 중 하나였다.
바쁘게 산을 오른 그들은 삼부 능선에서 저녁을 맞았다.
워낙 고산지대라 저녁이 되자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일행은 쉴 곳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올라올 때 마주쳤던 그 많은 초막들이 막상 찾으려고 하니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게 아니라 흩어져서 찾아보기로 해요.”
수어린이 일행을 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우리마저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금장생이 물었다.
“반 시진 후에 저 아래에서 만나기로 해요.”
수어린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절벽이 우뚝 서 있었는데, 어느 쪽에서 봐도 다 보일 정도로 높았다.
“그렇게 하지요.”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장생은 청명진인과 함께 움직였다.
“여기서 몇 년이나 머물렀습니까?”
금장생은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오 년 머물렀네.”
“깨달음은 많이 얻었습니까?”
“깨달음을 크게 얻었으면 신선이 됐겠지.”
청명진인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이곳 생활이 별로였나 봐요?”
“춥고 배고픈 거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네.”
“풋!”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그 많던 초막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
청명진인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무리 뒤져도 쉴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만 가죠.”
금장생은 절벽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하세.”
청명진인도 바로 금장생과 보조를 맞췄다.
그 역시 하룻밤을 묵기 위해 산을 헤맬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쉴 곳을 찾아 헤맬 시간이 있으면 풀밭에 누워 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 식경 정도를 걷자 절벽 앞에 도착했다.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절벽 아래쪽에는 십여 채의 집이 마치 마을처럼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갔다.
사람이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전부가 빈집이었다.
“돌로 지어졌네요.”
“이 높은 곳까지 돌을 지고 왔을 수는 없을 테니까 저 절벽에서 떨어진 돌을 쌓아 올려 지은 것 같구먼.”
청명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산적이나 마적 소굴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아니면 무림 세력이거나.”
“무림 세력요?”
“곤륜산에 유명한 문파가 하나 있잖은가.”
“곤륜파 말입니까?”
“그러네.”
“곤륜파는 산 동쪽에 있지 않나요?”
뒤에서 수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수어린을 비롯한 일행이 서 있었다.
“문파야 산 동쪽에 있지만 그들은 곤륜산을 자기들 거라고 생각하니까…….”
“설사 곤륜파 건물이라고 해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여기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비라고요?”
금장생은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차가운 물기가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어린의 말대로 비가 내렸다.
“일단 들어가요.”
수어린은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건물은 가장 큰 곳이었다. 내부는 정방형이었는데 가재도구가 하나도 없었다.
“먼저 먼지부터 쓸어 내도록 하죠.”
수어린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휘익!
그녀의 손에서 나온 장풍이 바닥을 휩쓸었다.
잠시 후 작은 덩어리들이 나타났다. 바닥을 덮고 있던 먼지였다. 그것들은 곧 밖으로 던져졌다.
“어?”
일행의 눈이 커졌다. 먼지를 치우고 난 자리에 커다란 문양이 나타난 것이다.
그건 바로 태극 문양이었다.
“아!”
태극 문양을 본 청명진인이 나직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금장생이 물었다.
“저건 일월태극문 문양이네.”
청명진인은 태극 문양을 가리켰다.
“일월태극문도 곤륜산에 있는 문팝니까?”
“오십 년 전까지는 곤륜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문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네.”
“그럼 여기가 일월태극문의 본산일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렇군요. 그럼 나는 나가 나무를 해 오겠습니다.”
금장생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장작을 잔뜩 안고 들어왔다.
그것들을 한편에 놓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다른 이들도 따라 나갔다.
땔감이 상당히 쌓이자 불을 피우고 각자 챙겨 온 식량을 먹었다. 금장생이 꺼낸 건 곡물 가루였다.
그는 곡물 가루를 물에 개어 둥글게 만들어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순수한 곡물 가루뿐이지만 여러 가지가 섞여 먹을 만했다.
“내일은 산짐승이라도 한 마리 잡았으면 좋겠네.”
곡물 가루를 먹다 말고 청명진인이 투덜댔다.
“도사는 육식을 금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수어린이 청명진인을 보며 물었다.
“도사도 사람인데 먹고는 살아야지요.”
“먹을 건 고기가 아니라도 많지 않나요?”
