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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96화 (196/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6화

당지천이 천독림에 들어가 궁래심접호에 몸을 담근 그 시각.

당지천의 뒤를 따라온 천일염은 천독림의 입구 앞에서 호법을 섰다.

‘천독림 안에서 호법을 서고 싶으나, 그럴 수 없으니 이게 최선이겠지. 그래도 삐익이가 같이 있으니 안전은 보장될 거다.’

마음 같아선 천독림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당가의 직계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천열임이 할 수 있는 건 같이 들어간 삐익이를 믿고, 입구를 지키는 일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혈교지. 당장 오늘 쳐들어와도 모자란 녀석들이니 살수들을 보내 지천이를 노릴 수도 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혈교가 당가를 노린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혈교에서 살수를 보내 요인을 암살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고, 당지천이 안휘에서 보여준 활약을 생각해 본다면 그 대상은 당지천일 게 분명했다.

‘안휘에서 혈교가 입은 피해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확한 피해추산이 불가능하니 대처하는 게 맞다.’

온다는 확신은 없었다.

하나, 손 놓고 있다가는 당할 수도 있었기에 천일염이 피적을 불러 신화문도들을 소집하려던 찰나.

천고천이 다가와 피적을 부는 걸 막았다.

“내가 같이 호법을 서마. 그러니 그건 내려놓으려무나.”

“…….”

“너희 애들은 안 그래도 바쁘잖냐. 척살조를 막아낸다고 한들, 혈교에 밀리면 결국엔 본말전도다.”

“그렇긴 합니다만, 하나…….”

천고천의 설득에도 천일염이 피적을 내려놓길 망설이고 있자, 천고천이 장난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필시 인도자란 녀석이 와도 충분히 막아내실 걸 압니다.”

“한데, 왜 그러는 것이냐?”

“저는 약합니다.”

“약하다니? 네가? 아니, 듣자 하니 색유도 깨우친 녀석이 뭐가 약하다는 거냐? 혈교주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누구든 막아낼 수 있잖느냐.”

“막을 수 없는 자가 있다는 것부터가 약하다는 말입니다. 애초에 색유도 모두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천일염이 씁쓸함을 한껏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슬픔 어린 눈으로 신세를 한탄했다.

“저는 지천이에게 공감해 줄 수도, 이해해 줄 수도 없습니다. 한데, 제대로 지켜줄 수조차 없으니 뭐라도 하려면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에라도 눈물이 넘칠 것만 같은 천일염의 두 눈.

차마 무정검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어색하기 짝에 없는 천일염의 모습에 천고천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나를 깨우쳤을 때, 비슷한 녀석 다섯을 잡았다. 그럼 둘을 깨우친 지금은 혈교주도 잡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셋을 깨우치면 인도자도 잡을 테니 셋을 깨우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깨달음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진작에 했을 거다.

라는 눈으로 천일염이 천고천을 쳐다보자, 천고천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깨끗한 설원에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홀로 발자국을 새기며 자신만의 길을 만드는 것이다. 한데, 네가 하는 일은 개척이 아니라 언젠가 네가 남겼던 발자국을, 그 자취를 따라 걷는 일이다. 그저 잊고 있던 걸 떠올리는 것뿐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리 어려운 일만도 아니다.”

“…….”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받아들이긴 힘든 말에 천일염이 영 감을 못 잡는 듯하자, 천고천은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천일염에게 물었다.

“처음 설화가 너를 데려왔을 때, 네 모습이 어땠는지 아느냐? 살아 있는 석상. 그 말이 제일 잘 어울리는 딱딱한 녀석이었다.”

“……그건 갑자기 왜 언급하시는 겁니까?”

“설화를 잃었을 때는 네가 어땠는지 아느냐? 주변의 모든 걸 얼린다던 만년빙정 같았다. 어찌나 주변에 한기가 흐르던지 처남조차 얼어버릴 것 같다며 기겁할 정도였다.”

“…….”

천고천이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언급하자 천일염의 얼굴이 굳었다.

하나, 천고천은 그런 천일염을 보고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지천이를 데려왔을 때는 어땠는지 기억하느냐? 메말라 버린 꽃 한 송이와도 같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쓴 채 무감정한 두 눈을 숨기기 급급하더구나. 그렇게 떠날 때가 되자, 너는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끝에 도달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건…….”

