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4)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의 근원지는 태사의에 앉아 있는 백발노인이었다.
노인은 흰색 학창의를 입고 있었는데, 잔뜩 굳은 얼굴은 금세라도 차가운 한기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강해 보이는 얼굴과 보통 사람보다 더 큰 체격을 지닌 이자는 해림의 림주이자 무림십패의 일인인 단천 파운양이었다.
“다시 말해 보아라.”
파운양의 입이 열리고 돌덩이처럼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는 대공자님과 함께 납치를 당해 인신매매범의 배에 팔렸습니다.”
놀랍게도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보고하는 자는 낙양에서 금장생에게 사기를 치던 자들 중 총관 역할을 하였던 장하였다.
“어떤 자가 너희를 납치했다는 거냐?”
“그게…….”
장하는 말끝을 흐렸다.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말해라, 장하. 만일 나중에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를 물을 것이다.”
“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림주님.”
장하는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이 사건은 촌놈 한 명이 대공자님 가게로 찾아오면서 시작됐습니다.”
장하가 말한 대공자는 금선달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던 파세룡이었다. 그리고 파세룡은 해림 림주의 큰아들이었다.
장하는 그 사기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세룡이 그 젊은이 돈을 노리고 사기를 쳤다는 거냐?”
“네.”
“그 젊은이가 수만 냥을 가지고 있었던 거냐?”
“그자가 가진 돈은 총 일천 냥이었습니다.”
“…….”
파운양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 장하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이, 해림의 대공자가 기껏 일천 냥을 바라고 사기를 쳤다는 거구나.”
“죄송합니다, 림주님. 제게 목숨 걸고 말렸어야 하는데…….”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안하무인인 그 녀석을 말리겠느냐. 계속해라.”
“네. 작업은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도련님은 일천 냥을 벌었고요. 사고가 일어난 건 작업이 끝나고 며칠 후였습니다. 저희는 그 촌놈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기분 좋게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발가벗겨진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를 납치한 그자가 인신매매하는 자들에게 팔아 버렸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희는 정신을 차렸고, 세룡은 인신매매범과 싸움을 했다는 게냐?”
“네.”
“그 인신매매범 수뇌는 삼대암기라고 부르는 어린월을 가지고 있었고.”
“그, 그렇습니다, 림주님.”
“알았다. 그만 나가 봐라.”
파운양은 손을 휘저었다.
“알겠습니다.”
장하는 무릎걸음으로 물러나 대전에서 나갔다.
조금 전 장하가 앉아 있던 곳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장하가 흘린 땀 때문이었다.
파운양은 젖은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서 천환을 불러와라!”
한동안 죽은 듯 꼼짝없이 있던 그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삼십 대 초반의 청년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중키에 상당한 미남인 이자는 해림의 제일제자 신룡神龍 옥천환이었다.
신룡 옥천환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건방지게 보일 정도로 오만한 자, 하지만 오만해도 괜찮을 정도로 강한 자.’다.
후기지수를 꼽을 땐 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초극 강자. 그가 바로 신룡 옥천환이었다.
하지만 옥천환의 얼굴에서는 오만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옥천환은 고개를 숙였다.
“세룡에 대해 들었느냐?”
“오기 전에 들었습니다.”
“부모는 어떤 자식을 가장 짠하게 여기는지 아느냐?”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
옥천환은 고개를 저었다.
“가장 미워하는 자식이다.”
“…….”
옥천환은 파운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도 나중에 자식을 낳아 보면 알겠지만 자식은 내 분신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녀석이 못하면 내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되고, 녀석이 실패하면 내가 실패한 것처럼 생각된단 말이다. 그래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식에게 더 화를 내게 되는 거다. 정말로 그 녀석이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제대로 된 사람이 돼 성공할 거란 확신을 가진다. 기대가 아니라 확신이란 말이다, 천환.”
파운양은 잠시 말을 끊었다. 한동안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세룡을 미워한 것보다 백 배 이상 더 사랑했다, 천환."
“대공자를 해친 자는 장하에게 죽은 걸로 압니다, 림주님.”
옥천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다, 천환. 한 놈이 남아 있다. 약으로 내 아들을 잠들게 해서 인신매매범에게 팔아넘긴 놈. 그놈이 내 아들을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내 아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내 아들의 죽음은 그놈 때문이란 말이다.”
파운양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놈을 잡아 와라!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살려서 데려와라. 그럼 천환 너를 용서해 주겠다.”
‘응?’
옥천환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파운양을 보았다.
“용서라 하심은…….”
“네가 세룡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느냐? 기회만 나면 없애 버리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놈을 생포해 오면 천환 너의 모든 죄과를 잊겠다. 그리고 해림의 후계자로 공표하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최선을 다하겠……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림주님.”
옥천환은 허리를 꺾었다.
“다음 보고는 놈을 천환 네가 서 있는 그곳에 무릎을 꿇리고 나서 받겠다.”
그만 나가 보라는 축객령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림주님.”
옥천환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하루 후. 일단의 무리가 해림 정문을 나와 낙양으로 길을 잡았다.
그들 선두에 있는 자는 파운양의 제일제자 신룡 옥천환이었다.
* * *
검은 무복을 걸친 남녀 다섯 명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바닥을 꼼꼼하게 살피는 그들의 얼굴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찾았어!”
