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9)
금장생은 책상에 쌓여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장례를 포함한 가정의 예법을 기록한 책으로, 총 열 권이다. 그중에는 주자가례도 있다.
상조업을 하려면 저 책을 전부 봐야 한다.
아니, 책을 보는 건 문제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책과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먹고살아야 한다면 씹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봐야 한다.
지금 금장생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상조업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거다.
그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향했다.
오른편에는 단이 하나 있고 그 단 위에는 은자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금장생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답답할 때 금장생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은자나 금자를 보고 있으면 짜증스러웠던 기분이 가을 하늘처럼 청명해진다.
“문제는 말이야, 내가 사장님이 되기로 결정을 하는 순간 너희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거야.”
금장생이 쉽사리 결정을 못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금장생의 생활신조는 ‘한번 수중으로 들어온 돈은 절대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다.’였다.
그런데 돈을 내돌려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혹자는 그 돈을 써서 더 큰 돈을 벌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럼 금장생은 이렇게 받아친다.
너는 지금 가지고 있는 명품을 팔고 새로운 명품을 사느냐고.
그럼 상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랬다.
금장생에게 돈은 다른 이들이 큰돈을 들여 수집하는 수집품이나 같았다.
“투자 없는 수입은 절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도둑질도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이다.
물론 아버지의 지론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게다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일 년 전만 해도 황상은 상당히 이름난 업체였지만 지금은 장상문과 천당사에 손님을 전부 빼앗긴 상황이다.
떠나간 손님을 다시 오게 하는 건 집 나간 마누라를 찾아오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데 다시 정상적인 영업을 할 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황금전가가 그대로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수중의 돈은 그대로 두고 아버지께 빌리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비빌 언덕이 사라진 상황.
게다가 일천이백 냥에는 그의 인생 팔 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젠장!”
금장생은 욕설을 뱉어 내고는 한편에 놓아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천야가 작성한 사업 계획서였다.
맨 위에 사장이 있고 그 아래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총관, 그리고 관 담당, 물품 담당, 상여 담당, 무덤 담당 등 기본 인원만 해도 육십여 명에 달했다.
일인당 다섯 냥에서 열 냥의 월급을 지불한다고 봤을 때 매월 인건비만 삼백 냥에서 육백 냥까지 나간다.
“왜 이걸 구입해 가지고는…….”
금장생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훌훌 털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묘하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했다.
“우선…….”
금장생은 책상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그 줄은 총관 천야의 방에 있는 방울과 이어져 있다.
잠시 후 천야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천야는 차를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왜 나죠?”
“네?”
“왜 내가 사장이 되기를 바라냐는 질문입니다.”
“솔직한 답을 원하십니까?”
“네.”
“첫째는 공대 때문이었습니다.”
“공대요?”
“사장님은 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공대를 하고 계십니다. 처음엔 공대를 하다가도 주종 관계가 되면 말투부터 바뀌는 사람이 많은데 사장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공대를 하는 건 인간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습관이라서 그런 겁니다.”
천야에게는 습관이라고 하였지만 엄밀하게 말하지만 아버지의 세뇌다.
말이 트이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게 바로 존댓말이다.
장사꾼이 상대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이기 때문에 반드시 존댓말을 써야 한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 대상은 어린 아이 구분이 없고, 장소도 가려서는 안 된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고객이 되고, 오늘 시장에서 만났던 사람이 내일 우리 가게 손님으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늘 공손해야 한다.
금장생의 아버지는 자식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말을 하고 또 했다.
그런 말을 듣고 자라다 보니 누군가에게 ―설사 금장생보다 어린 사람이라고 해도― 반말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천야에게 후한 점수를 받은 모양이었다.
“습관이건 일부러 그랬건, 누군가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건 좋은 인상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게 전붑니까?”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뭡니까?”
“저는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햇수로 오십 년입니다. 그런 곳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이곳을 운영해 주기만 한다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거군요.”
“네.”
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알고 싶은 게 있습니까?”
“사업 계획서에 보면 운구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던데, 누가 하는 겁니까?”
“많은 돈을 주고 몇 달씩 걸리는 먼 곳에서 운구를 해 올 정도면 대단한 집안이라고 봐야 하고, 운구 도중 시체에 문제가 생기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질 수 있는 분이 가야 합니다.”
“사장이 직접 해야 한다는 거네요.”
“제가 몇몇 문주님을 겪어 본 결과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알았습니다.”
“돈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천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업 자체가 돈이잖습니까. 그리고 한번 발을 들이게 되면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가 않고요.”
“그렇긴 하죠.”
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모쪼록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기를 바랍니다.”
천야는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에라, 잠이나 자자.”
금장생은 침실로 갔다.
하지만 침대로 들어가 누워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결국 그는 다시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혼자 정원을 거닐던 그는 북망산으로 길을 잡았다. 망루에서 북망산까지 거리는 삼백 장 정도였다.
묘지들로 가득한 곳에 이르자 싸늘한 기운이 옷깃으로 파고들었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살면서 내가 배운 건 죽은 자는 절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시체는 절대 사람을 해치지 못하거든. 하지만 귀신은…….”
