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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200화 (완결) (200/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200화

평소에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던 천일염이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혈교주를 도발하자, 혈교주는 코웃음을 쳤다.

“과거의 너와 같다라…… 참으로 어리석구나. 인도자님의 명을 따르는 내가 한낱 너와 같을 리 없잖느냐. 아니면, 13년 전, 그날의 일이라도 떠올랐나 보지?”

도발에는 도발로 맞대응하겠다는 듯 혈교주가 천일염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래, 그날 일도 포함해서 말한 거다. 과오를 범하고도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깨닫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혈교주의 의도와는 다르게 천일염은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답했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 이젠 다르지. 이제는 설화가 내게 남긴 것을 알거든.”

습관처럼 삿갓을 매만지려던 천일염은 삿갓을 벗고 왔다는 걸 깨닫고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이내 당기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지. 매제. 약속했던 대로 부탁하네.”

속전속결로 끝내기로 한 이상, 시간을 더 끌려줄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천일염이 당기룡에게 틈을 벌어줄 걸 요구하자, 당기룡은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당가의 은원은 당가가 풀어야 하는 법. 형님께 손 벌릴 것 없이 내 선에서 끝내주마.”

당기룡이 시간이 끌 생각이 아니라 아예 쓰러뜨리겠다는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겠다고 각오를 다지자, 그걸 보던 당소예는 비웃음을 흘렸다.

“뭐 대단한 게 나올 것처럼 말하더니 나서는 건 고작 당가주더냐? 제집 식구 하나 관리 못 해 겨우 자리를 보전하는 덜떨어진 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리 위풍당당하게 나서는지 모르겠군.”

“그럼 겪어보면 알겠구나.”

혈교주의 도발을 한마디로 일축한 당기룡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팔을 휘두르자 쏟아지는 수백 개가 넘는 암기들.

단순히 비수나 장침뿐만 아니라 자모환이나 곤 같은 각양각색의 암기가 사방을 점하며 오직 단 한 점을 향해 날아갔다.

“초장부터 만천화우라니…… 당가주가 완전히 작정했군.”

“태평하게 감탄하지 말고 일단 자리부터 피하세! 상황을 보아하니 눈먼 암기에 스치기라도 했다간 영락없이 삼도천을 건너게 될 거요!”

당기룡이 전조도 없이 당가 최고의 비기로 불리는 만천화우를 쓰자, 주변에 있는 청성파와 아미파의 무인들은 혼비백산하며 자리를 피했다.

하나, 막상 만천화우의 표적이 된 혈교주는 태연하기 짝에 없었다.

“이제는 내가 어디 소속이었는지도 잊은 것이냐? 아니면, 겨우 이 정도 공격을 막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냐?”

다른 이라면 몰라도 당소예는 당가의 2장로였던 인물이다.

만천화우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암기에 어떤 독이 묻어 있는지까지 모두 파악했기에 가소롭다는 얼굴로 혈옥을 꺼내 들었다.

“암기는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독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허용하지 않는 게 최고의 상대법이지. 멈춰라!”

당소예가 힘찬 기합과 함께 손을 뻗자, 갑자기 잘 날아가던 암기들이 공중에서 멈춰 섰고.

잠시 뒤, 힘을 잃고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만천화우가 고작 손짓 한 번에?”

“역시 혈교에 붙는 건 맞는 선택이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독왕이 펼친 만천화우를 손짓 한 번으로 막아내는 경이로운 광경에 사람들이 기함을 토해내었고, 동시에 독왕이 크게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예상과 달리, 막상 공격이 막힌 당사자인 당기룡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땅을 박찼다.

“예상한 바다!”

한 가문의 가주라는 자가 정말 막힐지도 모르고 만천화우를 펼쳤겠는가.

당연히 막히는 것까지 예상해서 공격을 펼친 거였고, 그 이유는 거리를 좁힐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당소예가 만천화우에 한눈 팔린 사이, 당기룡은 조금씩 거리를 좁히다가, 만천화우가 막힌 순간.

땅을 박차며 자색으로 물든 독수를 뻗었다.

“가소롭구나!”

하나, 그걸 예상한 건 당소예도 마찬가지.

당기룡을 도발하며 바보 취급했지만, 반평생 당기룡과 얼굴 맞대며 살아온 당소예인 만큼 뭔가 수작을 부릴 거라 예상했다.