장황하기 짝에 없는 설명에 이제야 천고천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은 천일염이 뭔가 감을 잡은 듯 말끝을 흐리자, 천고천은 천일염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한데, 지금 너는 여기에 서 있구나.”

“…….”

“물으마. 지금 네 얼굴은 어떨 것 같으냐?”

“…….”

연이은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무렵부터 천일염은 알 수 있었다.

천고천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얼굴이 어떤지 말이다.

“사람 같을 겁니다.”

기억력이 좋은 천일염은 옛날 일을 단 하나도 잊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잊은 것이 있었다.

“살아 있는. 한낱 무생물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일 겁니다.”

천설화와 함께했기에 깨우칠 수 있었고.

천설화와 함께했기에 잃어버렸던 것.

한때, 제 색을 그렸었고.

한때, 제 색을 잃었던 것.

울창한 숲에서 잃어버린 자그마한 돌처럼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음에도.

당지천과 함께 걷다 보니 하나둘 찾게 된 그것.

천일염은 그것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감정. 감정이 존재하는 얼굴입니다.”

당지천과 함께 함으로써 녹슬었던 감정이 다시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지천과 함께 함으로써 빛바랜 감정이 다시금 색채를 그리기 시작했다.

과거부터 이어진 무한한 친애를.

위태롭지만, 그 속에 명백히 존재하는 안정을.

그리고 끝에 이르러선 둘이 이룬 조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망각한 깨달음을 되찾은 천일염이 감사와 함께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당지천처럼 순수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게 마냥 쉬운 일만도 아니기에 조금 시간이 걸릴 일이다.

그렇기에 그 시간 동안 홀로 호법을 서게 된 천고천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상을 지을 법도 했건만, 되레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라…….”

천설화가 천일염을 데려와 양자로 들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천일염에게 진심이 담긴 아버지란 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다.

“신화문의 무공을 개량해 줬을 때도 이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천고천은 한층 더 성장한 아들이 대견스러운 듯 애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가부좌 튼 천일염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전의 대화가 떠올라서인지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하나 착각하는 게 있더구나. 내가 고작 인도자를 막느라 발이 묶일 거라는 말. 그건 네가 나를 과소평가해도 단단히 과소평가한 거다.”

* * *

당지천이 깨달음을 얻은 채 천독림으로 들어가고, 천일염이 천독림으로 향하는 문 앞에서 가부좌를 튼 지 한 시진이 겨우 지난 시각.

당가의 대장간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땅! 땅! 땅!

“시간이 없다! 빨리 움직여!”

“원로원장님이 주문한 암기는 아직이냐고 물으십니다!”

“두 시진만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망치질 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오가는 고성.

당가의 무인들은 암기가 없으면 전투력이 반감되는 만큼 대장간 사람들은 제때 암기를 보급해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누구 하나 말소리를 뱉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데, 그 안에서 유일하게 말없이 망치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천일절이었다.

“…….”

-땅! 땅! 땅!

평소라면 입에 불이 날 때까지 떠들면서 대장간 사람들의 귀에서 피가 흐르게 했을 천일절이 오늘따라 유독, 말 한 마디 없이 망치질만 해댔다.

“…….”

거기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

평소보다도 더 망치를 꽉 쥔 오른손은 많이 심각하다는 걸 알려줬기에 대장간 사람들은 천일절을 배려해 그 누구도 말을 걸진 않았었다.

……그를 찾는 손님이 오기 전까진 말이다.

“저…… 손님이 오셨습니다.”

“…….”

“일단……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심부름꾼은 말을 거는 게 죄송스럽지만, 안내는 해야겠다는 듯한 노인을 천일절의 앞까지 안내했고.

“…….”

천일절은 노인이 앞에 멈춰 서는 걸 알았음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망치만 두드렸다.

-땅! 땅! 땅!

지금은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 사라지라는 듯 망치질 소리가 이전보다 한층 더 커졌다.

그러자, 묵묵히 천일절의 모습을 쳐다보던 노인은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데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고뇌하는 것 같은데, 내가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소?”

우뚝, 망치질을 멈춘 천일절이 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시겠습니까?”

“당연히.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어 모를 수가 없지.”

노인은 천일절이 대화할 의향이 있어 보이자, 옆에서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런 적이 없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소. 애초에 혈교가 쳐들어온다고 소문이 난 시점에 유추하지 못할 리도 없고 말이오.”

“그렇긴 하죠.”

