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0)
천수총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을 정도로 악교교의 목욕은 빨리 끝났다. 목욕을 하기보다는 몸에 묻은 뭔가를 씻어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욕조에서 나온 악교교는 밖에 두었던 옷도 물에 넣고 헹궜다.
쪼그려 앉은 채 상체를 숙여 옷을 헹구는 모습이 그렇게 선정적일 수가 없었다.
옷을 다 헹군 악교교는 재빨리 입고 복면을 썼다. 그리고 조각상 옆을 살폈다.
쿠웅!
그녀가 들어왔던 곳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흥!”
악교교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가는 방향은 금장생이 숨어 있는 쪽이었다.
‘이쪽이 아냐! 저기로 가라고!’
금장생은 내심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통하지 않았다.
작은 구덩이를 발견한 악교교는 몸을 돌려 납작 엎드리더니 다리부터 안으로 들이밀었다.
‘억!’
자리를 잡고 옆자리를 본 악교교의 눈이 커졌다. 상당한 덩치의 사내가 납작 엎드린 채 무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기를 끌어 올렸다. 함께 온 자가 없으니 안으로 들어온 자는 전부 적이었다.
막 손을 내치려는데 ‘저기.’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교교의 시선이 저절로 금장생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아주 절묘한 순간 이루어진 행동이라 악교교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금장생이 가리킨 곳은 무덤 안쪽이었다.
휙! 휙휙!
순간 네 사람이 뛰어들어 왔다.
“저기 물이 있다.”
네 명은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악교교가 그랬던 것처럼 옷을 훌훌 벗고 욕조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다음 과정은 악교교와 같았다.
“……!”
악교교는 기이한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몸에서 풍기는 기세로 판단하건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가 분명하다. 그런데 너무 태연하다.
―봤어?
악교교는 전음으로 물었다.
그녀가 생략한 말을 덧붙이면 ‘내가 알몸으로 몸을 씻는 걸 보았느냐?’일 것이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 악교교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렸다.
“……?”
악교교는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하는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두 사람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노인 네 명은 몸을 씻고 물에 헹군 옷을 입고 있었다.
휙!
그들이 막 움직이려고 하는데 두 명이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한 명은 창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맨손이었다.
노인 네 명은 긴장한 얼굴로 방금 들어온 자를 보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누구냐?”
“이야기는 다음에 합시다.”
두 사람은 옷을 입은 채 욕조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물속에 들어가서는 머리까지 전부 담그고 그다음엔 몸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가 붉은 머리 중년인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옷을 벗어 물속에 넣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입은 후 욕조 밖으로 나왔다.
“혹시 적룡과 무극이오?”
네 노인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렇소. 혹시 네 분은 사흉四兇이란 별호로 불리시는 분 아니오?”
불그스름한 머리카락의 중년인이 말했다.
‘사흉?’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중원무림에 무림십패가 있다면 악인무림에는 악인십패가 있다. 여기서 악인무림은 임의로 붙인 거지 중원무림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은 아니다.
아무튼 악인십패는 이마사악사흉二魔四惡四兇이라 불렀고, 그들 중 사흉이 노인들이었다.
금장생은 그들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바로 옆에 엎드려 있는 악교교도 그렇고, 사흉 중 한 명이 언급한 적룡과 무극은 적룡 철전혼과 무극 유적기로 무림십패 중 두 명이다. 이름 모를 무덤으로 들어오기엔 명성이 너무 쟁쟁하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 뭔가 있다는 건데?”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 악교교를 보았다.
마침 악교교도 금장생을 보고 있었던 듯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긴 누구 무덤입니까?”
휙!
금장생이 묻자 악교교는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에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속삭이는 것 정도는…….”
턱!
그래도 금장생이 입을 닫지 않자 제 손으로 금장생의 입을 막았다.
―…….
‘헉!’
‘조용히 해라!’라고 전음을 보내려던 악교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공이 모아지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에는 무공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내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설마 저 물에…….’
그녀의 시선이 욕조로 향했다.
“저자들도 마찬가질 테니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금장생은 무덤 내부에 있는 여섯 명을 턱으로 가리켰다.
“뭐가 마찬가지란 거지?”
악교교는 손을 내리며 물었다.
“이 안으로 들어온 일곱 명은 전부 같은 통로를 통해 왔고, 들어오자마자 욕조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건 곧 물로 씻어 내지 않으면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어떤 물질이 피부에 묻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마침 무덤 안쪽에 물이 있는 겁니다.”
휙!
바로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먼저 온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새로 들어온 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섬서성에서 온 맹운성이오.”
“섬서비검?”
적룡 철전혼이 말했다.
섬서비검 맹운성은 섬서성과 하남성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자였다.
“그렇소이다, 성주.”
맹운성은 철전혼을 향해 다시 포권을 취했다.
