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1화
아까 전.
당지천이 막 혈교주와 마주했던 시각.
귀빈석 쪽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들 물러나라! 잘못하면 말려든다!”
“다들 거리를 벌리시오! 끼어들어 봤자 방해일 뿐이오!”
-쾅! 쾅! 쾅!
천지에 울려 퍼지는 공기의 파열음에 비명을 지르듯 물러나라 하는 인원들.
남궁전유와 인도자가 공방을 겨루는 충격파로 인해 다가가는 것조차 위험한 경지에 이르자,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고, 무림맹이든 혈교도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거리를 벌리기 바빴다.
“천하제일인이라는 자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 좀 더 분발해 보아라.”
“날파리 같은 것이 조잘조잘 참으로 시끄럽구나.”
-쾅! 쾅! 쾅!
남궁전유의 검과 인도자의 손이 맞닿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파공음.
눈 깜짝할 새에 수십 합을 겨루고, 한 수, 한 수가 어지간한 고수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지만, 막상 검을 휘두르는 남궁전유의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웠다.
‘역시 통하지 않나.’
처음엔 그나마 손속을 겨룰 정도는 됐다고 생각했다.
한데, 고래가 바닷물을 빨아들이듯, 인도자가 시합장 내부의 혈독을 흡수하며 강하게 끌어당기고 나자, 안 그래도 강하던 인도자가 한층 더 강해졌고, 주먹에 실린 거력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이후로 나누는 공방은 남궁전유 쪽이 좀 밀리는 추세였다.
“본좌를 한낱 날파리라 칭하는 주제에 막상 날개 하나 제대로 꺾지 못하는구나.”
인도자는 하늘 위에서 고고히 내려다보며 도발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
반대로 남궁전유는 인도자의 주먹을 흘려내며 연격을 펼쳐내는 것만으로 벅찬 상황이었다.
‘역시 제왕검형을 펼치는 수밖에 없나.’
아까 전, 혈교주를 상대할 때와 달리, 인도자는 아직 사술을 쓰지 않고 있다.
그 말인즉슨, 사술을 쓰기 시작하면 남궁전유는 필패.
기회를 잡기도 전에 질 게 분명했다.
‘작은 틈만 보이면 바로…….’
그렇기에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제왕검형을 펼치려던 그때.
-쾅! 콰아앙! 쾅!
시합장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고.
인도자의 눈이 슬쩍 돌아가는 걸 본 남궁전유는 곧장 제왕검형을 준비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고수의 공방에서 한눈을 판다는 건 가히 치명적인 실수다.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던 남궁전유가 비기를 준비하던 찰나.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화들짝 놀라 행동을 멈췄다.
‘뭐지? 이 기운은? 사실 함정이었나? 인도자가 뒤로 이동한 건가? 아니, 인도자는 분명 앞에 있다. 그렇다면 분신인가? 아니, 그거라면 진작에 알아차렸을 거다. 그렇다면 지원이 붙은 건가? 허나, 그렇다기엔 인도자보다도 더 강한 녀석인 거 같은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기운.
남궁전유는 찰나의 시간에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오갈 정도로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뒤를 공격해? 허나, 그러면 앞은 무방비해지는데?’
흔들림 없는 결단이 필요한 때지만, 섣불리 결단을 내릴 수 없던 상황.
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남궁전유는 기시감을 느꼈다.
‘잠깐, 이 기운은…… 12대 무정검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데?’
분명 처음 느껴봄에도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기분에 남궁전유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어느샌가 뒤에 있던 의문의 고수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맹수에게 앞뒤로 둘러싸였다고 망설이다간 그저 한 끼 점심이 될 뿐이오. 눈에 보이는 호랑이라도 잡아채야 살 가능성이 생기오. 왜냐면 직접 본 앞과 달리, 뒤에 있는 건 그저 호랑이가 아니라 용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오.”
남들에겐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이지만, 엄연히 고수의 싸움에서는 시간 초과.
뒤에서 다가온 의문의 고수가 남궁전유가 빠르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걸 지적하자, 남궁전유는 분한 얼굴을 하면서도 아군이라는 판단에 안도감이 조금 깃든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
그러자,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흑의를 입은 노인.
