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94화 (194/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4화

당지천과 천일염이 당가로 돌아오는 길.

선두에 선 암혈대가 산적이든 혈교도든 보는 족족

처리해 순탄하기 짝에 없는 여행이었지만, 분위기는 심각하기 짝에 없었고, 작은 사담 하나 오가지 않았다.

“…….”

“…….”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걷기만 하는 둘.

간간이 찾아오는 혈교도나 산적은 앞서 나가는 암혈대가 정리했기에 대화를 나눌 만한 일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당가에 왔고, 그제야 첫 대화가 오갔다.

“공자님. 곧 도착입니다.”

“어.”

평소의 대화를 생각해 보면 한없이 짧은 당지천의 단답.

옅은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뚝뚝한 답변에 무어라 한마디를 더 붙이려던 천일염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당가로 향했다.

* * *

“이야, 공자님. 멀쩡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안휘에서 있던 일 때문에 걱정했는데, 따로 돌아오신다고 하니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던 것 있죠?”

당지천이 대문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부문주가 달라붙어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짧디짧은 단답뿐.

“예.”

“……공자님.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니요. 인사는 나중에 하죠. 급한 일이 있어서.”

“…….”

한눈에 봐도 이상한 당지천의 상태에 부문주는 의문을 표했다.

허나, 당지천은 그런 부문주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그냥 지나쳐 안으로 향했다.

“일염아. 여기 써진 거 하나씩 챙겨 와줘.”

“공자님께서는 만독연으로 가실 겁니까?”

“어. 재료가 하나 모자라서 대체할 재료를 찾아야 해. 천독림에서 필요한 재료도 꺼내 와야 하고.”

가문에 들어오자마자 인사는커녕, HBL-VX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다른 건 하나도 눈에 들어 오지 않는지 당지천은 만독연으로 직행했다.

“어? 소가주님. 오셨습니까?”

“제 개인 연구실을 써야겠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준비 좀 해주십시오. 천독림에 들렀다가 바로 가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당지천이 부문주를 만났을 때처럼 바로 당지무를 지나치려고 하자, 떨떠름하게 대답했던 당지무가 당지천을 붙잡았다.

“아, 소가주님. 외조부님께서 와계십니다.”

“할아버지께서요?”

“응당 집에 돌아왔으면 부모에게 예부터 올려야 하거늘, 뭐가 그리 급해서 사람 무안하게 움직이느냐?”

천고천이 미리 당가에 도착한 걸 알지만, 설마 만독연에 있었을 줄은 몰랐기에 잠시 놀란 당지천은 송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좀 급한 일이 있습니다.”

당지천은 천고천에게 사과하면서도 급한 마음에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고.

얼떨결에 손자에게 무시를 당한 천고천은 딱 한마디만 했다.

“하나 부족하지? 그거라면 곧 올 거다.”

“…….”

그러자, 우뚝 멈추는 당지천의 발걸음.

하나 부족하냐는 물음은 천일염과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알 수 있을 거기에 넘어갔다.

허나, 곧 온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무슨 의미로 한 건지 알아보려고 지긋이 천고천을 쳐다봤고.

당지천의 발걸음을 멈춘 게 마음에 든 천고천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만독연의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 오는구나.”

천고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만독연으로 걸어 들어오는 포근하면서도 날이 서린 상반되는 얼굴의 노인.

녹색의 무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걸 보면 누가 보아도 사천당가의 사람임을 알 수 있었고, 우측 가슴에 새겨진 자색 구름에 탄 현무의 자수를 보면 그가 장로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구……?”

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에 당지천은 물론이고, 당지무 또한 고개를 까닥였는데, 우연찮게 지나가다 그를 보게 된 연구원들의 외침에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대, 대장로님! 도, 돌아오신 겁니까?!”

그는 바로 십수 년 전, 독을 찾으러 떠난다는 말만 남기고 출타했던.

어디론가 떠나 버린 탓에 당지천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던 당가의 대장로였다.

