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2화
“…….”
혈교가 사라지고 나자, 침묵에 빠진 시합장.
혈교의 물러나게 한 건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군사의 작전대로 혈교를 일망타진하는 데 실패한 건 물론이고, 혈교의 습격에 크나큰 피해를 입었기에 환호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자와 혈교주의 정체가 치명적이었다.
“혈교의 인도자가 독룡이고, 혈교주가 당가의 2장로라…… 이거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어허, 혈교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는가? 바로 쫓아오지 못하게끔 분란을 유도하는 걸세. 한데, 그걸 곧이곧대로 당해주고 있으면 어쩌자는 겐가?”
“하지만 자네도 백독멸악의 반응을 봤잖는가. 그저 껍데기만 뒤집어쓴 거였다면 대화를 그리 나누진 않았을 걸세.”
“아니네. 당가에 있을 때부터 당지독을 연기했었다면 백독멸악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가? 무엇보다 혈교에 대한 깊은 반감을 드러냈잖는가.”
어느샌가 심어진 불화의 씨앗.
당지독의 수법이 뻔하긴 했어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팽구용이 직접 나서서 반박하긴 했으나, 내색하진 않아도 의미심장한 눈으로 당지천을 쳐다보는 인원들이 꽤 생겼다.
“사술로 얼굴도 바꾸는데 반감 좀 드러내는 거야 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왜 혈교주와 인도자의 정체에 대해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이지? 봉문이 풀리고서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잖은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말하는 이도 느꼈는지, 목에 더 힘을 주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사람들도 자신 있는 그의 목소리에 하나둘 지지하는 시선을 보냈다.
허나, 그러기도 잠시.
그의 뒤에서 걸어오는 한 인영을 보고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그거야, 네놈 같은 녀석들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서 상황을 악화시킬 게 분명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확실히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입방아부터 찧는 게 제정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요? 대체 누구길래 그런 시건방진 언사로 나를 모함…….”
한창 잘 설득하고 있는데, 누군가 딴지를 걸어오자 화를 내며 돌아보는 무인.
심히 건방진 언사에 말이 아닌 몸의 대화를 나눌 생각까지 하던 무인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싹 굳었다.
“태, 태천검. 거기에 맹주까지…….”
“그래, 나다. 이제 어쩔 거냐?”
“큼큼……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뒤에서 남궁전유가 나오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의견을 뒤집는 무인.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여준 무인은 이미 남궁전유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알기에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제가 평소에는 이런 실수를 안 하는데, 고된 싸움 탓에 다소 흥분하여 그런 것 같으니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무인은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허나, 그런 무인을 불러 세우는 태천검.
“동작 그만. 지금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네 목이 달아날 거다.”
“대, 대협 제게 왜 그러십니까? 거, 검은 또 왜 뽑으시는 겁니까?”
“네놈은 혈교가 왜 물러갔는지 아느냐?”
“그, 그거야, 지고하신 대협의 실력에 겁먹어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것 아니겠습니까?”
“틀렸다. 혈교가 물러간 건 네놈이 모함하던 이 녀석. 지천이 덕분이다.”
말을 마치자 잠시 날 선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는 남궁전유.
당지천을 직접 모함한 건 이 녀석 한 명이지만, 너희도 의심하는 시선을 보낸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매서운 눈으로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다들 잘 들어라. 혈교가 물러간 건 이 녀석이 혈교의 혈독을 제독해 혈진을 파훼함으로써 혈교의 세를 급격히 줄인 덕이며, 자신의 외가인 빙궁에 도움을 요청해 외부의 혈교도들을 처리해 세가 기울게 만든 덕이다. 즉, 지천이가 없었다면 지금쯤 네놈들도 송장이 되어 있었을 거란 이야기다. 그런데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했을 녀석이 은혜도 모르고 주둥이를 나불대?”
“죄, 죄송합니다.”
“닥쳐라!”
매섭게 사람들을 노려보던 남궁전유가 당장 검을 휘두를 기세로 일갈하자, 무인은 겁에 질린 채 무릎을 꿇었다.