-쿵!

당소예가 허리를 굽혀 당기룡의 독수를 피하는 동시에 당기룡의 옆구리에 장을 꽂았다.

간결하면서도 내력이 집중된 당소예의 장에 얻어맞은 당기룡이 공중에 붕 떠 저만치 날아갔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슬며시 미소를 짓자, 이상함을 느낀 당소예는 얼마 가지 않아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완전히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어깨를 살짝 베고 지나갔나…… 아니, 설마 이건 무형지독?!’

당소예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당기룡의 독수가 얇게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한데, 거기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독기.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온몸에 빠르게 퍼지는 동시에 몸을 부숴가는 이름 모를 극독에 당소예는 직감했다.

이게 오직 당가주만이 다룰 수 있는 ‘무형지독’이라고 말이다.

‘제독하긴 늦었다. 몸을 재구축하는 수밖에…….’

위기감을 느낀 당소예가 혈옥을 쥔 채 정신을 집중하자, 한계를 넘기지 못한 혈옥이 깨지듯 비산했고.

당소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재빠르게 다음 혈옥을 꺼내 들며 무형지독을 막아내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하하하…… 설마하니 이렇게 쉽게 될 줄이야. 어떠냐? 오랜만에 맛보는 독의 맛이. 진정한 무형지독은 아니어도 이 정도면 꽤나 먹을 만하지 않더냐?”

당소예가 고전하는 걸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는 당기룡.

아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옆구리를 내준 만큼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웃음을 실실 흘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천일염은 당기룡이 벌어준 기회를 날리지 않기 위해 곧장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떠올리자. 그날의 마음을.’

신공이란 마음의 무공.

마음이 없는 자가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감정이 없기에 쉽게 익혔지만, 비로소 감정을 되찾아야 완성되는 것.

그것이 신화문의 절세신공.

색유였다.

‘지키지 못했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 슬픔을. 대가 없이 받은 친애를.’

색바랜 회색 세상 속에서 되찾은 색들.

그 과거를 하나둘 떠올린 천일염이 옅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랬었지. 지키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은 적이었다.”

왼손에 쥔 백암중검이 매서운 바람처럼 패도적인 기세를 흘리며 날카롭게 울어댔다.

“할 수 없던 이해를 갈구하던 건 청이었다.”

파혈무갑을 낀 오른손은 수화를 하듯 바삐 움직였고.

넘실대며 흘러나간 실들은 서로를 옭아매며 포근한 나선을 그렸다.

“바라 마지않던 친애를 갈망한 건 녹이었으니…….”

그 나선 위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백암중검을 올려서 호를 그리게 한 천일염이 자신 또한 입가에 호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내 세상은 언제나 화사했구나.”

말을 마친 천일염이 기를 한껏 머금은 백암중검을 내려치자, 호를 그리던 천잠사의 다발이 반으로 갈라졌다.

-팡!

이어서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진 천잠사의 다발이 넓게 퍼지더니 이내 제각기 다른 색을 그리며 혈교주에게로 날아갔다.

“와아…….”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무공에 주변인들은 절로 감탄을 내뱉었다.

하나, 직접 상대하는 혈교주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 무슨…… 격이 다른 공격이란 말인가.’

물경 수천에 이르는 천잠사 다발들.

숫자 자체는 당기룡이 펼쳤던 만천화우와 비슷했지만, 그 하나하나에 담긴 기예가 격이 달랐다.

천일염의 손을 떠난 어떤 실은 장침과 같이 꼿꼿하게 서서 매섭게 내리꽂혔다.

반면에, 어떤 실은 바람을 타는지 궤적을 읽을 수조차 없었고.

어떤 실은 하늘과 같은 색이라 제대로 식별하기도 어려웠으며.

어떤 실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오해할 만큼 자신과 같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제길, 방금 혈옥을 쓴 것만 아니었어도 전부 밀어버리면 그만인데…….’

파악할 수 없는 공격을 막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내는 방법이었다.

한데, 혈교주는 당기룡을 상대하던 탓에 애매한 힘이 담긴 혈옥만 들고 있었고, 새 혈옥을 꺼내기엔 시간이 안 맞았다.

그 점을 천일염도 눈치챘을까.

형형색색의 천잠사 속에서 한 줄기 빛살이 되어 나아간 천일염이 백암중검을 역수로 든 채 혈교주의 명치에 틀어박았다.