그는 양팔에 붕대를 감은 채 무심히 남궁전유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그 노인과 마주한 남궁전유는 무심한 노인과 달리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천외천…….’
온 무림의 하늘이라고 불리던 남궁전유다.
당연히 한평생 그에 걸맞은 실력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한데, 오늘.
혈교의 인도자를 상대하며 그 긍지에 상처를 입었다.
인도자를 상대하면서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잘해봤자 승산이 3할 정도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전의가 꺾이고, 긍지가 깨질 정도까진 아니었었다.
어디까지나 인도자에게 밀릴 뿐,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뒤에 있는 게 용일 수도 있단 말이 이런 거였나.’
하지만 지금.
눈앞의 노인을 보는 순간.
하늘 위의 하늘을 직접 목도하는 순간.
남궁전유는 전의를.
천하제일인으로서의 긍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내 평생 살아오면서 당신 같은 실력의 고수가 있단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소.”
“내가 누구냐 물었소? 하하하. 궁금하다면 알려줘야겠지. 본좌는 바로…….”
갑자기 말투가 변모한 노인이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천마다!”
“천……마?”
마교가 멸망한 지가 언젠데, 스스로 천마라 칭하는 자가 나올 줄 몰랐기에 남궁전유가 멍하니 그 말을 따라 읊자.
뒤에서 황급히 달려온 노령의 여인이 천마라 소개한 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유, 참. 여기까지 와서 왜 이래 진짜. 천마는 무슨 얼어 죽을 뭔 천마야. 죄송해요. 저희 영감이 치매가 있어서…… 그쪽 분이 태천검 맞죠?”
“……맞소. 한데, 그쪽은 누구요?”
잠시 상황도 잊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전유.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한 마리의 사냥감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고수다.
근데 그런 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천외천외천쯤 되는 저 사람은 또 누구란 말인가?
“저는 빙설린. 지천이 외할머니 되는 사람이에요. 빙궁신녀라고들 부르곤 하죠.”
“빙궁신녀라니…… 빙궁에 있어야 분이 여긴 왜 왔소?”
“그거야,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잡것이 남의 집 귀한 손주를 죽이려 들어서 그런 거 아니겠나?”
빙설린에게 간 질문을 가로챈 노인이 천천히 왼손의 붕대를 풀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 남궁전유에게 어마어마한 기세가 쏟아졌다.
“…….”
다시금 극도로 긴장하는 남궁전유.
예전에 자신이 당지천에게 했던 것처럼 격으로 찍어 누르는 행위를 직접 당하자, 절로 몽골이 송연해졌고, 검을 잡은 손에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남궁전유를 돕는 손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빡!
“으이구,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오늘따라 왜 이래 진짜. 그러고 다른 데 한눈팔았다간 저 녀석이 우리 지천이 괴롭힌다니까요?”
“맞다. 인도자!”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강렬하기 짝에 없어서였을까.
한순간 인도자의 존재를 잊고 있던 남궁전유가 황급히 인도자 쪽을 쳐다봤는데, 웬걸, 인도자는 공격해 오긴커녕, 이상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하늘을 가렸을 텐데 어떻게 별을 읽은 것이지? 작은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걸 확인했는데…… 뭐, 이미 혈독도 읽힌 마당에 상관없나.”
공격해 와도 모자랄 판에 혼자서 이러쿵저러쿵 중얼거리던 인도자는 끝에 가서는 혀를 한 번 차더니 이내 담담히 읊조리듯 말했다.
“오늘 대계는 그른 것 같구나. 다들 돌아가자꾸나.”
인도자가 조용히 읊조렸음에도 시합장 전체에 인도자의 말이 울려 퍼지자, 무림맹의 인원들과 싸우던 혈교도들은 일시에 몸을 돌려 가까운 혈진에 몸을 던졌다.
“뭐, 뭐야? 어디 가는 거야?”
“이유는 나중에! 일단 잡아!”
일방적으로 밀리던 곳과 승기를 잡았던 곳.
둘을 가리지 않고 혈교도들이 일시에 달아나자, 무림맹의 인원들이 당황하면서도 후퇴하는 혈교도들의 뒤를 노리려 했다.
하지만 그걸 용납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이미 전의를 잃은 이들의 등을 노리다니, 참으로 간악하구나.”