그들 중 여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나머지 네 명이 여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십 장 정도를 쏘아져 갔는데도 미세한 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울러 움직이는 속도 또한 대단히 빨랐다.
“여기야.”
바닥을 가리키는 여자는 서리가 날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의 소유자였지만 얼굴은 상당히 미인이었다.
“내가 파지.”
건장한 사내가 바닥을 향해 일 장을 날렸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더미가 날렸다.
몇 번을 더 파내자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한 자인 상자가 나왔다.
장력을 날리던 사내는 상자를 허공섭물로 끌어당겨 발치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으음!”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사각으로 접힌 비단뿐이었다.
그는 비단을 풀었다. 안에는 비단 크기로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사내는 얼른 종이를 펼쳤다.
나는 그곳에서 얻은 건 버렸고 본 건 잊었다.
이제 양민으로 돌아간다.
다만 너희와 즐거웠던 추억만 간직할 생각이다.
부디 날 보내 주길 바란다.
와락!
사내는 서찰을 움켜쥐었다.
“나도 그러고 싶소. 하지만 그분이 원하지 않소. 그분은 당신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노심초사하시고. 뭐, 그분이 잠을 자지 못하는 건 나와 상관없소. 내 관심은 그분이 당신의 입을 영원히 막으라고 명령을 내리셨다는 거고, 나는 우리를 배신한 당신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는 거요. 반드시 쫓아갈 거요. 설사 그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화르르!
사내의 손에서 불길이 올랐다. 서찰은 곧 재로 변해 허공으로 날렸다.
“그가 간 방향은?”
사내는 나머지 네 사람을 보며 물었다.
“서쪽!”
“서쪽!”
“서쪽!”
“서쪽!”
네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쪽이라고 말했다.
“그를 찾아내면 죽일 거야?”
여자가 물었다.
“그를 죽이는 건 명령이다.”
“단지 명령 때문에 그를 죽이려 한다고?”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이호 너는 늘 그를 질투했으니까.”
“그러면서도 동료라는 걸 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기회를 잡지 못한 건 아니고?”
“무슨 기회 말이냐?”
“일호를 암습할 기회.”
“…….”
“비록 떠났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강해.”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그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문제는 현실이야.”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나설 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를 없애는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천객天客 전부가 될 것이다.”
“합공해서 없애자고?”
“배신자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다른 이들도 이호 너와 같은 생각이었으면 좋겠군.”
“그들은 따르게 될 것이다. 오호는 본대에 연락을 하고 우린 서쪽으로 간다!”
“좋아, 가자고.”
여자는 싱긋 웃었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다섯 명은 바로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그들의 모습은 금세 지평선 속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 * *
―안 돼! 하지 마!
금장생은 내리찍던 묵야를 우뚝 멈췄다.
그는 전날 훔쳐 온 시체를 동시로 제강했다가 해강시켜 주려던 참이다.
제강은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머릿속에 영기를 집어넣고 이마에 부적을 붙이자 강시는 순한 양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해강.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제강과 달리 해강은 간단하다. 강시를 눕혀 놓고 미간을 향해 묵야를 찔러 넣기만 하면 된다. 물론 해강비전을 끌어 올린 상태라야 한다.
달빛색으로 변한 묵야는 강시의 미간으로 파고들게 된다. 커다란 구멍이 남겠지만 이미 죽은 잔데 무슨 상관이 있을까.
미관상 보기 싫은 구멍은 바늘로 꿰매고 화장술로 꿰맨 자국을 지우면 된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환청이 그의 동작을 가로막은 것이다.
“나 귀신 같은 거 정말 싫거든?”
금장생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귀신이야. 죽은 지 몇 달 지난 시체와는 잠을 잘 수 있는데 귀신은 설사 처녀 귀신이라고 해도 함께 못 자. 그러니까 귀신이면 떠나고 사람이면 나타나.”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악몽도 잠잠해지는 것 같은데 그놈의 환청은…….”
금장생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묵야를 들어 올렸다. 제강을 했으니 이번엔 해강을 해야 할 차례였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여,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갈지어다! 탈혼!”
금장생은 나직하게 소리치고는 묵야를 힘껏 내리찍었다.
푸욱!
노란색을 띤 묵야의 끝이 강시의 미간으로 파고들어 갔다.
“끄아악!”
강시의 입이 쩍 벌어지고 거북살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펄쩍 뛰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드디어 해강돼 시체로 돌아간 거였다.
“휴우! 해강도 성공이네.”
금장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물러났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헉!”
그는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너 때문에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 나쁜 자식아.
―맞아, 너는 나쁜 놈이야.
―다시 죽일 거면서 살려 내는 이유는 또 뭐야.
“귀, 귀, 귀, 귀신?”
금장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얼굴은 겁에 질렸다.
―너 우리가 보여?
“아니, 안 보여.”
금장생은 고개를 격하게 내저었다.
―보, 보이는 것 같은데…….
“안 보인다니까!”
―크앙!
―크아아아!
“아악!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금장생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달려간 곳은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아니라 계단 옆벽이었다.
일부러 그곳으로 간 게 아니라 정신이 없어 방향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콰앙!
둔탁한 소성과 함께 금장생의 이마에서 피가 확 튀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천천히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