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0화
-콰아아앙!
뭔가가 터져 나가는 굉음과 함께 하늘이 터져 나가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저, 저기 하늘을 보게나!”
“이게 대체 뭔 일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
모두가 두 눈 뜨고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씻고 다시 쳐다봤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의 광경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변한 게 있다면 대치하던 혈교도들이 무릎을 꿇었다는 점뿐이었다.
“드, 드디어 이 눈으로 인도자님을 뵙게 되는구나.”
“영광스러운 날이다. 영광스러운 날이야.”
혈교도들이 저마다 감탄스러운 한마디를 뱉으며 고개를 조아리자, 하늘이 가라앉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가 이십 장 위에 멈춰 서더니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이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터벅, 터벅.
디딜 곳 없는 하늘을 걸음에도 선명하게 울리는 발소리.
해골 모양의 흰색 가면을 쓴 사람이 마치 하늘을 걷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내려오자, 그를 본 혈교도들은 더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세상의 중심을 뵙습니다!”
이전에 혈교주가 나왔을 때처럼 자신의 목숨은 도외시한 채 예를 표하기 바쁜 혈교도들.
이전보다 한층 더 경배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심상치 않은 자가 나왔음을 알 수 있었고.
당지천도 저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부르는 자가 누군지 잘 알 수 있었다.
‘목살지생, 혈교의 인도자. 그리고…… 당지독.’
과거 당가에서 반란을 일으킨 대공자이자, 이후 3년간 중원을 집어삼키려고 암약한 혈교의 최고 수장.
그리고 독을 제 맘대로 악용하는 자.
전생의 기준으로도, 당가의 기준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당지천의 적이었다.
“다들 부족한 실력이나마 대계를 위해 힘껏 애썼구나. 내 너희의 노고를 치하해 영원불멸의 대지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겠다. 그러니 잠시 돌아가 있거라.”
“감사합니다!”
혈교도들의 감사와 함께 혈진이 진동하자, 주변의 혈교도들이 물처럼 녹아내리더니 이내 혈진에 스며들듯 빨려 들어갔다.
“……사람이 물로 변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러면 되살아는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혈교에게 상식을 바라지 말게.”
되살아나는 것부터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러나 창백한 피부를 제외하면 자신과 꼭 닮은 인간이 물처럼 변하는 건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사람들이 아연실색하며 인도자를 쳐다보자, 인도자는 고고한 발걸음으로 땅을 밟으며 말했다.
“우매한 어린 양들이여. 무엇이 그리 두려워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냐? 나의 자비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계급을 따지지 않는다. 따라서…….”
“아미타불. 겉만 번지르르한 속없는 말로 무림 전역에 불온한 사상을 뿌리는 자를 누가 믿겠습니까. 배울 기회가 없던 양민들만이 감언이설에 속아 원치 않는 고통을 받고 있겠지요.”
귀빈석에서 스님 한 명이 인도자의 말을 끊으며 다가오자, 대치하고 있던 혈교도 한 명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무엄하다! 감히 인도자님의 말을 끊다니!”
혈교도가 분개하며 매섭게 검을 들고 달려오자, 태연한 얼굴로 혈교도를 마주 보는 스님.
대꾸조차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는지 말없이 주먹을 뻗을 뿐이었다.
……인간의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아주 거대하고 무거운 주먹을 말이다.
“태산과도 같은 주먹. 백보신권인가.”
“불심이 깊을수록 커진다더니만, 역시 천영대사답군.”
과장을 좀 보태서 태산과도 같은 크기의 주먹에 혈교도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단번에 당해 버렸고, 천영대사는 뒤이어 인도자에게도 주먹을 날렸다.
“어리석구나.”
혈교의 정예를 단번에 없애 버린 강인한 주먹.
인도자는 그런 거력이 담긴 주먹을 보고도 긴장은커녕, 그저 검지를 세운 채 갖다 대었다.
그렇게 검지와 주먹이 맞닿은 순간.
“크윽! 어째서!”
꺾여 버린 건 인도자의 검지가 아닌 천영대사의 백보신권이었다.