“좀 많이 늦었구나. 뭐, 그래도 늦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대장로의 인망이 굉장히 좋았는지 오랜만에 봄에도 연구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그러면서 천천히 당지천의 앞에 다가왔다.

“삼 공자님? 아, 이제 소가주가 되었다고 하셨나. 시간 참 빠르군요. 마지막으로 본 게 하도 어릴 적이라서 작게만 기억했는데, 이렇게 반듯하게 자랐다니. 가모님께서 직접 보셨다면 참으로 좋아하셨을 겁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한데, 혹시 제게 무언가 주시려고 오신 겁니까?”

“아, 알고 계셨습니까? 하긴, 제가 돌아올 때면 때가 무르익었을 때라고 하셨으니 어쩌면 기다리셨을 수도 있겠군요.”

껄껄껄 웃어젖힌 대장로가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열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으시죠. 가모님께선 이게 주재료가 아니었다고 한들, 이거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장로가 꺼낸 건 줄기가 사람 팔뚝만 하면서 하얀색 꽃이 가득 핀 이질적인 식물이었다.

당지무는 생전 처음 보는 독초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대장로님. 이건 무슨 독초입니까?”

“서역인들은 이렇게 부르더구나. 만…….”

“만테가지아눔어수리.”

“마, 마, 만태…… 소가주님. 아시는 겁니까?”

“예.”

당지천이 모를 리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옛날 옛적 찾을 수만 있다면 장하에게 주고자 했던 바로 그 식물인 동시에 HBL-VX의 부족한 재료 중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이거면 가능하겠습니까?”

“네. 이거면 됩니다. 한데, 어머니는 이걸 어떻게…….”

“가모님께선 뭐든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상황도 예견하신 거겠죠.”

“…….”

어머니는 대체 이걸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그리고 대장로는 어떻게 어머니의 말을 신뢰하고 십수 년을 서역에서 떠돌았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당지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대장로는 제대로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지 허허허 웃으며 연구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궁금하셔도 전 이렇게밖에 설명 못 드립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습니까?”

상념에 잠기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있지 않냐.

그런 대장로의 말에 당지천은 길게 숨 한 번 내뱉으며 모든 생각을 지워 버렸다.

“후우…….”

경위 같은 건 나중에 알아도 된다.

중요한 건 오직 재료가 손에 모였다는 것.

지금 당장 HBL-VX의 제조가 가능하다는 점뿐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당지천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곧장 뒤돌아서며 소리 나게 두 뺨을 후려쳤다.

-짝!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 아니, 최소한 더 퍼지지 않게 막는 일이다.’

과오를 반복했으니 수습이라도 빠르게 해야 한다.

당지천은 그 일념 하나로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비우며 천독림으로 향했다.

* * *

천독림에 들러 재료를 챙기고 연구실에 들어간 지 대략 2시진이 지났을 무렵.

새로 제작법을 만드는 거면 모를까, 기존의 제작법을 쓰는 건 물론이고, 이미 숙달될 대로 숙달된 덕에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HBL-VX를 완성했다.

실로 고무적인 일.

허나, 나는 바라 마지않던 물건을 만들어냈음에도 얼굴을 굳힌 채 심각한 표정으로 HBL-VX가 담긴 병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완성은 됐는데…… 겨우 이걸로 될까?’

HBL-VX를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무기로 쓰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최강의 독이 HBL-VX였기에 이걸로 당지독을 죽일 생각이었다.

한데, 막상 만들고 나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수백, 수천만 명을 유린하던 공포의 독이.

내 손에서 태어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이 이곳에선 그저 조금 특출난 극독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이다.

‘극독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하고, 그저 피하는 것 말고는 대응하기도 까다로워.’

HBL-VX는 무형지독에 가까운 독.

심지어 천독림의 어느 극독과 비견해도 꿇리지 않은 정도로 강한 독성을 가져 무림에서도 아주 치명적인 독이었다.

‘하지만 이거로는 모자라.’