“어서 물에 들어가시오.”
“나는 적린사赤燐沙를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성주. 적린사는…….”
화르르!
느닷없이 맹운성의 몸에서 불길이 일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맹운성의 전신을 덮었다.
“아악!”
맹운성은 비명을 내지르며 욕조를 향해 달렸다.
불길은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크아악!”
달리던 맹운성이 우뚝 멈췄다.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불길에 휩싸여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풀썩!
어느 순간 힘을 잃고 쓰러졌다. 이미 절명한 듯, 비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불길이 잦아들었다.
퍼억!
둔탁한 소성과 함께 맹운성의 신형이 가루로 부서졌다.
“무섭네.”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왜 알몸이 되는 걸 괘념치 않고 물로 뛰어드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쯧! 물로 뛰어들라고 했거늘.”
철전혼은 혀를 찼다.
이어 사흉을 보고 물었다.
“어디로 갈 거요?”
여섯 개의 석실 중 어느 석실을 선택할 건지를 묻는 말이었다.
“우린 무실로 갈 생각인데, 성주는 어디로 갈 거요.”
“그럼 나는 천실로 가지요.”
“나는 약실로 가겠소.”
철전혼에 이어 유적기가 대답했다.
“집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소?”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렇지. 그럼 다음에 봅시다.”
사흉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들은 천실과 약실을 제외한 나머지 석실 앞으로 갔다. 잠시 동안 석실 문을 살피다가, 기관 장치 같은 게 보이지 않자 손바닥을 대고 밀었다.
그르릉!
석실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석문은 중앙을 축으로 회전하는 방식으로 열게 돼 있었다.
석문이 열렸지만 바로 들어간 자들은 없었다.
모두 한편으로 비켜선 채 상황을 주시했다. 혹시 암기 같은 게 날아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사흉 네 사람은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에 이어 철전혼과 유적기도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백 년 전 사람인 천수만장天手滿匠 귀운자의 무덤이 이 안에 있다.”
“네?”
금장생은 악교교를 보았다.
“아까 누구 무덤이냐 물었잖아.”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별호만 보면 장인 같은데, 그가 특별한 보물이라도 만들었습니까?”
“그는 병기를 만드는 건 물론이고 수집하는 걸 광적으로 좋아했는데, 평생을 걸쳐 만들고 수집한 것 중에 열 가지를 일컬어 천수십병天手十兵이라 하였다. 하지만 천수십병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 무덤 속으로 가져갔다는 거군요.”
“나는 물론이고 이곳에 온 이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걸 얻으러 왔다는 거군요.”
“그렇다.”
“그럼 다른 자들이 가져가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는 어떻게 할 참이냐?”
“보실寶室이 있다면 모를까, 무기에는 관심 없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보물?”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
“그럼 여긴 도굴을 하기 위해 들어온 거냐?”
“도굴요?”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그게 아니라면 무덤에 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으냐?”
“산책 나왔다가 무인들을 피해서 들어온 곳이 여기일 뿐, 도굴하기 위해 온 건 아닙니다.”
“공동묘지로 산책을 나왔다는 거냐?”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들리겠네요. 하지만 산 아래쪽이 집이라서요.”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특이한…….”
“으악!”
“아악!”
석실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악교교는 흠칫 놀란 얼굴로 석실로 시선을 주었다.
사실 그녀가 선뜻 움직이지 못한 것은 사라진 내공 때문이었다. 내공도 없이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조금 기다리더라도 내공을 회복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함정이 설치돼 있는 모양이네요.”
금장생은 엉금엉금 기어 밖으로 나갔다.
“욕심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악교교가 따라 나오며 물었다.
“욕심이 없다고 했지 호기심까지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금장생은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바로 앞까지 가서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닿는 위치는 조각상의 다리 사이였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악교교의 목소리에 짜증스러움이 묻어났다.
금장생이 더듬는 부위가 조각상의 은밀한 부위였던 것이다.
“비밀은 보통 만지기를 꺼리는 부위에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꺼리는 부위라고?”
악교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네. 아! 이건 것 같네요.”
금장생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가 만지고 있는 건 조각상의 고환이었다. 조각상이고 옷을 입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고환 형태로 조각돼 있었다.
“정말로…….”
그르릉!
악교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조각상 다리 사이에서 공간이 드러났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가실까요?”
금장생은 상체를 약간 숙이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선두를 양보하겠다는 뜻이었다.
“네가 앞장서라.”
악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금장생은 악교교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나는 늘 존대를 하는데 소저는 말이 짧네요. 원래 그리 싸가지가 바닥입니까?”
“이놈이!”
악교교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싸가지가 바닥일 뿐 아니라 머리까지 나쁜 모양이군요.”
“정녕 죽고 싶어서…….”
급기야 악교교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바로 옆에 있는 금장생도 알아차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