“대협! 제가 시야가 좁고 머리가 아둔해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닥치라고 했다!”
무인이 머리를 조아림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한 남궁전유는 무인에게 벌을 내리지는 않고, 갑자기 바로 옆에 있던 맹주에게 고함을 쳤다.
“맹주! 지천이는 맹의 요청으로 인해 혈교와의 싸움에 손을 보탰소! 한데, 이리 합당한 근거도 없이 혈교와 한통속이라고 몰아가는 거도 되는 거요?”
“죄송합니다.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하다면, 일이 끝나오?”
“아닙니다.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겠죠.”
남궁전유와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눈으로 당지천을 모함하던 무인을 쳐다보던 맹주는 옆에 있던 팽구용에게 명령을 내렸다.
“혈살단주, 혈교에서 보낸 세작일 수도 있으니 조사를 혈살단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혀, 혈살단이라니…….”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혈살단은 오직 혈교를 상대하기 위해 팽구용이 만든 조직이다.
당연히 혈교도에 대한 단원들의 적개심은 맹에서 제일이었고, 무엇보다 단주인 팽구용이 당지천과 깊은 친분이 있는 사이다.
그러니 혈살단에서 조사를 받는다는 건 반쯤 죽이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고, 설령 살아나온다고 해도 온전하게 나온다는 기대는 버려야 했다.
“그, 그것만은 제발…….”
“구금시켜라.”
무인이 항변하려 들자, 팽구용이 짜게 식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고, 말 끝나기 무섭게 혈살단원들이 몰려와 무인을 포박했다.
“자, 잠깐! 저는 그럴 의도가…….”
“조용히.”
“…….”
이어진 명령에 점혈까지 당한 무인은 심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애처롭게 주변 사람들을 쳐다봤지만, 이번엔 다들 그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렇게 당지천이 혈교도가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 무인은 시합장 모두가 볼 수 있게끔 크게 빙 돌면서 시합장을 빠져나가자.
남궁전유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말에 기운을 담아 말했다.
“맹주,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니 단순히 이 정도로 넘어가겠소. 허나! 만약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내 직접 나서서 그놈의 목을 칠 것이오. 알겠소?”
“명심하겠습니다.”
눈치가 없고 아둔한 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경고.
당지천을 모함하면 자신이 직접 움직이겠다는 태천검의 말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게 된 무인들은 혹여나 작은 의문이라도 말하지 않게끔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암, 명심. 또 명심…….”
“그 정도만 하시죠. 다들 힘든 싸움을 했으니 쉬게 해야죠.”
“맞네. 그 정도면 충분하네.”
“흠흠, 그렇다면야 여기까지 하지.”
남궁전유가 한 번 더 성을 내며 경고하려 하자, 당지천의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설마하니 다들 천하의 남궁전유의 말을 끊어버릴 만큼 간덩이가 부은 사람이 있을지 몰랐고, 또, 남궁전유가 순순히 받아들일지 몰라서 화들짝 놀라 그쪽을 바라봤다.
“어? 할머니? 할아버지?”
한데, 거기에 서 있는 건 당지천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아닌가?
당지천이 빙설린을 알아보자, 빙설린이 다가와 당지천을 안아줬다.
“아이구. 내 새끼.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고, 참 나쁘다 그치?”
“아니, 뭐 어쩔 수 없죠.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거야, 이 할미가 다 보고 온 거지.”
“다 보고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당지천의 물음에 빙설린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암만 하늘을 가려도 별이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진 않는단다. 그러니 옛날에 이미 봤다면 알 수밖에 없단다. 그도 그럴 게, 우리 하나뿐인 손주의 별이잖니.”
“……그렇군요.”
전혀 이해하지 못하긴 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당지천은 천고천과도 인사를 나눴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냐. 저번에 쓴 무공은 요긴하게 써먹었느냐?”
“예, 정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천고천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당지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멋쩍은 미소를 지은 당지천.