그건 바로 어디선가 나타난 인도자였다.
“인도자?!”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저길 봐! 인도자가 한 명이 아니야!”
사실 정확히는 분신.
시합장 내부에 같은 모습은 물론, 같은 능력을 가진 수십에 달하는 인도자가 나타나 혈교도들의 뒤를 지키자, 무인들은 당황했다.
“섣불리 다가가지 마! 남창일검이 손짓 한 번에 당했어!”
“제길, 또 무슨 사술을 부린 거야? 분신이면 약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궁금하더냐? 그러면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알 만한 사람이라니?”
“““저기 있잖느냐.”””
무인의 물음에 인도자의 분신들이 일시에 당지천을 가리키자, 무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백독멸악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말 같지 않은 모함하지 마라. 우린 당 공자가 혈교를 막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맞아. 목숨 걸고 네놈을 막으려 든 백독멸악이 네 수법을 어떻게 아냐?”
“““알지, 알 수밖에 없지. 왜냐면 저기 있는 당지천은…….”””
말끝을 흐린 인도자의 분신들이 자신들의 가면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이니까.”””
“도, 독룡 당지독!”
“뭐?! 인도자가 독룡이라고?!”
“다들 속지 좀 말게! 기이한 사술을 쓰는 자가 얼굴 하나 못 바꾸겠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잖은가! 당가가 봉문에 든 게 3년 전. 그리고 혈교가 본격적으로 활개 치기 시작한 게 마찬가지로 3년 전 아닌가!”
당지독이 제 얼굴을 드러내자, 혼란에 빠진 무인들.
누군가가 얼굴을 베낄 수 있다는 말에 조금 잠잠해질 법도 했건만, 누군가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층 혼란은 더해졌고.
당지독이 가면을 벗는 걸 본 혈교주도 쐐기를 박듯, 자신의 가면을 벗어 던졌다.
“오랜만입니다. 삼공자님.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저, 저 사람은 천수나타 당소예?”
“당가의 대공자도 모자라서 2장로까지? 그렇다면…….”
혈교의 수장이 당가의 사람.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혈교의 제일 높은 자리를 맡고 있다는 걸 보게 된 사람들은 아연실색하며 당지천과 당지독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당당하게 쳐들어와서 한다는 일이 고작 도망치려고 얼굴 파는 일이냐? 실망인데? 거기다. 네 대계를 이루기엔 혈독도 너무 뻔한 물건이잖아.”
“혈독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니 부족함이 있더라도 상관없지. 물론 네가 직접 만들었다면 지금쯤 이곳을 전부 집어삼켰을 거다.”
“내가 그걸 대체 왜 만드냐? 너처럼 정신 나간 녀석들이 아니고서야 만들 이유가 없거든?”
“지천아, 너는 정녕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더냐? 저기 저들 봐라. 네가 범인으로 몰렸을 때, 제 문파의 아이들을 밀어주겠다고 증거 하나 없이 몰아붙일 만큼 부패한 것들이다. 또, 다른 놈들은 어떻더냐?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면서 죄책감 없이 남을 핍박하기 바쁘지…….”
“잡소리는 거기까지. 그놈들도 나쁘긴 한데, 사람으로 혈옥을 만드는 너보단 나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선 희생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미래에 평화로워진 강호에 내 직접 되살려줄 테니 잠시 빌린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대계가 이뤄지지 못하면 그들의 희생은 덧없게 될 터이니 나와 함께 정의를 지키자꾸나.”
“개소리를 참 길게도 하네.”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찬 당지천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남아 있는 혈교도가 없는 걸 확인하자, 비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시간 벌이는 이쯤 하면 됐지 않았냐?”
이어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중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빨리 꺼져. 등신아.”
“……이렇게 온전히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고맙다 동생아. 다음엔 집에서 보자꾸나.”
당지천의 욕설에도 꿋꿋이 인사를 건넨 당지독이 당소혜와 함께 혈진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언제 있었냐는 듯 일렁이며 사라지는 혈진들.
마치 신기루가 사라지듯 잠시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졌고.
마찬가지로 혈교도들의 시체도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단지, 남은 거라곤 치열하기 짝에 없던 전투의 흔적들뿐.
그렇게 혈교가 자취를 감추며 길고 길었던 싸움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