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3화
천고천에게 지도를 건네받은 천일염의 안내에 따라 발을 옮기길 잠시.
격렬한 전투를 마치자마자 쉬지도 않고 움직인 탓인지 많이 걷지 않았음에도 당지천의 숨이 절로 가빠졌다.
“후우…… 후우…….”
“공자님. 지치면 좀 쉬다 가시죠.”
“괜찮아. 여차할 때 싸울 체력 정도는 남겨놓고 있어.”
천일염의 걱정에도 괜찮다며 당지천은 괜찮다며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가벼운 웃음과 대비되게 무거워 보이는 양다리는 지금 당지천이 얼마나 지쳤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천일염은 그걸 앎에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 보이는 당지천의 몸 상태를 보면 쉬었다 가는 게 맞지만, 당지천이 왜 이렇게 무리하게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휴식을 강요하기보단 말없이 최단 거리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쪽의 동굴입니다.”
그렇게 얼마 안 가서 도착한 혈교의 비동.
어디에나 널린 야산에 흔하게 보이는 수많은 동굴 중 가장 특색 없는 동굴이 비동의 입구였다.
“여기가 혈고독을 만든 곳이라고……?”
사람이 드나든 작은 흔적을 제외하면 자연 상태의 동굴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위장하기 적당한 곳.
당지천은 그런 평범하게 짝이 없는 동굴의 입구를 살펴보곤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졌다.
“똑같아……. 그때와 똑같아…….”
분명 처음 보는 동굴임에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동굴의 입구.
단순히 기시감으로 치부하기엔 뇌리에 너무나 명확히 각인된 장면을 떠올리자, 당지천은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고, 그런 당지천을 천일염이 염려스럽게 쳐다봤다.
“공자님. 어디 아프십니까? 그리고 무엇이 똑같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야. 별거 아니야. 안에서 독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게 여기가 맞나 보네. 들어가 보자.”
“…….”
당지천이 애써 태연한 얼굴로 앞서 들어가자 천일염은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일단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당지천의 뒤를 따랐다.
* * *
한 발.
한 발.
동굴을 나아갈 때마다 발소리에 맞춰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들.
이미 10년도 더 지난 전생의 일이라 이제는 제대로 기억 못 할 법도 하건만, 잠긴 문을 두드리듯 발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뇌리에선 장면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래. 그때도 분명 이런 동굴이었지.’
내가 만들었던 HBL-VX가 어떻게 쓰이는지 처음 알게 된 날.
평생 가족이라 생각했던 성수 형을 처음으로 의심하게 된 나는 내 독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성수 형의 컴퓨터와 휴대폰을 해킹해 비밀 연구소를 알아내고, 일부러 폐기한 곳에 직접 쳐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봤던 비밀 연구소의 입구가 딱 이랬다.
‘사람 2명 겨우 지나갈 공간에 어두컴컴한 동굴.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아서 쾌적함이 느껴지는 기분 나쁜 공간.’
겉보기엔 자연적인 동굴인 척 굴면서도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공기에 절로 위화감이 드는 공간.
도대체 무얼 연구하길래 이렇게까지 숨기려 드는지 알 수 없었던 당시엔 이곳을 의문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나아갔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권총이라도 하나 챙겨 왔어야 했는데…… 안에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무리 폐기한 비밀 연구소를 골랐다고 한들, 내부의 흔적이 남아 있던 만큼 경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당시에 군사 관련해선 심히 무지했었기에 그냥 들어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공자님. 문입니다.”
“그래, 이쯤 있었던 거 같아.”
“……?”
그렇게 별다른 역경 없이 비밀 연구소로 향하는 문으로 찾아낼 수 있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문에는 아무런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문에는 별다른 장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안에 사람 기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
“아니야. 왠지 그럴 거 같아서 해본 소리야. 들어가자.”
“그럼…… 열겠습니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일염이가 앞서서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암혈대가 주변을 에워싸며 나를 호위했다.
“…….”
일염이가 조심스레 문을 밀자, 아무런 소리 없이 열리는 문.
중요한 연구를 했던 만큼 작은 잠금 장치라도 남아 있을 법도 하건만, 그런 것 하나 없이 잘 관리된 문은 침입자를 반겼다.
……그때와 같이 말이다.
“인기척은 없는 것 같네. 들어가자.”
사람은커녕,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비동 안.
그 안을 성큼성큼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있었던 흔적들이 보였다.
“흔적을 보아하니 저쪽 부근에서 무언가 연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자료들을 모아 오겠습니다.”
비동을 이미 비운 만큼 의미 있는 정보는 나오지 않을 거다.
그래도 남기고 간 편린들을 하나둘 모으다 보면 추측할 수 있는 게 많았기에 암혈대 인원 두 명이 자료 수집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기에 그들을 제지하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따가. 이따가 하죠.”
“알겠습니다.”
“일염아, 저쪽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일염이를 지나쳐 앞서 나가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딱히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럴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왜냐면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만약, 전생에 겪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여기를 방치한 거라면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공자님. 갈림길…….”
“이쪽으로.”
발을 내딛는 데 그 어떠한 근거나 확신은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발길이 닿는 대로 나아갈 수 있던 건 기시감이 느껴지던 이유가 명백히 존재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예상대로 얼마 가지 않아 사람 한 명이 드나들 만한 철문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문이 나왔습니다만…… 공자님. 혹시 와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여긴 처음이야.”
“여긴……말입니까?”
“그래.”
두루뭉실한 대답에 일염이가 다소 의뭉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없이 문부터 열었다.
-끼이익.
오래 방치된 탓일까.
