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6)
첫발은 악몽과 함께
금장생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유적기가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는 가신 줄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유적기 앞으로 앉으며 말했다.
“이것 때문에.”
유적기는 부목을 댄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무인들은 빨리 낫는다고 하던데.”
“양민들보다 빨리 낫기는 하지만 부러진 지 며칠 만에 붙지는 않지.”
사실 부러진 팔은 핑계일 뿐, 그녀가 떠나지 않은 건 확인할 게 있어서였다.
“그렇긴 하죠.”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냐?”
그녀가 의구심을 가진 건 그날 수흉 인도생을 없앨 때 보여 준 움직임 때문이었다.
그녀가 보기엔 그 당시 금장생에게는 총 네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인도생이 손에 잔뜩 실었던 내기를 거둘 때였고, 두 번째는 가슴을 주무를 때였고, 세 번째는 바지를 벗길 때, 네 번째는 자기 바지를 벗을 때다.
보통 무인은 첫 번째나 두 번째 공격을 하고 아주 신중한 사람이나 자객은 세 번째 바지를 벗길 때 공격을 감행한다.
바지를 벗길 때는 여자의 은밀한 부위에 시선이 고정돼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런데 금장생은 거기서 한 번 더 기다렸다.
그리고 인도생이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발을 빼기 위해 한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공격을 감행했다.
두 손은 바지춤을 잡은 채고, 중심은 한쪽 다리에 쏠려 있었다. 그 상태에서는 적의 기습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대처하기가 힘들다.
바지가 내려가고 한 발을 들어 올린 상태라 피할 수도 없고, 바지춤을 놓고 상체를 펴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유적기가 놀란 건 금장생은 그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알고 기다렸다는 점이다.
전에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인간 행동에 대해 장기간 연구를 한 자가 아니라면 결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금장생은 음식을 입안으로 쓸어 넣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배가 고팠다.
“그렇긴 하다만…….”
유적기는 할 말이 없었다.
“또 궁금한 거라도 있습니까.”
금장생은 유적기가 떠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쩌면 귀운자 이전에 쓰인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한 걸 발견하지 않았느냐?”
“특이한 거라면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이를테면 처음 보는 글이라든가, 처음 보는 물체를 말한다.”
“못 봤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유적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본인이 부정해 버리니 방법이 없었다.
“혹시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 주면 좋겠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찾는 물건이 중요한 겁니까?”
“국가의 운명이 걸린 거니까 중요한 거지.”
“국가요?”
“그렇다.”
“국가라면…….”
문득 유적기가 말한 국가가 명나라를 칭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도와줄 것도 아닌데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게 있다. 그리고…….”
유적기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금장생 앞에 놓았다. 백 냥짜리 전표 다섯 장이었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전표를 챙겼다.
“계산은 확실하구나.”
유적기는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는 절대 장사를 해서는 안 되거든요.”
“그렇구나. 아무튼 장사가 잘되기를 바라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뭐냐?”
“이름요?”
“나는 아직 네 이름을 모른다.”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랬다.”
“습관은 참 바꾸기 힘드네요.”
“습관?”
“그런 게 있습니다. 총관!”
금장생은 천야를 불렀다.
“네에!”
대답에 이어 잠시 후 천야가 안으로 들어왔다.
“장생입니다.”
“네?”
천야는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성은 장이고 이름은 생이란 말입니다. 제가 이름을 말씀 안 드렸죠?”
“그, 그랬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천야의 얼굴엔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역시 금장생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직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하려고 불렀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야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영업을 하려면 관을 짤 목재와 장례용품을 사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네.”
“필요한 금액이 얼마죠?”
“그건…….”
“가서 모두 오라고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천야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도두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관을 짜는 목재값은 어떻게 됩니까?”
“월 평균 예순 냥입니다.”
도패가 대답했다.
“장례용품은?”
금장생은 양대곤을 보며 물었다.
“백 냥입니다.”
“상여는?”
“마흔 냥입니다.”
“그럼 월 이백 냥이군요.”
“그렇습니다.”
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 개월 치를 구매하는 것보다 이 개월 치를 구매하는 게 더 싸겠죠?”
“이 개월 치를 사면 오 부를 더 할인해 줍니다.”
“일 할까지 깎아 보세요. 그리고 이건 오백 냥입니다.”
금장생은 조금 전 유적기로부터 받은 전표를 꺼내 탁자 한편에 놓았다.
“일 할을 할인받는다고 하면 백마흔 냥이 남습니다.”
“남길 게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월 이백 냥을 썼다면 앞으로는 이백쉰 냥을 쓰세요. 일 할을 할인받은 것까지 합치면 이백일흔다섯 냥이 되겠네요.”
