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9화
인도자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혈교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하자, 가까스로 유지되던 전선은 순식간에 뒤로 밀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뚫어라! 인도자님의 지엄하신 명령이다!”
“독 지대에 몸을 던져서 제독해라!”
목숨을 도외시한 채 이뤄지는 혈교도들의 맹공.
아무리 시간을 끌 목적으로 독과 암기를 뿌려댔다고 한들, 아예 죽을 생각으로 달려드는 혈교도들의 파도 앞에선 한낱 조약돌에 지나지 않았다.
“후퇴! 후퇴하라! 모두 만독연으로 들어가라!”
“흑룡대는 후퇴를 엄호하라!”
가히 자연재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공격에 당가의 인원들은 전선을 포기했고, 이전에 계획된 대로 만독연으로 후퇴했다.
“제가 마지막입니다! 문 닫겠습니다!”
“흑룡대주는?”
“혈교가 노리는 게 소가주님이라 추격해 오진 않을 테니, 외부에서 시간을 끈 뒤 소개하겠답니다!”
“알았다. 문을 닫아라.”
-끼이이익.
당기룡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인들이 문을 밀자, 만독연의 정문이 굉음을 내며 움직였다.
오래 버티진 못할 걸 알아도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을 거란 판단에 열심히 문을 밀었고, 그렇게 만독연의 정문이 닫히려던 순간.
갑자기 외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형! 잠시만요! 저 들어갈게요!”
혈교도가 있는 전방이 아닌 대장간이 있는 좌측에서 달려오는 한 무인.
품에 고풍스러운 목함을 끌어안은 채 필사적으로 달려온 무인은 문이 닫히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만독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헤엑, 헤엑…… 아이고, 감사합니다. 죽는 줄 알았네.”
“아니, 분명 혈교도들이 몰려온다고 대피하라고 했는데 왜 이쪽으로 온 거지?”
“지천이에게…… 지천이에게 줄 암기가 이제 막 완성돼서 직접 들고 왔습니다.”
“그깟 암기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 위험한 짓을…….”
아무리 당가의 생명이 독과 암기라고 한들, 이미 비축분을 충분히 쌓아놓은 터라, 목숨을 걸고 가져올 정도로 중요하진 않았다.
그래서 당기룡이 천일절을 타박하려던 찰나.
천일절이 가져온 목함을 열어 보였다.
“아…….”
목함이 열리고 내용물을 보이자마자 당기룡은 탄식을 흘렸다.
오색빛으로 영롱한 자태를 흘리는 보석 같은 비수.
그러면서도 눈과 감각을 어지럽히는 신묘함이 깃든 비수는 한눈에 봐도 뛰어난 장인이 혼을 담아낸 물건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 전 찾아온 손님분의 도움으로 만든 비수. 무형비입니다. 재료도 재료지만, 시간이 없어서 딱 하나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걸…… 지천이에게 준다고?”
기능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았음에도 귀물임을 알 만한 빼어난 물건이었다.
한데, 이 귀한 걸 당지천에게 준다니 당지천을 사랑하는 당기룡마저도 한순간 질투가 날 정도였다.
“예, 지천이를 위해 만든 물건이고, 지천만이 제대로 쓸 수 있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바로 전해주러 가려고 합니다. 매형께서도 같이 가시죠.”
“…….”
천일절의 같이 가자는 말에 당기룡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천일절의 등을 떠밀었다.
“너 혼자 가거라.”
“예? 저 혼자요?”
“만독연으로 후퇴한 건 전선의 축소와 보급의 용이함 때문이다. 저 문짝은 발목 잡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통짜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천독림의 문과 다르게 만독연의 대문은 백련정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반각은커녕, 진짜 잠깐.
혈교 측 고수가 와서 뚫는, 그 잠깐의 시간을 버는 용도였다.
“그러니 난 여길 지키마. 내려가서 형님께 안부 전해 드려라.”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천일절이 말이 많아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당기룡의 굳센 얼굴을 본 순간, 어떤 결심을 했는지 알았기에 굳은 얼굴로 옅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독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사람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
“낯간지러운 안부는 됐다. 그런 건 딱 질색이거든.”
소리 한 점 없이.
또, 기척 하나 없이 나타난 흑색 일복의 무인.
