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89화
무정검.
감정이 없는 검이라는 별호.
무림에서는 보기 드문 세습되는 별호이자, 무림 3대 정보 단체인 신화문주임을 알려주는 별호로 신화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알 만큼 유명한 별호였다.
당연히 무정검의 존재를 아는 모두가 무정검이 일말의 감정도 없는.
강시와도 같은 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
그 무정검이 분노하고 있었다.
“감히 내 앞에서 지천이를 모욕한 죄. 그 목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흉포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분노가 일렁이는 두 눈으로 수라혈강시들을 노려보는 천일염.
평소의 무표정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분노를 내비치며 압도적인 위엄을 보이자, 서로 농을 나누던 수라혈강시들은 얼굴을 굳혔다.
“무정검이 원래 이리 강했던가?”
“글쎄. 난 직접 상대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들은 건 죄다 소문뿐이어서 말이지.”
일반적인 혈강시들과 달리, 수라혈강시들은 격이 다른 인물들로 천하제일인은 아니었지만, 한 번쯤 천하십대고수의 말석을 차지했던 자들이다.
그런데 천일염이 그들을 압도하는 기세를 뿜어내 버리자, 자연스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집중하게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
“알겠네.”
당황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한가락 하던 인물들이다.
집중하잔 말 한마디에 금방 냉정을 되찾고, 순식간에 합을 맞춰 천일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천일염은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듯한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르고 있었다.
‘저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감히 지천이를 우롱하고, 모욕하는 녀석들을 개밥으로 던져주고 싶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노.
분노를 되찾고, 적을 깨달은 천일염은 전에 없던 감정에 이성이 마비되는 듯했고, 울부짖는 본능에 끊임없이 살심이 일었다.
감히.
감히 소중한 자신의 가족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끓어올랐고.
혈교와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것만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저놈들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다. 뒤지고 뒤져서 샅샅이 파헤쳐 단 한 마리의 혈교도도 살아 있지 않게끔 철저히 멸하고 싶다.’
눈앞의 혈강시들을.
그리고 혈교도들의 목숨을.
거기에 더 나아가 혈교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천일염은 자신의 속을 달래며 당지천의 존재를 떠올렸다.
‘허나, 지천이가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살심에 눈이 멀어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눈앞의 혈교도들을 치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지천의 안전보다 우선될 수 없는 법.
가까스로 진정한 천일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채 싸울 준비를 마쳤고.
때마침 뒷짐 지고 있던 강령부대주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설마하니 무정검과 다시 겨루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군. 그것도 조금이나마 감정을 되찾은 녀석과 말이지.”
“부대주. 무정검과 겨뤄본 적이 있소?”
“있지. 겨뤄본 수준이 아니야. 300년 전 내 목을 가져간 그놈이 바로 저놈과 같은 무정검이었거든.”
부대주는 과거를 떠올리듯 천일염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작 지나가는 여인 하나를 희롱하려 들었다고 절기까지 써서 목을 치던 걸 생각하면 제정신은 아닌 작자였지. 한데, 제정신이 아닌 것과 별개로 대단하더군.”
보통 사람들과 다른 어긋난 윤리관을 들이댄 부대주는 그것과 달리 아주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빼 들며 말했다.
“인도자님의 은총을 받아 깨어나고서부터 단 하루도 잊지 않았다. 아니, 단 하루도 잊을 수 없었다. 목이 달아나는 그 순간까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추악하고 아름다웠기에 결코 잊어서도 안 됐다.”
“하면 부대주가 매일 수련하던 검이 그걸 부수기 위한 검이었소?”
“맞다. 그리고 끝내 극복해 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부대주가 천일염을 노려보며 기수식을 취했다.
“오너라. 이번에는 내가 아닌 네가 당할 차례다.”
“…….”
누가 봐도 절기를 준비했다는 걸 알 만큼 부대주가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뿌리며 검을 치켜세우자, 부대주를 보고만 있던 천일염은 천천히 운을 뗐다.
“하늘의 명령을 듣는다고 하여도 내겐 네가 세상의 전부였다.”
씁쓸하게 묻어나는 천일염의 말 한마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수식을 취하던 부대주를 비롯한 수라혈강시들이 일시에 천일염에게 달려들었다.
“한데, 어느 날. 하늘이 천명을 내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죽이라고.”
다섯 방향에서 날아오는 제각기 다른 공격들.
하나하나가 절초인 만큼 쉬이 막을 수 없는 공격임에도 천일염은 백암중검을 치켜세울 뿐, 담담히 다음 구절을 읊었다.
“그건 절대로 엄수해야 하는 명령이나, 동시에 절대로 행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죽어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닿은 첫 번째 공격을 신묘한 움직임으로 쳐낸 천일염은 뒤이어 오른손에서 천잠사를 뽑아내 투로를 흐트러뜨리고, 세 번째, 네 번째 공격도 어렵지 않게 쳐냈다.
그렇게 부대주와 대면한 순간.
천일염은 백색의 검신에 기를 불어 넣으며 선언했다.
“그렇기에 나는 심사숙고 끝에 결정했다. 네가 아닌, 하늘을 부수기로.”
“지쇄붕호!”
패도적인 부대주의 중검이 기를 한껏 머금은 천일염의 중검과 맞닿자, 백암중검은 우습다는 듯 부대주의 중검을 단칼에 베어냈다.
“어째서…….”
부대주는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이 너무나도 쉽게 부서지자 절망했고.
천일염은 그런 부대주를 뒤덮듯이 수많은 실을 쏟아내었다.
마치 그물을 연상시키듯 촘촘히 뻗어나는 기의 실들.
파혈무갑에서 쏟아지듯 나오는 기를 머금은 실들이 수라혈강시들이 빠져나갈 공간이 없게끔 세밀하게 그들을 가뒀고.