“커억…….”

천일염이 반응할 틈도 안 준 채 검을 찔러 넣자, 손을 덜덜 떨면서도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는 혈교주.

그녀에겐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기에 동귀어진이라도 노릴 생각으로 손을 움직였다.

한데, 갑자기 공중에 떠 있던 수천 개에 달하는 실이 당소예의 온몸을 찌르며 갈기갈기 분쇄해 버렸고.

혈교주는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한 줌의 흙이 되었다.

“혀, 혈교주가 단번에…….”

인도자를 제외하곤 상대할 자가 없다고 생각한.

실제로 태천검과 비등하게 겨루던 혈교주가 단 일 합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반대로 당가의 사람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펼쳤다.

“혈교주가 죽었다! 나머지 놈들은 별거 없으니 단번에 쓸어버려라!”

“인의를 저버리고 혈교에 붙은 저 배신자들을 조져 버려!”

우두머리와 그의 오른팔을 잡았으니 이긴 싸움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가 측 인원들이 기세등등하게 혈교 무리에 달려들었으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꽤나 거하게 해줬군.”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한 혈교 측의 인파를 가르고 나타나는 한 인영.

오만하기 짝에 없는 얼굴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앞으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멀쩡한 모습의 인도자였다.

“인도자…… 어떻게 멀쩡하게 돌아온 거지?”

“죽을 놈에게 그걸 일일이 설명해 줄 이유가 있을까?”

인도자가 허공에 손을 비틀자, 그에 따라 기괴하게 꺾이는 몸.

“크아악!”

보이지 않는 거력에 몸이 꺾여선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이자, 천일염이 튀어 나가 인도자를 공격하려 했다.

“벌레 주제에 기어오르지 마라!”

인도자는 천일염이 발을 떼기 무섭게 달려들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압도적인 힘으로 천일염을 찍어 눌렀다.

“아까 빌어먹을 자아 때문에 한 수 허용했다고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것 같은데, 분수를 알고 달려들어라. 네놈 같은 벌레들은 닿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그걸 아는 놈이 아버지껜 곧이곧대로 당해줬나 보지?”

“같잖은 도발은 집어치워라. 네놈은 그냥 거기 처박힌 채 내가 당지천을 집어삼키고, 무림을 집어삼킨 뒤 중원까지 모두. 남기지 않고 집어삼키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된다.”

“하하하…….”

“뭐가 웃기지?”

“고작 나를 이겼다고 다 이긴 것처럼 굴지 마라. 지천이는 나보다 더 빨리, 더 멀리. 올곧게 나아간 아이다.”

남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간 이는 누구보다 빠르게 나아가겠지만,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 없다.

신화문의.

천일염의 무공이 딱 그러했는데, 그와 반대로 당지천은 처음부터 개척자였다.

“무공을 깨우치기 이전부터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던 아이다. 그러니 지금쯤 나보다 몇 수는 앞서 나가 있을 텐데, 뭐어? 지천이를 집어삼켜? 네놈 따위가? 하하하!”

“…….”

천일염의 광포하기 짝에 없는 웃음에 얼굴을 굳힌 인도자는 이내 화를 참지 못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 기도 밀어내지 못해 땅바닥에 박혀 있는 주제에 도발을 감행해? 좋다. 내 친히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너를 되살려 당지천과 골육상쟁하게 만든 다음, 그놈의 육신을 직접 뜯어먹게 해주마!”

인도자가 손을 뻗자, 주변의 혈교도들이 녹아내림과 동시에 천일염을 향해 쏟아지는 거대한 기운.

조금 전, 혈교주를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힘으로, 이제는 여타 기술을 사용할 생각도 없이 순수한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생각인 듯했다.

그렇기에 천일염 또한 기운을 끌어모아 최대한 버티려고 했다.

하나, 천일염은 갑자기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한 인영을 느끼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삼촌. 이제는 제가 상대할 테니 쉬세요.”

자신을 찍어 누르던 힘이 증발하듯 사라짐과 동시에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뒤를 돌아본 천일염은 그곳에 자신이 고대하던 존재가 서 있는 걸 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오냐.”

* * *

“오냐.”

인도자의 기운을 대신 받자, 짧은 답을 마친 삼촌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내색하진 않았어도 색유를 쓰면서 상당히 기를 많이 소모했을 테고, 인도자의 기운을 버티기엔 꽤나 지친 상태였을 테니 말이다.

