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3)
사장님이 되다
“에이!”
그는 손을 거칠게 털었다.
녀석도 다르지 않았다. 글씨와 시체 가루가 그랬던 것처럼 몸 내부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발 늦고 말았다. 부정형 물체는 그의 몸속으로 흡수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금장생은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바로 눈을 뜨고 일어났다.
“중독 증상이 없는 걸 보니 독은 아닌 모양이네.”
사실 모든 게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 설사 독이라고 해도 해독할 방법도 없었다.
“붙으라는 여자는 안 붙고 이상한 것들만.”
손뼉을 탁탁 치고는 장포를 벗었다. 그리고 마물 검 세 자루가 들어 있는 검집을 찼다. 그런 다음 벗어 두었던 장포를 걸치고 무공 비급 두 개를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동굴을 둘러보았다. 혹시 빠트린 게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저걸…….”
이윽고 그의 시선이 벽에 달려 있는 등에 고정되었다.
“너라도 얻어 가야겠다.”
금장생은 손을 뻗었다.
등은 벽에 박혀 있었는데, 마치 낫을 세워 손잡이 부분을 박아 놓은 것 같았다. 낫 목에 해당하는 부분을 잡고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강한 힘으로 잡아당겼음에도 불구하고 등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디!”
이번에는 전 체중을 실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에 못이 박혀도 이 정도 힘이면 약간은 흔들리는데 등은 미세한 흔들림도 없었다.
“어떻게 박아 놓았기에…….”
벽에 박힌 부분을 보았다.
“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벽에 붙어 있는 부분은 평평했다. 즉, 쉽게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바보! 쉽게 떨어질 것 같으면 천 년 이상 붙어 있을 수가 없잖아. 아무튼 머리 하고는.”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으으!”
그때 어디선가 신음이 들려왔다.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또다시 신음이 들려왔다.
“누군가 싸우다가 떨어진 모양이네.”
그는 동굴을 나왔다.
이곳에서 누가 죽건 누가 귀운자가 남긴 무기를 발견하건,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협곡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는 다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으으!”
한 식경 정도를 갔을까. 또다시 신음이 들려왔다.
금장생은 걸음을 멈췄다.
“만일 내 앞에 쓰러져 있으면 구해 줘야 하는데…….”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좌우를 살폈다. 다른 길이 있으면 돌아가고 싶은데, 불행히도 없었다.
“여차하면…….”
그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붉은색 검 손잡이를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쓰러진 자 앞에 도착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상태로 쓰러져 있는 자는 무극 유적기였다.
금장생은 잔득 경계하며 유적기 앞으로 갔다.
위에서 떨어진 듯 유적기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나이를 먹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유적기는 생각보다 젊었다.
사십 대 후반은 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물론 오십이 넘어도 주름이 없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에는 느낌이라는 게 있는데, 금장생의 생각에 유적기는 아무리 많이 쳐준다고 해도 이십 대 후반이나 삼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썹도 엄청 기네. ……어?”
금장생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지금 이곳은 상당히 어두워 사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볼 수가 없다. 물론 가까이 다가가면 볼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눈과 유적기의 얼굴은 최소한 한 자 반 넘게 떨어져 있다.
그런데 얼굴 주름은 물론이고 눈썹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아까 먹은 그것 때문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몇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몸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건 용 형상의 버섯을 먹은 것뿐이다.
“운이 좋았네.”
눈이 좋아진 걸 보면 몸에 좋은 게 분명한 듯했다.
“당신도 그렇고.”
금장생은 유적기를 들쳐 업었다.
이곳에서 행운을 얻었으니까, 유적기에게 조금만 나눠 주기로 했다.
“얼레?”
유적기를 들쳐 업은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처음 들어왔던 곳에서 옷을 벗은 유적기를 보았다. 그런데 그때 본 유적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새 사람이 바뀌었나?”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하고 걸음을 옮겼다.
길도 모르는 상태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작정 협곡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휙!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위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금장생은 얼른 협곡의 측면 움푹 들어간 곳으로 붙었다.
잠시 후 검은 옷을 걸친 자가 이편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돌겠네.’
금장생은 어이가 없었다.
검은 옷을 걸친 자와의 거리는 십여 장. 그런데 얼굴이 보였다.
검은 옷 사내는 사흉 중 한 명이었다.
“수흉獸兇 인도생.”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날 공격한 자다.”
등 뒤에서 유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절한 거 아니었어요?”
“방금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인도생을 아느냐?”
“모릅니다.”
“조금 전 말한 이름은 뭐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겁니다.”
“처리할 자신은 있느냐?”
“당연히 없지요.”
“그럼 무기 같은 건 있느냐?”
“이게 있습니다.”
금장생은 품속에서 검은색 검을 꺼냈다.
“그건…….”
“장신군데, 검과 같은 재질로 만들었습니다.”
“암기처럼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던질 수 있겠습니까?”