“어째서긴, 네 마음이 하찮아서 그런 것 아니더냐. 만약 내가 부처라는 자였다면 필시 실망했을 것이다.”
“…….”
불심이 약해서 졌다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모욕에 천영대사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네놈은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천영대사의 외침에 피식 미소를 지은 인도자는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대지를 찍어 누르듯 짓눌렀다.
-쿵!
그러자, 하늘에서 손바닥을 투영한 무형의 손이 내려앉아, 한순간에 천영대사를 짓뭉개 버렸다.
“천영대사!”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끔찍한 광경.
그와 동시에 몰려오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에 사람들이 눈을 돌려야만 했다.
“제길…….”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압도적인 힘.
사람들은 손바닥이 내려앉은 자리 그대로 자국이 남은 걸 보고 목살지생이라는 별호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별 같잖은 재주를 부리는구나.”
그러나 그런 인도자를 보고도 피식 미소를 흘리는 남궁전유.
참으로 가소롭다는 듯 가볍게 검을 들어 휘두르자, 인도자의 옆에 거대한 맹수가 할퀴고 간 듯한 세 줄의 검흔이 새겨졌다.
“역시 태천검…… 체력 안배를 하고 있던 건가?”
“그럼 그렇지.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는 자가 고작 혈교주와 동수를 이룬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천영대사의 일로 무림맹 측의 사기가 가라앉을 뻔했는데, 다행히 남궁전유의 모습에 사기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같잖은 재주라…… 지레 겁을 먹어 떨고 있는 네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개소리를 해도 좀 정성스럽게 해라. 네 개소리에는 감동이 없잖느냐.”
“뭐, 좋다.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훈육이 없으니 본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마.”
-쿠구구구구궁.
인도자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발을 구르자,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하는 시합장 내부.
하늘과 땅.
그리고 관중석에 있던 혈진이 일제히 굉음을 내며 혈색을 과시하며 좌우로 일렁이자, 사람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땅바닥을 부여잡았다.
“빨려 들어간다! 다들 꽉 잡아!”
“빨려 들어간다니? 무슨 소리야?”
“일단 숙여!”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몸을 숙이는 무인들.
한쪽은 그저 몸을 낮춘 채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천근추까지 써가면서 버티는 반대되는 상황에 당지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쪽은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왜 저쪽의 인원들은 빨려 들어간다고 하는 거지?’
지금 당지천이 서 있는 곳과 바로 뒤편은 선선한 바람만 느껴질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앞쪽의 인원들은 심각한 얼굴로 대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혈교도가 환각이라도 보여주나 싶어 유심히 봤는데,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리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인도자가 뭔가를 해서 그런 건가? 근데 거리 차이는 별로 없는데 왜 저기만 빨려가는 느낌이라고…… 잠깐, 세상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
“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당지천이 자신의 발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탄성을 내뱉고는 인원들이 버티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 공자! 갑자기 왜 그럽니까!”
안전지대에서 위험지대로 향하는 당지천의 돌발 행동을 보고 군사가 당황해서 외치자, 막 위험 지대에 들어선 당지천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인도자가 왜 굳이 혈교도를 혈진에 녹였을까. 왜 굳이 혈독을 이곳에 풀었을까. 그리고 왜 빨려 들어간다고 표현했는가. 그거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혈독이 쓰인 이유?”
“예, 지금 인도자는 혈독을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쓰는 겁니다.”
-쿵.
이전에 천열운무보를 펼치듯 발을 구르는 당지천.
무슨 사술이라도 썼는지 발을 구르자마자 한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건…….”
“혈독을 끌어당기는 힘을 상쇄시킨 겁니다. 아니, 정확히는 피 그 자체를 끌어당기는 힘을 상쇄시킨 거라고 봐야겠지만 말이죠.”
“피를 끌어당긴다…… 지금 인도자는 별다른 매개나 주술도 없이 자신의 몸에 혈옥을 정제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보면 되는 겁니까?”
“맞습니다.”
“설마하니 이런 게 가능하다니…… 사태가 심각하군요.”