“뭐, 그렇긴 한데. 문제는 내가 고기를 제일 좋아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훗!”
수어린은 피식 웃었다.
휙! 휙! 휙!
“응?”
수어린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느닷없이 건물 밖에서 누군가 날아내리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그런데 한두 명이 아니었다.
―북궁 소협도 들었어요?
수어린은 북궁창에게 전음을 보냈다.
―열 명 이상입니다.
―어떡하죠?
―빠져나가는 것도 늦은 것 같고, 저자를 이용해 봐야지요.
북궁창은 눈짓으로 금장생을 가리켰다.
“무량수불!”
나직한 도호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행은 긴장한 얼굴로 들어온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도복을 걸친 도인들이었다.
도인들은 금장생 일행을 빠르게 살폈다.
“나는 곤륜파 무량이외다.”
날카로운 인생의 도인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낙양 망루의 주인인 장생이라고 합니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다른 사람보다는 직접 나서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복장을 보니…….”
무량진인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강신술삽니다.”
“강시를 제강하는 술사란 말이오?”
복장을 보고 이미 짐작했지만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신술사가 곤륜산엔 무슨 일로 오셨소?”
“강신술사가 올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시체 운구 때문에 왔다는 거요?”
“네.”
“시체는 어디 있소?”
“시체의 위치는 영업 비밀에 해당합니다. 그 점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인.”
금장생은 정중하게 말했다.
“영업 비밀이라…….”
무량진인의 눈초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었다.
그가 이곳으로 온 건 곤륜파에 침입한 도둑을 잡기 위해서였다.
도둑이 훔쳐 간 건 고경古鏡이었다.
양쪽에 거울이 달려 있다는 것과 천도경天道鏡이란 이름을 제외하면 특이할 것도 없는 골동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제자들이 나선 건 곤륜파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만일 도둑이 곤륜파에서 천도경을 훔쳤다고 떠벌리고 다니면 곤륜파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테고 곤륜파 소속 도인들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문주는 곤륜의 모든 걸 걸고 도둑을 잡아들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비가 내리는 상황임에도 곤륜 전역을 이 잡듯 헤매고 다니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저들도 일행인가?”
무량진인은 수어린 일행을 가리켰다.
“이런 일을 하는 데는 호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누가 자네들을 노리기라도 한다는 건가?”
“우리를 위협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강십니다. 이마에 붙인 부적이 잘못하여 떨어지면 강시가 날뛰게 되는데, 무인이 아니면 제압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저 이상한 옷을 입은 자는 누군가?”
“안내인입니다.”
“…….”
무량진인은 할 말이 없었다.
수상한 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딱 꼬집어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강신술사라고 하였는가?”
다시 금장생을 보았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시를 해강할 때 특별한 방법을 쓴다고 하던데…….”
“해강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겁니까?”
“그러네.”
“굳이 그럴 필요가…….”
“실은 비가 오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온 건 본사에 든 도둑 때문이네.”
“도둑이라고요?”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곤륜파는 작은 세력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거대 문파다. 그런 곳을 턴 배짱 좋은 도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 곤륜파의 보물 중 하나인 거울을 훔쳐 갔다네. 그래서…….”
“의심을 벗어나려면 강신술사라는 걸 증명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네들 소지품을 확인하는 거네만, 그렇게 하면 서로 기분 나쁠 것 같아서 말이네.”
“그렇기도 하겠군요.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묵야를 뽑아 들고 해강비전 구결을 끌어 올렸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영기라 부르는 특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묵야가 뇌전처럼 푸른색으로 변했다.
“됐습니까?”
금장생은 무량진인을 보며 물었다.
“됐네. 협조해 줘서 고맙네.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겠네, 그럼.”
무량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건물을 포위했던 곤륜파 도인들이 자리를 떴다.
“살펴보고 오세요.”
곤륜파 도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수어린은 북궁창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았소.”
북궁창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돌아왔다.
“다 떠났소.”
“그럼 우리도 가야겠군요.”
수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출발한다고요?”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수어린을 보았다.
“네.”
“지금 자리를 뜨면 더 의심하지 않을까요?”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캐묻지 않았다.
“여기 있어도 다시 돌아올 거예요.”
수어린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거참!”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