허나, 과거의 무방비했던 당지독이라면 모를까.

혈교의 인도자가 된 당지독을 죽이기엔 부족한 독이었다.

‘부족해. 부족해.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해.’

지금 가진 최강의 독이어도 겨우 이 정도로는.

고작 이걸로는 당지독을 죽일 수 없다.

“부족해.”

그렇기에 착잡한 마음으로 혼잣말을 읊조린 순간.

갑자기 연구실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왔다.

“이미 갖춰질 건 다 갖춰졌는데 뭐가 그리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냐?”

“할머니? 들어오시면 위험해요.”

“어차피 살날도 길지 않은데, 좀 위험한 게 대수겠느냐.”

연구실엔 HBL-VX를 제외하고도 위험한 물건이 한가득이었기에 재빠르게 할머니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상관없다는 듯 밀고 들어온 할머니는 근엄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말해보아라. 대체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느냐?”

아무리 고집부린다고 해도 위험한 건 위험한 것.

사고가 생기기 전에 할머니를 연구실에서 내보내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근엄한 얼굴에 차마 나가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순순히 답변했다.

“……독성이 부족해요. 제가 아는 가장 강하고 효용성 높은 독이 이건데, 인도자를 상대하려면 이것보다 더, 더 강한 독이 필요해요.”

“하면 새로 만들면 되잖느냐.”

“새로 만드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한순간의 영감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수없이 지루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만들어지는 게 독이거든요.”

“호오…… 그렇구나. 하면, 그 독은 어떻게 만든 것이더냐? 네 일생을 들여다봐도 그런 독을 연구하던 기간은 없던데? 하물며 연구 없이 나온 독들도 많잖느냐?”

“그건…….”

할머니의 날카로운 지적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내가 별도의 연구 없이도 독을 만들 수 있던 건 연구가 필요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전생에 이미 연구를 마쳤기 때문이다.

한데,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자, 할머니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셨다.

“하하하하.”

이쪽은 심각해 죽겠는데, 뭐가 그렇게도 재밌으신지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그렇게 할머니는 한참이나 웃으시다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 미안하구나. 심각한 일인데 나도 모르게 그만 웃어버렸구나. 지천아, 네가 한 가지 착각한 게 있단다.”

“착각한 거라뇨?”

“너는 당지천 몸에 들어온 권준일이 아니다.”

“……!”

“정확히는 권준일 몸에 들어갔다 온 당지천이란다.”

“그, 그게 무슨…….”

당황한 얼굴로 할머니를 쳐다보자, 할머니는 다 안다는 듯 물으셨다.

“지천아. 이 할미의 혈통에는 아주 특이한 능력이 깃들어 있단다. 그게 뭔지 아느냐?”

“미래를 점지하시는 능력 아닌가요?”

“아니다. 이건 특이한 능력 덕에 얻은 능력이지 혈통에서 나온 능력은 아니란다.”

“예? 그럼요?”

내가 반문하자, 할머니는 웃으면서도 어딘가 슬픈.

가슴 아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강한 염원을 통해 대가를 치르고 자신이 원하는 걸 이뤄낼 수 있단다. 때에 따라선 자신의 영과 육신을 바쳐서라도 말이지.”

“그럼 할머니는…….”

“그래, 나는 점을 보길 좋아해서 미래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설화는. 13년 전 네 어미는 네 행복을 빌었단다.”

“그럼 설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제 탓이란 말인가요?”

“그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설화의 선택이었으니까 말이다.”

할머니의 눈에는 대견함과 가슴 아픔이 묻어나는 애절함이 떠올랐지만, 이내 씁쓸한 미소와 함께 지워 버리고는 말했다.

“그렇게 설화가 떠나고 2년 후. 11년 전의 너 또한 한 번 능력을 썼더구나. 어렸을 때 기억이 희미하지? 아마 그게 염원을 이루는 대가였을 거다.”

할머니가 양 소매를 걷더니 이내 내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시절을 떠올리게 조금 도와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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