이 정도 기예를 부릴 줄은 몰랐는지 군사가 굳은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당지천에게 말했다.
“당 공자. 혈독, 혈독을 없애야 합니다. 외부에 혈독이 얼마나 풀렸을지 모르겠지만, 안휘가 집어삼켜진다면 저자를 막을 방법이 없어질 겁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군사님께 부탁드리려 한 겁니다.”
빠르게 품을 뒤적인 당지천이 주먹만 한 구슬을 하나 꺼내 군사에게 건넸다.
“혈독을 정제할 수 있는 피독주입니다. 인도자가 등장한 이상 혈독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터이니, 정제에 집중하기보단 늘어나지만 않게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팽 대협과 합류해 외부의 혈독을 정제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당 공자.”
“그럼 가보겠습니다.”
잠시 품을 정리해 준비를 마친 당지천이 일염이와 암혈대를 대동하고 외부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안휘에 퍼진 혈독을 정리하러 가려던 찰나.
“어딜 가려고 하는 게냐.”
-챙!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매서운 암기에 발을 붙들렸다.
“혈교주가 대체 왜 여기에?”
본래라면 귀빈석에서 싸우고 있어야 할 혈교주가 갑자기 나타나 발목을 잡자, 당황한 당지천이 귀빈석을 쳐다봤다.
“……인도자 때문이었나.”
인도자가 혈술을 끌어다 쓰며 태천검을 비롯한 몇 명의 고수들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자, 당연하게도 무림맹 측이 밀렸고.
자연스레 상대할 자가 없어진 혈교주를 놓친 듯했다.
“아까부터 움직이는 게 눈엣가시였는데, 혈독의 비밀을 벌써 알아차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겠구나.”
당지천이 전황을 살피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제 말만 하는 혈교주는 핏빛 비수를 던지며 외쳤다.
“죽어서 그 죄를 갚거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없이 당지천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핏빛 암기.
투로를 예측하기 힘든 건 물론이요.
속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수십 개로 나뉘어 피할 곳 없이 사방을 빽빽하게 메웠다.
“공…….”
피하는 건 불가능.
막는 것도 핏빛 암기의 수가 많고, 혈독이나 다른 것으로 변모할 가능성도 있기에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렇기에 천일염이 여차하면 몸으로 막겠다는 생각으로 당지천의 앞을 막아서려 했는데.
그것보다 먼저 암기를 집어삼키는 움직임이 있었다.
“어딜!”
당지천의 뒤에서 나타나 단칼에 암기를 전부 땅으로 처박아 버리는 인영 하나.
그에 그치지 않고 단숨에 혈교주에게 달려들어 검을 내려찍었다.
“죽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갑자기 마주하게 된 검격.
어중간한 검격이라면 모를까, 한눈에 봐도 간결하고 패도적인 검격에 혈교주는 제대로 막지 못해 왼팔을 베인 채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공격자는 손에 감각이 별로였는지 뒤로 물러나 혀를 찼다.
“쯧, 얕았나.”
“아니, 팽 대협! 언제 오신 겁니까!”
“당연히 아까 전이지. 네가 혈독을 정화하러 바삐 뛰어다니는 거 잘 봤다.”
“아니, 혈독을 정화하러 다닌 거면 꽤 됐는데, 그걸 왜 가만히 보고만 계셨습니까? 그리고 밖에 혈교도 잡으러 가신 지 얼마 안 됐잖습니까.”
“그거야, 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냐. 기습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고. 그리고 혈교도 건은 지원이 있어서 맡기고 왔다.”
“지원? 지원 올 곳이 있긴 합니까?”
“그럼. 당연히 있지.”
“예에에?”
생뚱맞게 지원이 왔다는 소리에 당지천이 도무지 감을 못 잡자, 팽구용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어봐. 곧 들려올 테니까.”
“예? 뭐가 들려온다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쾅! 콰아앙! 쾅!
팽구용이 말끝을 흐리자마자 들려오는 천지를 울리는 굉음.
그걸 들은 팽구용은 다시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외가 사람들이 혈교도들을 박살 내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