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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95화 (195/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5화

갑작스럽게 이마에 닿은 할머니의 손에서 포근한 온기를 느꼈을 무렵.

문득 눈을 감고 있단 걸 떠올린 나는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어딘지 모를 마차 안.

수 명의 무인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나아가는 걸 보니 호위를 받는 모양새였고, 그 마차 안에선 젊은 여인의 품에 안긴 채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잠든 어린 당지천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지천이. 이제 다 컸네. 혼례를 치러도 되겠어.”

어딘가 슬퍼 보이면서도 애틋한 눈으로 어린 당지천의 머리를 쓰다듬는 여인.

그녀를 직접 보게 된 건 처음이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당지천의 어머니인 천설화라고 말이다.

“엄마가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못 하고 가서 미안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 우리 착한 지천이는 이해해 줄 거지?”

보드라운 손으로 조심조심 당지천의 머리를 만지며 옅은 미소를 보이는 어머니.

이것이 작별인사라도 되는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기에 나도 모르게 그만 코앞에서 바라봤는데, 어느샌가 고개를 돌린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아니, 그런 기분이 들자, 어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 잘 커줘서 고마워…….”

어린 당지천에게 하는 건지, 아니면 나에게 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

애써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면서도 미소가 만연한 얼굴에 기시감이 드는 따뜻함을 느꼈을 때.

“가모님! 위험합니다!”

어머니는 어디선가 날아온 암기를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어머니……?”

잠에서 깬 어린 당지천은 어머니를 허망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 * *

믿기지 않는 풍경에 눈을 파르르 떨며 감았다 뜨니 이번에 보이는 건 내 방.

그리고 침소 한 켠에서 울고 있는 어린 당지천이었다.

“흐윽…….”

한순간에 풍경이 변하듯 시간도 꽤 흘렀는지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어린 당지천.

그와 대비되게 핼쑥해진 얼굴을 보면 그 시간이 순탄치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아직 부모를 잃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을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어린 당지천은 썩은 동태 눈깔을 한 채 연신 어머니를 찾기 바빴고.

참으로 서럽게도 어머니를 부르짖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점차 어린 당지천의 눈가에선 눈물이 메말랐고, 이제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말을 반복했다.

“복수해야 해…… 어떻게든 복수해야 해…….”

자신을 세뇌하듯 연신 복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어린 당지천.

덕분인지 몰라도 슬픔은 분노로 치환되어 여린 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고.

어린 당지천은 탁자 위로 뛰어가 자신의 일기장을 꺼내 붓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인이 되어, 당가를 천하제일세가로 만든다.”

처음 일기장을 열었을 때 수십 번.

수백 번이나 반복되어 있던 그 말.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인 어린 당지천은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그리고 최강의 독과 최강의 세력으로 어머니의 복수를 할 거야.”

그렇게 어린 당지천이 셀 수 없이 많은 눈물과 슬픔으로 얼룩진 일기장을 적셨을 때.

어린 당지천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 *

아까 그랬듯이 이번에도 눈을 깜빡이자, 이번에 보이는 곳은 고아원.

내가 자랐던 고아원이 아닌, 옛날옛적에 잠시 지나온.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낡고 허름했던 고아원 앞에는 영문도 두 눈을 끔뻑이는 어린 권준일이 서 있었다.

……무려 9살 당지천의 기억을 가진 채로 말이다.

“여, 여긴 어디야?”

9살 당지천에게는 이름 모를 세계.

심히 이질적인 깨끗하지 않은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답답한 느낌을 줬기에 어린 당지천은 과거에 어머니 손을 잡고 갔었던 동굴에 들어가 봤을 때를 떠올렸는데,

그때, 당지천은 머릿속에서 생기는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머니와 갔던 동굴이 어디 있던 곳이었지? 그때 어머니와 무슨 대화를 나눴었지?”

차가운 인상이지만, 오뉴월의 해처럼 따뜻하던 어머니의 얼굴.

한여름의 그늘터처럼 언제고 간에 쉬어갈 수 있게 품어주던 어머니의 목소리.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귀했던 어머니와의 추억까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평생 잊으면 안 될 것들이 조금씩이나마 희미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어…….”

당지천은 그제야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여기 있는 건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대가로 치뤘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하나라도. 하나라도 뭔가를 알아가야 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하나씩 지워지고, 하나씩 채워지던 시절이.

서서히 잊히는 기억에 조금이나마 더 알아가려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다.

잠도 줄일 채 게걸스럽게 지식을 탐하다 지쳐 쓰러졌을 땐, 한층 더 희미해진 기억에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었다.

“맞아, 그랬었지.”

그래서였을까.

절실했던 이유조차 흐릿해질 때쯤엔 그저 재미로.

묘한 동질감을 느껴서 흥미를 잃지 않았다.

이유도 동기도 모른 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맞아, 그랬었어.”

그렇기에 모든 기억을 권준일로 살아온 나는.

맹목적이고 투쟁적인 삶 끝에.

원하던 걸 가질 수 있었다.

* * *

“어떻게, 잃어버렸던 걸 떠올렸느냐?”

심란했던 당지천의 얼굴이 형형색색으로 변하다 종장에 이르러서는 울먹임으로 변하자, 빙설린이 물었다.