“자재를 더 고급으로 쓰라는 말씀이십니까?”
천야가 물었다.
“맞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격은?”
“당연히 동결이죠.”
“가격은 동결하고 자재는 더 고급으로 사용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고급 자재를 쓰면서 가격을 올리면 의미가 없잖습니까. ‘정직, 성실, 신뢰, 정성. 저렴한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가 우리 사업장 사훈입니다. 크게 써서 대문에 붙여 놓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개업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부를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거래처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그들 역시 미래의 고객인데 우리가 개업했다는 걸 알아야지요. 인원은 총관이 뽑아 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개업식 때 돼지머리는 꼭 있어야 합니다.”
“돼지머리요?”
“삶은 돼지머리 말입니다. 활짝 웃는 놈으로 하나 사 오세요.”
“아, 알겠습니다.”
천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갔다.
“장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게냐?”
지금껏 지켜보던 유적기가 물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경험에서 우러나왔다고 보기엔 네가 너무 젊지 않으냐.”
“보고 배웠을 거라는 거군요.”
“아니냐?”
“둘 답니다.”
“경험도 많단 말이냐?”
“큰 사업체는 아니었지만 개업식을 여섯 번이나 했습니다.”
“경험이 많다는 말이구나.”
“여섯 번이면 적은 건 아니지요.”
“그래, 사업은 잘됐느냐?”
“잘됐으면 여섯 번이나 개업을 했을 리 없겠지요.”
“……!”
“육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망했습니다.”
“흡!”
유적기는 마시던 물을 토할 뻔했다.
설마 전부 망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무튼 그때 배운 게 있다면, 개업식 때 돼지머리는 반드시 올려야 한다는 겁니다.”
“크크크!”
유적기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그, 그런데 개업식 때 돼지머리를 쓰는 건 어디서 배운 거냐?”
개업식을 몇 번 쫓아다녔지만 돼지머리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선에서는 열에 아홉은 돼지머리를 올립니다.”
“조선에도 가 봤느냐?”
“네.”
“특이하구나.”
“세상은 젊어서 돌아봐야지 늙으면 힘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유적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자, 이제 배도 채웠고…….”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쉬었다가 가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숙박료는 받지 않을 테니까 편할 대로 하십시오.”
“고맙다.”
“그럼.”
금장생은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 이거요.”
천야가 다가와 보자기 하나를 내밀었다.
“뭡니까?”
“부엌에 두고 가신 것 같아서요.”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자기를 받았다.
“침실 가구는 다시 들여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럼.”
천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어디 보자.”
금장생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저기가 좋겠네.”
적당한 정자를 발견하고는 올라갔다.
그리고 보자기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비급은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첫 장을 넘겼다.
혈잔血殘
총 스물네 자루의 사아死牙를 던지는 무공이다.
“이름이 사아인가 보네.”
금장생은 붉은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다음을 읽었다.
던지는 방법은…….
구결은 상당히 길었다.
“말도 안 돼.”
구결을 전부 읽고 난 금장생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사아를 보았다.
분명 한 자루다. 그런데 공력을 주입하면 스물네 자루로 나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공력이 무려 오 갑자, 즉 삼백 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혈잔의 위력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흑우는 또 어떤 거짓말을 해 놨는지 볼까?”
흑우黑雨
총 일흔두 자루의 사아를 던지는 무공이다.
흑우가 펼쳐지면 모든 것이 핏물로 녹아내린다.
흑우를 펼치기 위한 최소 공력은 육 갑자다.
던지는 방법은…….
무망無望
총 백여덟 자루의 사아를 던지는 무공이다.
무망은 펼쳐지면 그걸로 끝이다. 살았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무망을 펼치기 위한 최소 공력은 십 갑자다.
던지는 방법은…….
“십 갑자라…….”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상상이 가지 않는 공력이었다.
“죽음을 부르는 이런 건 없애 버리는 게 나아. 물론 그 전에 전부 암기해야겠지.”
금장생은 맨 앞쪽부터 다시 읽었다.
처음엔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 위해 읽었다면 이번에는 암기하기 위해서였다.
세 초식을 전부 암기하는 데 걸린 시간은 반 시진이었다.
그는 토씨뿐만 아니라 점이 찍힌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암기했다. 아니, 이건 암기가 아니라 책을 그대로 베끼는 작업이었다.
암기가 끝나자 부싯돌을 꺼내 정자 아래쪽에 불을 피운 다음 미련 없이 비급을 올렸다. 가죽으로 만든 거라 그런지 불이 붙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무공 비급이 재가 되어 갈 무렵 천마구유이혼대법이 적힌 비급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