애도 아니고,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 쑥스러운 얼굴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매우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오는 대머리를 보게 되었다.
“…….”
“오랜만이구나.”
머리에서 광이 나는 맨들맨들한 대머리의 남자가 대뜸 인사를 건네오자, 당지천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물었다.
“……누구세요?”
“서, 설마 나를 잊어버린 것이냐. 내 비단결같이 고운 머리카락을 단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없애 버렸으면서 잊어버리다니! 정말 잔악무도하구나!”
“아…… 그 빙빙독각사?”
“그래, 그때 네게 결례를 저지른 게 바로 나다.”
“…….”
스스로 소개할 때 결례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는 게 좀 어이없긴 했지만, 그래도 안하무인하게 나오는 거에 비하면 나았기에 이해했다.
“근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신 거세요? 소중한 머리를 가져가서 도와주고 싶지 않으실 텐데…….”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지. 하지만 예전에 빙궁에서 원하는 거 하나 내어주기로 약속했잖냐. 아무리 밉다고는 하나 약속은 지켜야 의미가 있는 법. 그러니 널 도우러 온 거다.”
“밉긴 하신가 보네요.”
“……조금?”
지나치게 솔직한 소궁주의 발언에 당지천은 헛웃음을 잠시 지었다가, 이내 고맙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해독제 드릴게요.”
“……해독제라면 설마…….”
“머리가 다시 자라는 약이죠.”
“따흐흑…….”
어지간히도 머리가 소중한지 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소궁주.
심히 감격에 벅찼는지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더니 이내 펄쩍 뛰어오르며 당지천의 손을 붙잡았다.
“조카야 난 널 믿고 있었단다. 혹시 더 부탁할 거 없니?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들어주도록 하마.”
“아니,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만담은 거기까지 하거라.”
“켁…….”
몸에 달라붙은 벌레를 떼어내듯 소궁주를 집어 들어 저 멀리 던져 버린 천고천은 처음 인사할 때와 달리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인도자란 녀석이 당가에서 보자고 한 건, 원하는 것이 거기 있기 때문일 터. 하루빨리 당가로 돌아가서 그 녀석을 상대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지천아.”
“예, 할아버지.”
“안휘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혈교가 고독을 만든 곳이 있을 거다. 이미 철수한 만큼 지금에야 별거 없겠지만, 지천이 너는 거기에 들렀다가 당가로 돌아오너라.”
“고독이요? 거기가 어디예요?”
혈독은 혈교에서 준비한 비장의 수인 만큼 은밀하고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만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안휘 근처에 있었다니, 충격을 받은 당지천은 얼굴을 굳히며 장비와 짐을 점검했다.
“지쳤을 텐데, 바로 가도 괜찮겠느냐?”
“예, 사출기 몇 개가 부서진 걸 제외하면 당장 움직여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별거 없다고 하셨잖아요.”
“……네 의견이 그렇다면 알겠다. 지도는 일염이에게 건네줬으니 다녀오거라. 우리는 먼저 당가에 가 있으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친 당지천이 천일염을 비롯한 인원들과 함께 뛰어나가자,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천고천.
빙설린은 그런 천고천 곁에 다가와서 염려스럽게 물었다.
“지천이가 사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한계에 몰린 상황일 텐데…….”
“글쎄. 하지만 방법이 이것뿐이잖아.”
“그래도 아직 어린데…….”
“무림의 명운이 걸렸어. 무림이 사라지고 나면 지천이라고 무사할 것 같아?”
“…….”
천고천이 굳은 얼굴로 다그치자, 빙설린이 입을 다물었고.
그런 빙설린을 본 천고천은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까 보니 설화를 닮아서 그런지 마음이 강한 아이였어. 그러니 그냥 믿어.”
“알겠어요…….”
천고천의 말에 조금은 안도한 걸까.
빙설린은 한결 나은 얼굴로 천고천과 함께 당지천이 사라진 곳을 보며 한참이나 기도했다.
부디, 자신들의 손자가.
무림을 지켜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