당기룡은 신경이 극도로 서 있는 상황임에도 뒤를 잡혀서 당황한 채 뒤를 돌아봤는데,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당기룡의 눈앞에 있던 건, 평소에 쓰던 삿갓을 벗은 채.
어딘가 유하고 둥글둥글해진 천일염이었기에.
“형님…… 삿갓을 벗으신 겁니까?”
“거치적거려서 두고 왔다.”
“…….”
천일염이 대답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자, 입을 다무는 당기룡.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은은하면서도 자연스레 짓누르는 기운도 기운이었지만, 천일염이 저리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일절아. 그게 네 역작이더냐? 정말 잘 만들었구나.”
“……감사합니다. 형님.”
“아까 전 천독림에서 거대한 기의 응집이 느껴지더구나. 곧 있으면 지천이가 나올 것 같으니 너는 어서 가서 그걸 전해줄 준비를 해라.”
“…….”
당기룡과 마찬가지로 천일절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어벙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자, 천일염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뭐 하느냐. 어서 가지 않고?”
“예? 예!”
천일염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천일절이 무형비를 품에 꼭 쥔 채 천독림으로 향했다.
그러자, 때마침 문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콰앙! 콰앙!
무언가가 문 너머에서 연이어 폭발하는 듯한 폭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거대한 통짜 철문이 진동했고, 그와 동시에 조금씩 찌그러졌다.
“설마 저 녀석들, 문짝에 대고도 자폭하고 있는 거야?”
“이 무슨 해괴망측한 전략이란 말인가…….”
원래부터 오래 버틸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수를 부를 그 잠깐이 아쉬워서 문짝에 몸을 내던질 줄은 몰랐기에 다들 부랴부랴 진을 짜며 만독연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본 천일염은 천천히 자신의 무구를 꺼내 착용했고, 주변에서 대기하던 신화문도들은 천일염이 파혈무갑을 착용하는 걸 보고 재빠르게 몰려와 부복했다.
“부문주 외 72명. 집결 완료했습니다.”
이전부터 당지천의 호위를 맞던 암혈대는 물론이고, 중원 곳곳에 퍼져 있던 지부에서 조장급 인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가히 신화문의 전력이라고 불러도 모자람 없는 이들.
천일염은 묵묵히 그들을 내려보다가 나지막이 부문주를 불렀다.
“육십구호.”
“하명하십시오.”
“지금부터 신화문은 혈교와 총력전을 벌일 거다. 여기 있는 대다수는, 아니, 어쩌면 전부 다 죽을 수도 있다.”
-콰앙! 콰앙!
시끄럽게 문을 쳐대는 소리에 잠시 말을 멈춘 천일염이 문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나, 명심해라. 나는 너희에게 죽음을 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저들과 같이 불필요하게 목숨을 내던질 필요는 없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육십구호. 아버지께선 어떻게 되셨지?”
“인도자를 단기간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먼지로 화하셨습니다.”
“역시 그러셨나…….”
육십구호의 대답을 들은 천일염은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감상적인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날이 선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혈교주는 내가 맡는다. 잔챙이들을 정리해.”
“존명.”
천일염의 명령이 내려지자, 문도들이 순식간에 산개해 곳곳에 자리 잡았다.
그걸 본 천일염은 고개를 돌려 당기룡에게 말했다.
“매제. 도움이 필요해.”
“어떤 도움을 말씀하는 겁니까?”
“내가 홀로 혈교주를 상대할 순 있긴 하나, 오래 걸릴 게 분명하고, 그동안 이쪽에서 입는 피해는 막심할 거다. 하니,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게 잠시 틈을 벌어줘.”
“……합공을 하자는 이야기입니까? 저는 괜찮습니다만, 형님께선 괜찮으십니까?”
무인이 합공을 한다는 것.
그것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에 굉장히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당기룡은 홀로 혈교주를 이길 수 있을 천일염이 이런 제안을 해오는 것에 의아해했다.
“난 한 명의 무인이기 전에 가족이다.”
단 한 마디.
긴말할 필요 없다는 듯, 딱 한 마디로 답변한 천일염이 자신의 백암중검까지 단단히 결속하자, 당기룡이 작은 감동을 받은 동시에 조금은 염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시다면 좋습니다만…… 혈교 측에서도 합공해 올 경우 어떻게 합니까? 청성파와 아미파의 장로도 있잖습니까.”