철문을 살짝 밀자, 입구의 문을 열 때와 달리, 요란스러운 소음을 내며 문이 열렸고.
살짝 열린 문틈에서 새어 나간 한 줄기 빛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어둠을 밝히고 나아가 한 아이를 비췄다.
“…….”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아이.
이제 갓 일곱 살은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멍이 들지 않은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가혹한 일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
“후…….”
사람이라면 절로 연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뱉자, 갑자기 아이가 기침하더니 신음을 흘렸다.
“쿨럭, 쿨럭, 으으…….”
“얘야, 정신이 좀 드니?”
“다가가지 마십시오. 공자님.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엄마…….”
울 힘조차 없어 공허한 눈으로 엄마를 찾는 아이를 보면 절대 함정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전생과 빌어먹게도 똑같았기에 나는 알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혈교에서 준비한.
살아 있는 암살 도구란 걸.
그때도 똑같았다.
비밀 연구소의 심처에 있던 작은 철문.
그 안에서 발견한 건 연신 신음을 흘리는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남자아이 말이다.
응당 사람이라면 그런 아이의 모습에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당연하게도 나는 아이를 구해서 병원에 데려갈 생각밖에 없었다.
……아이의 배 속에 내가 만든 HBL-VX가 나오는 화학탄이 들어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독에 미쳐서 아이에게 인체 실험을 하다가 당했다고 위장하고 싶었던 거겠지. 아니면, 그런 방식으로 밖에 죽이지 못한 이유가 있든가.’
해킹했다고 생각한 컴퓨터는 성수 형이 스스로 풀어준 것이었고, 비밀 연구소에 사람이 없던 것도, 문이 가볍게 열린 것도 내가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만들려던 거였다.
나를 죽이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몸에 이상한 폭탄을 마취도 없이 때려 박아놓은 채로 말이다.
“알아, 함정인 거. 그러니까 가는 거야.”
앞서 기시감을 느꼈던 시점부터 그때의 일이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눈앞에 아이는 지금쯤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을 거다.
그러니 고통이라도 지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해독제를 줄게.”
강력한 수면제인 졸피뎀과 함께 여러 독을 섞는다.
먹는 순간 편안해질 수 있게, 또, 독수로 녹아내려도 아무 느낌 없게끔 배합한 뒤, 달달한 당과에 묻히며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으으…….”
그렇게 아이의 지근거리에 도착했을 때.
혹여나 살릴 순 없는지.
안에 설치된 무언가만 제거하고 아이를 구할 순 없을지 작은 기대를 가지고 자세히 안을 들여다봤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아이의 심장은 뛰지 않았고, 자그마한 혈옥이 대신 박혀서 잠시뿐인 생을 이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먹으렴.”
이미 살리기엔 너무 늦은 상황.
최소한 아이의 고통이라도 덜어주고 싶어 독을 바른 당과를 잘게 쪼개 아이의 입에 넣어주자, 힘이 없어 보이는 아이는 당과를 두어 번 씹고는 힘겹게 목 뒤로 넘겼다.
“어……?”
그러자,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쌩쌩해진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아이.
아마 신경이 끊어지는 동시에 진통제가 들어가 한순간에 고통이 사라지자, 놀라서 나를 쳐다보는 것이리라.
하지만 총기가 돌아온 눈에는 얼마 안 가서 졸음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졸리네…… 아.”
뭔가를 알았다는 듯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린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헤헤,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아이는.
한 줌의 독수로 녹아내렸다.
“…….”
아이가 독수로 변하자, 그에 따라 뭉개지듯 사라지는 혈옥들.
역시 아이를 매개로 썼던 것인지 매개가 아예 사라져 버리자, 제 기능을 못 하고 독수에 파묻혀 녹아내렸다.
아마 아이에게 난 상처가 혈진을 대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을 거다.
“옘병…….”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에도 화가 나고 절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마지막에 아이가 했던 인사는 당과를 줘서 감사하다는 걸까.
아니면, 고통을 없애줘서 감사하다는 걸까.
어느 쪽의 의미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도 기분이 엿 같았다.
“옘…… 병…… 내가…… 내가 뭣도 없는 신념을 지키겠다고 이 꼴을 만든 거야.”
과거를 만회하겠다고 해놓고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 독으로 아이를 죽였다.
어쩌면 내가 밟고 있는 이 땅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혈교의 탓이지, 공자님 탓이 아닙니다. 책망하지 마시죠.”
“아니, 내 탓이야.”
그때 준비되지 않았던 당지독을 죽였더라면.
말 같지도 않은 신념에 사로잡혀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처음부터 가진 게 하나뿐이었는데, 되지도 않는 신념을 지키겠다고 그걸 외면했어. 이독제독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괜히 이상한 자격지심 때문에 외면했다고!”
지나 버린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외면했다.
엇나간 신념을 지키려고 눈앞의 현실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같은 상황을 반복했다.
그러니 어떻게 내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 나 때문이야…….”
* * *
그간 지켜왔던 신념이 허울 좋은 변명임을 깨달아서였을까.
한참이나 자책하던 당지천은 이제는 감정이 좀 추슬러졌는지 이를 악물며 혼잣말을 했다.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만들어야 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쥔 당지천은 독수가 되어버린 아이를 고이 묻어주고는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일염아.”
“…….”
분노가 가득한 얼굴과 반대로 위태롭기 짝에 없는 두 눈.
한눈에 봐도 정상은 아닌 당지천의 얼굴을 마주한 천일염은 당지천이 심히 걱정됐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어 차마 뭐라고 하진 못했다.
다만…….
‘전부 이해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당지천의 뒤를 따르는 천일염의 두 눈가에는.
작은 이슬이 하나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