“네놈…… 어째서 멀쩡한 것이냐? 한낱 미물 따위가 버틸 만한 힘이 아닌데…….”

“왜긴 왜겠어. 이 정도 얄팍한 기운은 우스우니까 그렇지.”

“이 기운이 우습다라…… 네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아무것도. 그냥 좀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야.”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몸을 던졌던 궁래십점호에서 최고의 독을 만들던 와중 몇 번이고 생각한 게 있었다.

과연 최고의 독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유해성이 높고 반응할 수 없는 작용 기전으로 상대를 중독시키는 그런 독일까?

아니면, 무림의 법도에 따라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독기를 머금어 알고도 못 막는 그런 독을 말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그 어느 하나 쉬이 대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당가의 비전이 왜 만류귀원신공인지를 생각해 보면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지.’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독공의 원리는 독을 흡수함으로써 기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독공의 원리는 독을 섭취하고, 수복과 적응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단련하는 것.

그게 진짜 독공의 원리였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독은 어떤 상황에도 상대를 중독시킬 수 있는.

상황에 맞는 독으로 변할 수 있는 물질이야말로 최고의 독이었다.

[진정한 독은 무게를 가지지 않았다.

진정한 독은 한낱 물질 따위가 아니었다.

진정한 독은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정한 독은 작용 기전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진정한 독을 무형지독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 무엇으로도 느낄 수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붙잡지 못하고.

그 무엇으로도 쉽게 변질되는.

한 송이의 눈꽃처럼 쉽게 바스러지는 것.

그것이 무형지독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느낄 수 있으며.

그런데도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그런데도 누구도 변질시키지 못하는.

만년한철조차 무른 철로 보이게 하는 단단함을 가진 것.

그것이 무형지독이다.]

그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는 옛날옛적에 읽었던 무형지독의 구결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진정한 무형지독이 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일찍 알아차렸다면,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진 않았을 텐데…….’

모든 걸 이해하고 나니 새삼스레 아쉬운 마음.

그간 당가의 선조들이 남겨둔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나니 눈앞의 인도자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고, 잘만 했으면 내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복수라도 해서 되갚아 드려야지.’

한탄해 봤자 되돌릴 수 없는 일.

이제 와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기에 삼촌이 쥐여주신 무형비를 꺼내 들었다.

“한낱 미물 주제에 깨달음을 얻었다라…… 하하, 참으로 무섭구나.”

“괜히 말 늘이지 말고 잡설은 거기까지 하자. 피차 길게도 끌었잖아. 긴말할 거 없이 끝내자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인도자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매끄럽게 독을 발출하는 기예를 선보이는 동시에.

손가락을 튕겨 무형비를 날렸다.

“좋다. 넓은 마음으로 네놈에게 짧은 생이나마 삶을 허락하려 했건만 스스로 내친다면 내 기꺼이…….”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멈춘 인도자는 핼쑥한 안색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고풍스러운 장식이 조각된 반투명한 비수가 꽂혀 있었다.

“……어, 언제? 아, 아니…… 어떻게?”

죽어도 죽지 않는 만큼 비수가 하나 꽂혔다고 해서 당황할 것 없는 인도자.

그런 인도자가 당황하는 건 내가 비수를 꽂은 부위가 바로 인도자의 마지막 목숨.

혼옥이 숨겨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그거야 뻔하지 않아? 최후의 최후까지 쥐어짜인 놈이 원상태로 돌아오려면 그만한 게 있어야지 않겠어?”

할아버지께서 쥐어짤 대로 쥐어짠 놈이 멀쩡한 모습으로 왔다.

그렇다면 숨겨놓은 수를 꺼냈다고 누구라도 예상하지 않겠는가.

“아, 안 돼! 내 원대한 야망이…… 이, 이렇게 허무하게…….”

“시끄러워. 자식아.”

“…….”

혼옥이 뚫려 몸이 붕괴하기 시작한 인도자가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가는 동안 자꾸 시끄러운 소리를 내길래 발구름을 굴러 흩날려 버리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혈교도들 대다수는 끈 풀린 인형처럼 멈춰 선 탓에 그랬고.

청성파와 아미파의 고수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느라 한참 동안 말을 잊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인도자가…… 저리 허무하게?”