“던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저보고 던지라고요?”
“그렇다.”
“저자가 내가 던진 돌멩이에 맞아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돌멩이?”
“무인들에게는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제게는 돌멩이 이상이 될 수가 없지요.”
“그렇구나. 하지만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그건 무기로 변한다.”
“힘을 합친다는 건 무슨 뜻이죠?”
“내가 네게 내공을 주입하면 한 번의 공격을 할 수 있다.”
“지금 내공 운용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내공 운용을 못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느냐?”
“제가 이곳에 떨어진 건 악교교의 공격 때문이었습니다.”
“악교교도 들어왔느냐?”
“가장 먼저 들어와서 목욕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게 아니라 두 번째겠지.”
“두 번째요?”
“첫 번째는 너 아니냐.”
“그렇군요.”
“그런데 그녀가 왜 널 죽이려고 했다는 거냐?”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얼굴을 보였다는 게 죽일 이유가 되는지 말입니다.”
“그녀의 얼굴을 봤다는 거냐?”
“옷과 복면을 벗은 건 그녀지 제가 벗긴 게 아닙니다.”
“때로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죽여서 입을 봉한다는 살인멸구殺人滅口란 말이 왜 생겨났겠느냐?”
“그럼 할 말 없고요. 그보다 직접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지금 나는 오른팔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네가 해야 한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죠?”
“나를 공격한 자가 인도생이다.”
“둘 다 죽는다는 거군요.”
“그렇다.”
“내공은 얼마나 유지됩니까?”
“주입하고 난 후 반 각 안에 공격을 끝내야 한다.”
“반 각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만일 내가 당신을 내려 두고 도망가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날 구해 주지 않겠다는 거냐?”
“우린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 주면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겠느냐?”
“늘 그렇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돈이지요.”
“도, 돈을 달라는 거냐?”
유적기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이 다급한 와중에 돈을 달라고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제 말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 말인데, 저도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정말로 돈을 달라는 거냐?”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가족이고 두 번째가 돈입니다. 그리고 꿈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세는 겁니다. 돈을 옮길 때 오는 그 쾌감은 정말…….”
‘이 자식?’
유적기의 눈이 커졌다.
이야기를 하면서 몸까지 떠는 걸 보면 결코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뭐 이런 녀석이…….’
“이제 곧 인도생이 우리 시야에 들어올 겁니다.”
“어, 얼마면 되겠느냐?”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나는 체질입니다.”
“오백 냥이면 되겠느냐?”
“그 정도로는…….”
“내가 가진 전부다.”
“그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내공을 밀어 넣어 주십시오.”
금장생은 유적기를 내려놓고 앞으로 앉았다.
“……?”
유적기는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사람은 내공을 전이받을 때 앞으로 가서 가부좌해야 한다는 걸 모른다. 그런데 이 사내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십 장 남았습니다.”
“아, 알았다.”
유적기는 금장생의 명문혈에 양손 손바닥을 대고 내기를 주입했다.
내기는 빠르게 금장생 내부로 들어갔다.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라.”
내기 주입을 끝낸 유적기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금장생은 검을 갈무리하고 유적기를 안았다.
그리고 뒤편으로 걸어가며 좌우를 살폈다.
“저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바위 하나를 별견하고 유적기를 기대앉혔다.
“어떻게 하려는 거냐?”
유적기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내공을 전이받았다고 하지만 상대는 사흉입니다. 정면 대결로 없앤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그렇긴 하다만…….”
“최대한 그자의 시선을 끌어 보십시오.”
“내가 무슨 수로 시선을 끈다는 거냐?”
“그의 시선을 끌지 못하면 죽는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휙!
금장생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삼 장 높이까지 솟구친 그는 절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싸움을 해 본 사람인 건 맞는데…….’
숨는 걸 보면 경험이 많은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감지가 가능한 숨소리가 문제였다.
저벅! 저벅!
바로 그때, 앞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유적기의 시선이 전면을 향했다.
아무리 기척을 잘 감춘다고 해도 상대는 악인무림의 최강자 중 한 명인 수흉. 그런 자의 시선을 어떻게 잡아 두느냐 하는 게 관건이다.
‘천생 그 수밖에 없는 건가?’
유적기는 위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응?’
유적기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사내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문득 사내가 자신을 도울 이유가 없다고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아냐,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어.’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 있었구나, 유적기.”
살기 어린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유적기는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인도생이 이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 듯, 걸음걸이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있는 거냐, 아니면…….’
눈으로는 인도생을 보고 있지만 모든 신경은 위쪽으로 향해 있었다. 여전히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유적기는 금장생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는 척하면서 장포와 상의 앞섶을 한꺼번에 열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요대 앞쪽의 장식을 돌렸다.
스스스!
바람에 먼지가 쓸리는 듯한 소리가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앗!”
유적기의 입에서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응?”
유적기를 주시하던 인도생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