그러자, 당지천은 목이 메어 차마 대답하지 못해, 그저 눈시울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우리 가족은 가족

사랑이 지극해서 탈이라니까.”

빙설린이 끅끅대는 당지천을 끌어 안아주자, 그 속에서 잠시 눈물을 터뜨린 당지천은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다. 그것보단 지금 해야할 일을 먼저 하거라.”

“예!”

빙설린의 말에 힘차게 대답한 당지천이 이전과 달리, 자신감 있는 얼굴로 연구대로 향했다.

이전엔 독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두려웠지만, 지금이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빨리 새로운 해법을 찾으려던 찰나.

갑자기 주머니에서 삐익이가 튀어 나와 당지천의 앞을 가로막았다.

-삐익!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삐익, 삐익, 삐익.

“이제부터 실험해서 새로운 독을 만드려는 거냐고? 그런 건데? 왜?”

-삐익! 삐익!

“뭐? 무한낭에 독을 마구잡이 섞으라고? 그럼 된다고? 독을 막 섞는다고 독성이 강해지지 않아.”

무엇을 섞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이라고 해서 마구잡이로 섞는다고 좋은 독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 다른 물질로 변할 수도 있고, 서로 섞이지 않아 그냥 분리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당지천이 삐익이를 보며 고개를 젓자, 삐익이는 그게 아니라는 듯 화를 내더니 갑자기 HBL-VX를 집어 먹었다.

그러고는…….

-찌르르!

찌르르 울며 뭔가를 뱉어냈다.

“이건…….”

피마자의 성분과 HBL-VX의 독성이 공존하는 이상한 독.

당지천이 만든 HBL-VX의 경우 리신과 닿으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리신이 사라져야 했다.

한데, 지금 눈앞의 독은 그런 과학 법칙을 비웃듯이 공존하는 게 아닌가?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무림의 독은 낱낱이 파헤치면 대부분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현대 과학에선 통하지 않는 무림의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지금.

삐익이가 내뱉은 독처럼 말이다.

“아아……. 그래. 내가. 내가 매개가 되면 되는 거였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해결하면 돼.”

당지천은 뇌리에 꽂히듯 날아든 깨달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은 현대인인 동시에 무림인.

그 말인즉슨, 어느 한쪽의 방법에 치우칠 게 아니라 양쪽 모두의 방법으로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쉬운 걸 몰랐다니! 독만 있으면 모든 걸 할 수 있음에도 그걸 몰랐다니!”

현대의 방식으로 추출하고, 무림의 방식으로 모든 독을 섞을 수 있다면 독 하나로 천하를 지배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재료가 될 독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다행히 당가엔 세상의 모든 독이 모인 곳이 단 한 곳 존재했다.

그곳은 바로…….

“궁래심접호! 가문의 어르신들이 스스로 몸을 던진 그곳!”

천독림에 있는 궁래심접호.

역대 당가의 가주들이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몸을 담그는 그곳이 당지천의 바램을 가능케했다.

“그냥 한 줌의 독수로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었어. 죽는 그 순간까지. 최후의 최후까지. 후대들을 위해 독을 정제하고 생을 마감한 거였어.”

연이어 깨달음을 얻은 당지천이 벼락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자, 빙설린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당지천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답을 찾았나 보구나. 한데, 이대로 허망하게 놓칠 것이냐? 어서 가보아라.”

“아, 예. 감사합니다! 할머니!”

-삐익! 삐익!

빙설린의 품에서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당지천은 빙설린에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삐익이와 함께 누가 잡을세랴 부리나케 뛰어갔다.

“조심해야 한다!”

“예!”

그렇게 우탕탕탕 사라지는 당지천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당지천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던 빙설린은 시끄러운 당지천의 발소리가 멎자,

그제야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차마 하지 못했던 마지막 한 마디를 더했다.

“우리 손주. 참 잘 컸네. 부디 앞으로는 건강하고 행복하렴.”

* * *

빙설린에게 인사를 건네고 미친 듯이 천독림으로 달려가던 당지천.

뒤에서 무슨 소리를 들려온 것 같았지만, 행여나 깨달음을 잃을까 싶어 주저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공자님…….”

연구하러 들어간 당지천이 갑자기 전력질주하며 연구동에서 빠져나오자, 천일염이 무슨 일 있나 싶어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빠르게 지나쳐가는 당지천의 얼굴을 보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얼굴에 내려앉았던 그림자와 썩은 동태 눈깔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화색을 띄운 채 흩뿌리는 환한 미소와,

두 눈에 청명함을 가득 품은 채 어디론가 급히 향하는 모습을 보자, 천일염은 당지천의 상태

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움직이는 건 뭔가 조건이 안 맞다는 것. 그렇다면 천독림인가.’

“길을 열겠습니다.”

이어서 당지천이 가는 곳까지 유추해낸 천일염이 당지천을 앞질러 천독림까지의 길을 열어줬다.

그 덕에 천독림까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던 당지천은 곧장 궁래심접호로 앞으로 향했다.

“깨달음을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제가 한시가 급해 긴히 인사드릴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궁래심접호 앞에 도달해 온몸이 찌르는 듯한 독기를 느낀 당지천은 뛰면서 HBL-VX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그대로 궁래심접호에 뛰어들며 말을 이었다.

“인사는 가서 직접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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