“사형, 일이 그른 것 같습니다. 얼른 도망칩시다.”

충격을 받아 멍하니 멈춰 선 사람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도망치려는 인원들.

나는 그들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일부러 앞을 가로막으며 기운을 담은 채 말했다.

“은혜는 갑절로, 원한은 곱절로. 그것이 당가의 무훈이다.”

“…….”

“내 친히 너희를 도륙내기 위해서라면 웃는 얼굴로 삼도천이라도 건너고, 염라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원한을 갚으마. 그러니…….”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이제껏 쌓여온 울분을 터뜨리듯.

또, 바스러진 가원들의 영혼을 대변하듯 그들을 향해 외쳤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봐라!”

* * *

당가가 혈교도와의 혈전을 치른 지 어언 3년.

혈교의 주세력이 당가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자, 세력이 빠르게 와해되었고, 3년이나 지난 지금은 빠르게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 이곳.

당가의 장원에서는 막 혼인식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독제 당지천 대협과 지화 남궁예화의 혼인이라니…… 이거 남궁세가에서 완전히 땡잡았군.”

“맞네, 고작 혼례 한 번으로 빙궁에, 신화문에, 황실까지 등에 업다니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황실? 황실은 왜?”

“자네 모르는가? 독제가 혈교에 고통받는 양민들을 구해내었다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공로를 치하하시며 독제에 대한 공격은 본인에 대한 공격으로 취급하겠다고 선언하셨잖는가.”

“그건 안다만, 천하제일인이 독제인데, 누가 독제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태천검조차 이기지 못한 인도자를 손짓 한 번으로 해치우고, 물경 수만에 이르는 혈교도들을 한 줌의 독무로 해치우는 그 독제를 대체 누가?”

“이 사람 보게? 그걸 황제 폐하께서 모르시겠는가? 당연히 얼굴마담 좀 해달라고 한 거고,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선언한 거와 다름없는 걸세. 그러니 독제의 처가인 남궁세가에도 혜택이 있을 걸세.”

“허어…… 그런 거군.”

“잠깐, 그러고 보니 태천검과 독제에 관련된 후사가 있는데 말이야…….”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만큼 여기저기 입방아에 오르는 당지천.

멀찍이서 손님들이 떠드는 광경을 쳐다보던 당지천은 문득, 혈교와 싸우던 3년 전 일이 떠오르자, 다녀올 곳이 생겼다.

“부인,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소?”

“어머님께 가시려고요? 다녀오세요. 가가.”

“고맙소.”

긴말하지 않아도 당지천이 어떤 걸 원하는지 알아챈 남궁예화가 미소 지으며 다녀오라고 하자, 당지천은 감사와 함께 대기 장소를 나섰다.

“설화에게 가려는 것이냐?”

“예, 삼촌도 같이 가실래요?”

“아니, 난 아까 다녀왔으니 됐다. 사람들 눈에 띄면 잡힐 게 분명하니까 문도들에게 길을 터놓으라고 지시하마.”

“감사합니다. 삼촌.”

당지천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이자, 천일염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당지천을 보내줬다.

“이만 가봐라.”

* * *

신화문도들이 길을 터놓은 탓일까.

사람 인기척 하나 없이 편히 발걸음을 옮긴 당지천은 화원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 당가 한쪽에 작게 마련된 천설화의 무덤으로 향할 수 있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절 받으시죠.”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절부터 한 당지천이 예를 다 표하고 나서 천설화의 비석 앞에 앉으며 말했다.

“어머니.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니 덕분에 이 못난 아들이 혼례를 치르게 됐습니다. 원래는 오늘 혼례가 끝나고…….”

그렇게 하염없이 시작된 이야기.

3년 전, 혈교와의 싸움이 끝날을 때부터 당지천은 천설화의 비석을 방문할 때면 마음속에 담아놨던 짐을 한 보따리씩 내려놓듯 길게 풀어냈다.

“……해서 문득 찾아왔습니다만,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혼례 날 색시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최대한 말을 줄이고 줄인 당지천이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매번 말하지만, 어머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마친 당지천이 헌화를 하고 돌아서자, 어서 가보라 듯 당지천의 등 뒤에서 볼이 스치는 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당지천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예, 어서 가볼게요.”

그렇게 당지천이 떠난 천설화의 묘 위에는.

언제나처럼 네 송이의 개미취가 올려져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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