혈교가 당가를 습격한다고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황이다.

거기서 대장장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알 만했다.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 고민이 있다면 한번 털어놔 보시오. 내 기꺼이 들어드리리다.”

“아니, 고민이랄 것까진 없고, 그냥…….”

잠시 입을 열길 주저하던 천일염은 인자한 노인과 얼굴을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놨다.

“살아생전 조카를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천일절은 씁쓸한 듯 입을 한 번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전 조카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많습니다. 최소한 제가 없어졌을 때, 추억할 거리가 없지 않았으면 좋겠고, 위기를 맞이했을 때, 제가 남긴 무언가로 한 번쯤은 이겨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네요.”

말을 마친 천일절이 씁쓸함을 한껏 머금은 채 헛웃음을 짓자, 노인도 씁쓸함을 한껏 머금은 채 말했다.

“그렇구려. 나 또한 지켜주고 싶던 형제가 있었소. 비록, 할 줄 아는 거라곤 비루한 손재주에 불과했지만, 그렇게라도 빚을 갚고 싶었던 형제가 있었소.”

“지키셨습니까?”

천일절의 물음에 노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형님에게 후대를 부탁받았을 뿐, 도와주지 못했소.”

“……유감입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 괜찮소. 애초에 형님의 부탁 덕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니 말이오.”

옅은 미소를 지은 노인이 잠시 대장간의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과거를 회상했다.

“언젠가 조카분을 뵌 적이 있소. 아니, 뵌 것뿐만 아니라 도움을 받기까지 했었소.”

노인은 품에서 낡은 피독주와 똑같은 모양새의 피독주를 하나씩 꺼내 보며 말을 이었다.

“소싯적 당 형을 다시금 뵈는 듯했지. 그래서 나는 변명하며 뒤로 미루던 형님의 부탁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소.”

과거를 회상한 노인이 잠시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천일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실패했소. 당 형의 도움이 될 수 없었소. 하나, 그대는 실패하지 않을 것 같소.”

노인은 심기가 곧은 얼굴로 품에서 비수를 꺼내 보여줬다.

“이건…….”

“무형비.”

-딱!

노인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손가락을 튕기자, 갑자기 비수가 사라졌다.

“……?”

천일절은 분명히 비수가 있는 걸 봤고, 출수한 것도 아님에도 비수가 눈에 보이지도.

그렇다고 기감에 잡히지도 않아 기겁하고 있자, 노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 놀라지 마시오. 효과는 좋긴 하나, 고작 한 자루. 음빙곤석과 만년한철을 섞어 쓰는 만큼 많이 만들 수도, 또, 제대로 다루지도 못해 가진 능력과 달리 암기로선 형편없는 물건이오. 자, 보시오.”

“허어…….”

노인에게 무형비를 건네받은 천일절은 탄식을 내뱉었다.

왜냐면 산 하나를 뒤져야 한 줌을 겨우 얻을 수 있다는 음빙곤석과 귀하디 귀한 만년한철을 섞어 쓴다는 말에 놀랐는데.

노인이 건네준 비수는 무게중심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엉성한, 사실상 비수 모양의 철 쪼가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보자마자 탄식이 나올 정도라니, 내가 솜씨가 그렇게 안 좋소?”

“아니, 그게 아니라…….”

“하하하, 농담이오. 나도 알고 있소. 내 솜씨가 그리 좋지 않은 걸. 사실 여기 찾아온 것도 그런 연유에서 온 것이오. 이 무형비를 암기로 만들고 싶어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노인이 천일염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대라면 더 좋게 만들 수 있지 않겠소?”

영혼과 신념이 가득한 눈동자.

천일절은 노인이 대장장이는 아니지만, 우직한 한 명의 장인임을 직감했기에 자신 또한 굳은 얼굴로 노인을 마주 보며 노인의 이름을 물었다.

“어르신,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장소산. 천독일해 당영수 형님의 의동생이오.”

“장소산 어르신. 저는 천일절이라고 합니다. 빙화 천설화 누님의 동생이자, 백독멸악 당지천의 외삼촌입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천일염은 모루 위에 올려진 잡동사니들을 전부 치워 버리며 선언하듯 말을 이었다.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을 마친 천일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눈을 한 채 힘차게 풀무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 뒷모습을 보던 노인은 그 어떤 무인보다 강인하고 우직해 보이는 모습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작은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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