이내 천일염은 백암중검으로 그것을 끊어내듯 검을 휘둘렀다.
“하여 진노로 하늘을 붉게 물들였으니.”
그러고는 절도 있게 돌아서고는 천천히 바닥에 던져둔 삿갓을 주워 뒤집어쓰곤.
뒤를 슬쩍 돌아보며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그를 나의 적이라고 불렀노라.”
그러자, 격노한 하늘에선 선혈과도 같은 생생하고 밝은.
붉은색 비가 쏟아져 내렸다.
* * *
천일염이 수라혈강시를 상대하던 시각.
먼저 앞서간 당지천은 쉴 새 없이 암기를 뿌리며 천열운무보를 운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신화문의 무공이 지키는 데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다섯 구를 혼자 상대하는 건 무리일 거야. 그러니 상황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도와주러 가야 해.’
혈교를 밀어내지 못하면 고립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천일염에게 과중한 짐을 지운 건 사실.
그렇기에 천일염이 당지천을 위해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하듯이, 당지천 또한 천일염을 위해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왼쪽은 추혼비독파접. 정면은 독시와. 오른쪽은 없어도 되겠어.’
한 번에 수 개의 암기를 던짐에도 일격에 처리할 수준에 맞춰서 던지는 당지천.
만약, 조금 강해 보인다 싶으면 주저 없이 천독림에서 가져온 독을 아낌없이 썼다.
‘혈교도가 제독할 수 있다고 하면 제독하기 전에 죽이면 그만이야.’
천독림의 독이 무한하지는 않은 만큼 혈교를 한 방에 처리한다는 건 다소 위험한 전략이었다.
왜냐면 하얀 피부를 가진 혈교도들은 영구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되살아나니까 말이다.
-공자님. 독을 아끼시는 게 어떠십니까? 장기전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큽니다.
-저도 압니다. 장기전이 될 가능성 큰 거. 감수하고 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당지천이 속전속결을 마음먹은 이상 소모가 심해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혈교도들을 처리했고.
그런 덕분에 당지천은 파죽지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당 공자! 이쪽! 이쪽이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내 이에 대해 꼭 보답하리다!”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지원이 도착하자, 환희에 찬 얼굴로 당지천을 반기는 무인들.
하나같이 당지천의 이름을 연호하며 잘 왔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는데, 당지천은 무시한 채 인원들을 군사에게 넘겼고.
뒤따르는 군사는 빠르게 무인들을 규합해 당지천의 뒤를 받쳤다.
“잔존 병력은 이쪽으로! 당 소협을 지원합니다!”
그렇게 당지천의 발자취에 따라 혈독은 정화되고, 무림맹 인원들과 합류하는 횟수가 늘어나자, 점차 전세는 무림맹 측으로 기울었다.
이제는 당지천이 앞서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무인들이 모이자, 군사가 당지천을 불렀다.
“지금부터 공세로 전환합니다! 길을 뚫으십시오! 당 공자는 잠시 와주셨으면 합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대체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당 공자. 보고 계십니까? 아까부터 혈독을 흡수한 지역에선 하얀색 피부의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빈도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럼 좀 쉽게 밀린다 생각했던 게…….”
“인원이 줄어서일 겁니다.”
군사의 말에 혈교도들에게 시선을 던진 당지천이 확연히 줄어든 인원수를 확인하자, 전세가 유리하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그렇다면 혈독을 정화할수록 혈교가 약해진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얼마나 더 정화하면 확실한 우위에 점하겠습니까?”
“반경 3장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반경 9m 언저리라는 군사의 말에 당지천은 대뜸 고개부터 끄덕였다.
아까부터 한 걸 생각하면 3장 정도는 금방.
빠르게 처리하고 천일염을 구하러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 바로…….”
“저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공자님.”
“……일염아. 언제 왔어?”
하지만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당지천 옆에 서 있는 천일염이 막아섰다.
“금방 온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데…….”
상대가 상대인 만큼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던 터라, 재빠르게 천일염의 상태를 눈으로 훑었는데, 다행히도 평소와 달리 붉게 물든 삿갓을 제외하면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것 또한 문제없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리고 그것보단 저쪽 먼저 신경 쓰셔할 것 같습니다.”
“저쪽이라니?”
천일염이 귀빈석 쪽을 가리키자, 당지천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손가락을 따라갔다.
귀빈석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한가락 하는 사람들로 혈교에 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에 처음 귀빈석의 상황을 보게 된 당지천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태천검과 혈교주가 동수를 이룬다고?”
천하제일인인 남궁전유과 혈교주와 동수를 이루고 있었기에.
“뭐야, 왜 저래?”
“혈교주가 쓰는 사술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전에 본 적 없는 기이한 사술을 쓰는 혈교주.
순순한 무공 실력이라면 뒤질지 몰라도, 암기와 함께 사술을 동시에 몰아치자, 남궁전유의 공격이 그때마다 상쇄되었다.
“혈교주가 태천검과 싸워 이길 정도라면 인도자는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인도자는 눈짓 한 번에 사람을 죽이고, 손짓 한 번에 사람을 살린다는 소문을 가진 혈교도의 우두머리.
만 혈교도를 통솔하는 위험한 사람임에도 정체는 물론이고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그저 목살지생으로 불리는 이였다.
한데, 그런 인도자도 아닌, 그 밑에 있는 혈교주와 태천검이 동수를 이루는 걸 보게 됐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잖는가.
“제발 인도자만 나오지 않기를.”
그렇기에 불안한 마음에 인도자만큼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 읊조림을 하늘도 들었을까.
-콰아아앙!
이번엔 굉음과 함께 하늘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