“그쪽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신경 꺼라.”
당기룡이 속전속결에 염려를 나타내자, 잠자코 있던 남궁공자와 남궁호자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맹에서 온갖 똥폼은 다 잡더니 막상 까고 보니 인의를 저버린 녀석들이다. 정파이면서 정도를 벗어났으니 저들은 우리의 은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상대할 거다.”
“형님 말이 지당합니다. 저희의 은원은 저희가 씻어야죠.”
말을 마친 남궁공자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탁주를 한 사발 들이켜자, 원로들까지 나섰다.
“되살아난 시체들은 우리가 맡겠소. 가주는 가주의 일을 하시오.”
“맞소. 정 밀린다 싶으면 당가의 무인답게 헛되이 죽지 않을 터이니 믿고 맡기시오…… 물론, 후대에 내 고귀한 희생을 알리는 것은 잊지 마시오.”
“……거 개소리는 관짝에 들어가서 좀 하지?”
“감사합니다.”
다소 잔망스럽지만, 어떻게든 상황을 도와주겠다는 원로들의 지지에 당기룡은 옅게 고개를 숙였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때마침 들려오는 거대한 폭음.
이제는 만독연의 문을 아예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려는지 만독연 전체가 진동할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
“후…….”
그 폭음을 들은 당기룡이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한 번 내뱉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며 읊조렸다.
“갑시다. 가문을 등진 것도 모자라, 내 아들을 노리는 배신자의 목을 따러.”
* * *
만독연의 문이 부서짐과 동시에 혈교도들이 해일이 닥치듯 밀려들었다.
“목숨을 바쳐서 뚫어라!”
“이교도를 밀어내라!”
이지를 상실한 채 서로 얽히고설킨 대로 그대로 밀고 들어오는 혈교도들.
목숨을 도외시한 채로 만독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그들 하나하나가 아까까지만 해도 당가에 있어선 큰 위협이었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암혈대는 길을 열어라.”
“존명.”
천일염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암혈대원들이 오른손을 휘둘러 실을 풀었고, 이어서 왼손의 검을 이용해 서로의 실을 하나의 진으로 엮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
“해(解).”
암혈대원들이 일시에 오른손을 까딱이자, 얽혔던 실들이 풀어짐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뿌려져 문을 가로막은 혈교도들을 전부 도륙해 냈다.
“갑시다.”
한순간 막혀 있던 혈이 뚫리자, 방어에 치중하던 당가 측 고수들이 일시에 뛰쳐나가 저마다의 상대를 찾아갔고, 미리 약속되었던 대로 천일염과 당기룡은 혈교주에게로 뛰쳐 갔다.
“쥐새끼처럼 꽁꽁 숨어 있던 녀석들이 궁지에 몰리니 튀어나왔구나. 한데, 그런 주제 꽤 자신만만한 얼굴이구나.”
“잊고 있던 모든 걸 떠올렸으니 그럴 수밖에.”
“잊고 있던 거라…… 뭐, 좋은 추억이라도 떠올렸나 보지?”
모두가 땅을 디디고 있음에도 홀로 하늘 위에서 고고히 내려다보는 혈교주.
인도자가 없으니 자기가 왕 행세라도 하려는 건지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천일염과 당기룡을 도발해 오자, 천일염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암, 그렇고말고. 참 좋은 추억이었지.”
천고천의 조언을 듣고 천일염이 잊고 있던 걸 깨달았을 때.
천일염은 개파조사를 제외한 역대 무정검들이 왜 색유를 완전히 익히지 못했는지.
왜 자신이 색유를 익히지 못했었는지 깨달았다.
‘신공은 마음의 무공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뻔하디 뻔한 말.
답은 거기에 있었다.
‘마음이 없어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펼칠 수 없고, 결국엔 모든 건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
무릇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라면 입문할 적에 익히 들었지만, 완숙해져 있을 땐, 이미 잊었던 말.
잊었던 추억과 빛바랜 감정을 떠올린 천일염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기에 지금 눈앞의 혈교주가 가소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과거의 내가 딱 너와 같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속 없던 놈이었던 걸 깨달았거든.”
그녀에게선 과거의 자신.
목적을 위해 감정을 제거했던 무정검 십칠호의 모습이 비쳤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