금장생은 진저리 치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장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정말 싫어.”
금장생은 무덤 사이를 걸었다.
비석이 있는 것도 있고, 이름 없는 무덤도 있었다.
문득 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덤을 조성하는 자의 형편에 따라 규모가 다르긴 하지만 무덤 속에 들어앉은 자는 자기 집이 큰지 작은지 알지 못한다.
비석이 있으면 어떠하고, 없으면 어떠할까.
또 비석이 쓰러지고 무덤이 허물어진들 죽은 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휘익!
상층부 어디선가 바람 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그쪽으로 향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무덤은 조금씩 규모가 커졌다.
그러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정상 근처에는 능으로 불러도 충분할 정도의 무덤들이 즐비했다. 어떤 무덤은 입구에 문까지 있었다.
스윽!
느닷없이 검은 그림자 하나가 무덤 근처에서 어른거렸다.
“끙!”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무덤밖에 없는 이곳에 있을 사람은 열에 아홉은 무인이다. 그런 자들과 엮여 봐야 좋을 게 없다.
금장생은 조용히 자리를 이동했다.
휘이익!
그 순간 날카로운 소성이 뒤편에서 들려왔다.
‘이크!’
금장생의 동작이 빨라졌다. 그는 빠르게 달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커다란 무덤 쪽이었다. 뒤쪽에서 몸을 날려 오는 자 때문에 망루 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무덤의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측면으로 바싹 붙었다.
그가 숨은 곳은 달을 등지는 곳이라 다른 곳보다 어두웠다. 벽에 밀착해서 서자 그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응?’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벽에 밀착한 상태면 발뒤축도 벽에 닿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마치 공간이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는 발을 안쪽으로 더 밀어 보았다.
“공간이네.”
토굴인지 아니면 무너져서 생긴 곳인지 모르지만 공간의 높이는 한 자가 조금 넘는 것 같았다.
휘익!
휘파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금장생은 천천히 엎드렸다. 벽에 밀착해 서 있는 것만으로는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상태에서 뒤로 움직여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도굴꾼들이 뚫은 토굴이네.’
허리 정도 갔을 때 구멍이 아래로 향했다.
경사는 상당히 가팔랐지만 측면이 계단 형식으로 돼 있어 내려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좁은 게 내려가기가 더 편했다.
팔과 엉덩이로 몸을 지탱하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토굴은 생각보다 깊었다. 거의 십 장 정도를 내려가자 바닥에 도착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시 토굴의 입구와 비슷했다.
금장생은 엎드린 채로 무덤 안을 살폈다.
십 장 깊이의 땅속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내부는 밝았다. 고관대작의 무덤인 듯 내부도 상당히 넓었다.
안쪽 벽에는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자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 키가 이 장(6미터)에 달했다.
조각상 우측에는 세 개의 석문이 있고 문 위쪽에는 각각 천실天室, 지실地室, 인실人室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왼편 역시 세 개의 석실이 있었는데 각각 병실兵室, 무실武室, 약실藥室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인인가, 아니면 장군? 어쩌면 보물이 있을지도.’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귀를 쫑긋 새우고 내부를 살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 누군가 오기 전에…….’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얼른 숨을 멈췄다.
휙!
조각상 정면에서 검은색 무복을 입고 복면을 쓴 자가 달려왔다.
“급하다.”
복면인은 곧바로 조각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누가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옷을 벗어 던졌다.
‘어?’
금장생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놀랍게도 복면인은 여자였다. 그런데 드러난 몸매가 엄청났다.
천장의 야명주가 빛을 잃을 정도로 폭발적인 염기를 뿌려 댔다.
상의와 하의를 훌러덩 벗은 여자는 마지막으로 복면을 벗었다.
‘헐!’
금장생은 내심 탄성을 내뱉었다.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와 달리 얼굴은 꿈에 나타날까 겁이 날 정도로 추악했다. 거리가 조금 있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화상을 입었을 때 보이는 흉터가 전 얼굴을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추면서시醜面西施?”
문득 별호 하나가 떠올랐다.
몸매는 중원 제일인데 얼굴은 중원 최악이라고 했다.
최고와 최악 두 가지를 가진 불행한 여자가 추면서시 악교교였다.
많은 사내들이 그렇듯, 몸매가 중원 최강이라는 소문을 듣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추면서시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들이 확인한 건 아름다운 몸매가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이었다. 추면서시를 찾아갔던 자들 중 살아온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몇 년 동안 그런 일이 계속되자 세인들은 추면서시 악교교를 무림십패 다음 서열로 놓았다.
그리고 ‘무림십패 중 한 명과 붙기만 하면 그녀는 언제든지 그 자리를 차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저기에 욕조가 있을 줄은 몰랐네.’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추면서시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온몸을 벅벅 문질러 씻었다.
‘어젯밤에 좋은 꿈을 꾼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행운을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참는 거 하나는 자신 있지.’
금장생은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악교교의 알몸을 샅샅이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