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2)
그리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금장생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보약을 좀 먹든지 해야지 먹는 게 너무 부실한 것……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벽면에 새겨 있던 이상한 글씨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머릿속으로 뭔가가 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금장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건 꿈도 아니고…….’
그는 손바닥으로 조금 전 글씨가 씌어 있던 벽을 만져 보았다. 언제 글이 새겨져 있었냐는 듯 매끈했다.
‘기절하겠네.’
지금도 분명 글이 사라지고 있는데 벽이 매끈하다니. 무슨 사술을 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이상한 글씨는 완전하게 사라졌다.
‘내가 뭔가를 풀어낸 건가?’
그는 다시 벽면을 보았다.
“여기다!”
그때 악교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악교교 앞에 검은 공간이 자리해 있었다.
“어떻게 발견한 겁니까?”
그는 의자에서 내려와 악교교가 있는 곳으로 가며 물었다.
“이것저것 만지다가 우연히 열게 됐다.”
“그랬군요. 이번에도 내가 앞장설까요?”
“당연한 걸 묻는구나.”
“그렇군요.”
금장생은 검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석실 안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밖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조금 전 석실로 들어왔을 때처럼 다리가 놓여 있었다.
금장생은 망설임 없이 다리로 발을 내디뎠다.
“헉!”
그의 눈이 커졌다.
발이 다리를 딛지 못하고 푹 꺼져 버린 것이다.
발이 쑥 꺼지긴 했지만 다리는 지금도 여전히 있었다.
“지, 진식?”
손을 휘젓던 그는 떨어지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악교교의 발목을 간신히 잡았다.
“다행히 살았네요.”
금장생은 악교교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악교교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내 알몸값은 네 목숨보다는 훨씬 비싸다.”
휙!
악교교는 오른발을 사정없이 뿌리쳤다.
휙!
금장생은 악교교의 발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그는 추락했다.
악교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곧 금장생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시체 한 구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시체는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데, 등 쪽에 동굴 형태의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제법 커 보이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천수십병을 찾았는데 굳이 네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악교교는 시체 앞으로 갔다.
그리고 발로 밀었다.
천수만장 귀운자로 보이는 시체는 조금 전 금장생이 떨어졌던 협곡으로 추락했다.
시체가 치워지자 일부만 보이던 동굴이 전부 드러났다.
악교교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이럴 수가…….”
악교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천수십병이 들어 있을 거라 확신했던 상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상자와 협곡 아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아아악!”
악교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참, 그 여자 독하네.”
금장생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본의가 아니었지만 알몸을 본 게 미안해서 길까지 안내해 주었다. 성격을 보건대 고맙다는 말을 할 것 같지도 않아서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죽이려고 할 줄이야.
“아무리 내 사주팔자에 여자가 없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네.”
금장생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하나도 다치지 않은 건 다리에서 오 장 정도 아래쪽에 선반 형태로 튀어나온 바위 덕분이었다.
그 공간을 발견하자마자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재주를 넘었다.
몇 군데 찰과상을 입은 것 같기는 하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올라가면 또 공격해 올 테니까…….”
금장생은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바로 그때 악교교의 비명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골이 났을 때 내지르는 소리가 분명했다.
“고거 쌤통이다.”
금장생은 히죽 웃었다.
악교교가 본심을 드러낸 건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쁨의 환성이 아닌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른다는 건 성급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걸 뜻한다.
“다시는 도와줄 마음 없습니다.”
금장생은 아래로 내려갔다.
귀운자의 무덤에 대한 호기심은 들어온 자들이 전부 나가고 나서 해결할 참이었다.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바닥에 다다랐다.
그의 예상대로 바닥까지의 깊이는 이십오 장가량이었다. 협곡 바닥은 폭이 오 장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좁았다.
금장생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십 장 아래 지하고 빛이 들어올 틈이 없는데도 사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무튼 여자하고 엮여서 잘된 적이 없어.”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여긴…….”
금장생은 의아했다.
그가 가고 있는 이곳은 망산이다. 수십 장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는 협곡 바닥을 따라 걸었다.
바닥에 이끼가 낀 듯, 약간 푹신했다.
한 식경 정도를 걸었을까. 오른편에 동굴이 나타났다.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동굴은 상당히 깊었다. 그런데 안쪽이 다른 곳보다 더 밝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석실이었다. 아니, 동굴을 석실로 꾸민 공간이었다.
불빛의 근원지는 석실 가장 안쪽이었다.
금장생은 그곳을 향해 갔다.
“같은 거네.”
귀운자가 글을 남겼던 석실에서 보았던 특이한 등이 이곳에도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시체가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시체는 상당히 덩치가 컸다. 똑바로 선다면 칠 척(210센티미터)이 넘을 것 같았다.
“의자의 주인인 모양이네.”
죽은 지 상당히 오래된 듯 거의 목내이 상태였다.
“습도가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목내이가 됐다는 건 생전에 엄청난 고수였다는 걸 뜻한다고 했는데…….”
금장생은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쪼르르!
문득 배에서 특유의 소리가 났다. 배가 심하게 고플 때 간혹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이 와중에 배가 신호를 보내다니, 참.”
그는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손을 내린 그는 시체 주위를 살폈다. 뭔가 남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
배에서 공연히 신호를 보낸 게 아니었다.
시체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냄새가 났다. 그 때문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 모양이었다.
“이 속에 뭔가가 있다는 건데…….”
금장생은 조심스럽게 시체의 옷을 젖혔다.
풀썩!
하지만 그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옷이 가루로 부서지면서 유골도 가루가 돼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재수가 영……. 이건 그 여자 때문이 분명해.”
운이 없는 걸 공연히 악교교 탓으로 돌렸다.
“그래도…….”
혹시 몰라 수북하게 쌓인 가루를 들춰 보았다.
그러자 그 앞에 버섯 하나가 나타났다. 조금 전에 맡은 냄새의 근원지였다.
“무슨 버섯이 용처럼 생겼……. 아이고, 급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금장생의 눈에는 마치 용이 멀리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뭐에 홀린 것처럼 입을 먼저 가져가 용 모양의 버섯을 흡입했다.
입안으로 들어간 버섯은 금세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이건 또 뭐야?”
그가 삼킨 건 버섯뿐만이 아니었다. 버섯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뭔가도 함께 삼켜 버렸다.
“윽!”
갑자기 강한 통증이 배에서 느껴졌다.
“이거 잘못 주워 먹은 거 아냐?”
금장생은 공연히 걱정이 됐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반응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아니었네.”
이내 피식 웃었다. 포만감이 느껴지는 것 말고는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
다시 가루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손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가루 속에서는 세 가지가 나왔다. 장신구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검이 들어 있는 검집과 책 두 권이었다.
먼저 검집을 살폈다.
한 뼘 길이의 검 세 자루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검집은 끈이 달려 있었는데, 길이는 상당히 길어 자신이 원하는 어떤 부위에라도 착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검 한 자루를 꺼냈다. 검은 피처럼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장신구가 아니었네.”
검을 보는 순간 피의 강이 흐르는 잔혹한 광경이 그려졌다.
한 뼘밖에 되지 않는 그것은 장신구가 아니라 마물이었다.
이어 나머지 두 자루를 다 꺼냈다.
하나는 먹물처럼 검었고 나머지 하나는 유리처럼 투명했다.
그것들 역시 느낌은 붉은 검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대박이네.”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그가 두 번째로 집어 든 건 두 권의 책자 중 한 권이었다.
책의 재질은 양피지였다. 기름 먹인 가죽으로 만들어서인 듯, 사람이 가루가 될 정도로 오랜 세월 방치됐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했다.
그것은 무공 비급이었다.
안에는 무공 세 초식이 적혀 있었다.
초식명은 각각 혈잔血殘, 흑우黑雨, 무망無望이었다.
“비수의 색과 같네.”
싱긋 웃고는 비급을 챙겼다. 그리고 다른 책을 들었다.
“천마구유이혼대법天魔九幽易魂大法?”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얼른 책장을 넘겼다.
“헐!”
금장생은 어이가 없었다.
천마구유이혼대법은 다름 아닌 강시대법이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천마구유이혼대법을 바라보았다.
망루를 운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수중으로 들어온 강시대법.
문득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랄.”
그는 몸을 벅벅 긁으면서 일어났다.
갑자기 온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썩은 걸 먹은 건가?”
조금 전 얼결에 먹은 용 모양의 버섯이 잘못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연히 걱정스러웠다.
몸을 옮기려던 금장생은 발로 가루를 쓸어 냈다. 혹시 뭔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창!
느닷없이 맑은 소리가 가루 속에서 흘러나왔다.
금장생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가루를 치웠다.
“끙!”
그는 손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렸다.
가루를 맨손으로 만지는 순간 손끝을 타고 뭔가가 급속도로 몸 내부로 유입되는 게 느껴졌다. 조금 전 석실에서 글씨를 흡수할 때와 같은 증상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 가루를 치웠다.
잠시 후 그의 눈에 투명한 물체가 잡혔다.
아니, 투명하다는 건 금장생의 생각일 뿐이고 구체적으로 이거다 하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특이한 물건이었다. 굳이 말로 하자면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는 부정형이 가장 정확할 것 같았다.
“뭐냐, 넌?”
이번에는 감히 손으로 만지지 못했다.
게다가 녀석에게서는 쇳소리 비슷한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놔두고 가는 것도……. 일단 가져가지 뭐.”
금장생은 물을 받는 것처럼 부정형의 물체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