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87화
“천열운무보?”
당지천이 발을 굴러 흑풍대주의 눈앞에서 직접 천열운무보를 펼쳐 보이자, 흑풍대주는 턱이 빠졌는지 입을 쩍 벌린 채 당지천을 보며 말했다.
“천열운무보라니…… 그거라면 과거 광창신투의 무공 아닙니까? 분명 하늘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연기를 뿜어내 모습을 감추는 무공이라 들었습니다만…… 헛.”
순간 놀라서 강시가 공격해 오는 걸 놓칠 뻔했던 흑풍대주가 재빨리 강시의 철퇴를 피해내면서 당지천 쪽으로 붙었다.
“기인분과 연이 닿아 독무를 뿌리게끔 개량을 거친 상태입니다. 지금 독을 끌어모으는 것도 그 덕이고요.”
-쿵!
당지천은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천열운무보를 펼쳐 보이자, 흑풍대주는 물론이고.
저 멀리서 보던 군사조차 감탄한 얼굴로 당지천을 쳐다봤다.
“그러니 발목 잡기라도 좋습니다. 시간만 좀 벌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흑풍대주가 뒤늦게 뒤따라온 강시들의 앞을 막아서며 길을 열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력이 부족해서 2구를 막는 게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그대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2명밖에 못 막은 건 아쉽지만, 강시들이 느리니 이 정도면 충분해.’
당지천은 흑풍대주가 강시들을 전부 막지 못함에도 개의치 않고 발을 놀렸다.
왜냐면 생각 외로 강시들의 행동이 굼떴기 때문.
‘거의 생강시에 가까운 녀석들이 100구 넘게 있다길래 쫄았는데, 혈강시라 그런지 느린 건 어쩔 수 없나 보네.’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뿌리고 외공을 익힌 듯 몸의 내구도가 결이 다르긴 했으나, 생강시나 활강시가 아닌 혈강시였던 탓에 속도가 느렸다.
당지천이 뛰쳐나온 시점에 습격하려 했는데도, 흑풍대주가 먼저 뛰쳐나온 게 그 방증이었다.
그렇기에 당지천은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 생강시에 가까운 건 100구 중 극히 일부. 고작 해봐야 다섯 손가락 안에 꼽겠지. 이 정도면 내가 굳이 손을 거들지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이 유리해질 거야.’
단단하지만 느린 만큼 하나씩 수를 줄인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
당지천이 속으로 그런 판단을 마치자마자 혈교의 강령대주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썼다.
“깨어나라!”
명령을 내린 이후로 가만히 있던 강령대주가 혈옥을 꺼내 손에 쥐고 외치자, 갑자기 서 있던 강시들은 물론이고.
아까 전, 당지천의 암기를 맞고 쓰러진 강시까지 전부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양안에 붉은 안광을 뿌리기 시작했다.
“옘병, 그럼 그렇지. 어쩐지 쉽다 했다.”
좀 쉽게 가나 했더니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반격해 오자, 당지천은 한숨을 푹 쉬었고,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가기 위해 바삐 발을 놀렸다.
“흐음……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군. 처음부터 깨우지 왜 이제야 깨워서 때를 놓친단 말인가?”
“잡담하기엔 상황이 안 좋은 듯하니 빨리 움직이세. 내가 이쪽을 막을 테니 이교도는 부탁하겠네.”
“아까 보니 암기를 던지는 솜씨가 심히 예사롭지 않더군. 중간에 투로가 예측할 수 없게 변하니 주의하게나.”
“알겠네. 그럼 가세.”
아까의 무력한 모습은 장난이었다는 듯 태연히 말을 하며 움직이는 강시들.
속도는 물론이고 지성이 온전히 돌아왔는지,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때와 달리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며 단번에 당지천의 앞과 뒤를 점하려 들었다.
“조심하십시오! 당 공자!”
확연히 달라진 강시들이 순식간에 당지천의 앞을 가로막자, 흑풍대주가 다급히 당지천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런 흑풍대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당지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하는 거라곤 그저 나지막한 부탁뿐.
“부탁합니다.”
“당 공자! 죄송하지만 제 실력으론 한 구도 제대로 막지…….”
당지천의 부탁에 아연실색한 흑풍대주가 당지천을 막아 세우려 했지만, 잠시 뒤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당장에라도 당지천을 썰어버릴 듯했던 강시들이…….
“존명.”
누군가의 대답과 함께 수십 조각으로 분쇄됐기에.
* * *
아까 전.
처음 계획이 어그러지고 혈진에서 혈교도가 쏟아지듯 밀려 나왔을 때.
당지천은 혈교가 강령대라는 패를 바로 꺼낼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당황하긴 했으나, 그 덕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게 하나 있었다.
‘혈교의 노림수에는 혈독. 이게 제일 중요한 물건이다.’
무림맹이 혈교를 예의 주시하듯, 혈교도 무림맹을 예의 주시했을 게 분명했던 상황.
당지천이 혈독을 봉할 방법이 있다는 걸 보여준 시점에 강령대가.
정확히 당지천을 노리고 나왔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 혈독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물건이란 의미였다.
‘그러니 이걸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아내야 해.’
단순히 독무를 펼쳐 사람을 죽이려고 한 거라면 이렇게 막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요주의 인물로 꼽히는 고수들에겐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혈교도 알고, 또, 더 효율적인 독은 따로 있었을 테니 말이다.
‘예전에 당지독이 당가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왜 당가를 노리냐는 물음에 분명 독이 대량 학살하기 쉬워서란 말을 했었지. 그렇다면 당지독이 원하는 건 대량 학살이라는 건데…… 과연 오늘 침공에 고독으로 만든 혈독을 쓴 게 과연 우연일까?’
혈교의 혈독이 고독으로 만들었다지만, 피를 매개로 증식하는 형태이기에 양 자체는 많았을 거다.
그간 수많은 혈옥을 만들어 낸 혈교고, 필요하다면 인신공양을 하면 됐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오늘 침공에 혈독을 쓰는 게 하등 이상할 건 없었다.
‘아무리 양이 많다고 한들, 이곳엔 혈독이 안 통할 고수들이 더 많아. 거기다. 대비책을 세웠다는 것쯤도 예상했을 테니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양이 많은 것과 별개로 직접 보여줄 이유는 전무.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시합장이 아닌 다른 곳.
안휘가 아닌 다른 지역에 혈독을 푸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풀었다면 막을 자가 없었을 테고, 혈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상 손쓸 도리는 없어지는 게 당연해. 그런데도 여기에 풀었다는 건 이곳에 풀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
혈독으로 매개로 무언가를 이루거나 아니면 혈독이 특수한 환경에서만 작동하거나.
혹은 독성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기에 이곳에 풀은 건지 확실히 알 방법은 없었다.
또한, 혈교의 노림수가 무엇인지까지는 정확히 추측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럼에도 당지천이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으니.
혈교의 계획을 막으려면 혈독부터 막아야 한다는 점이었고.
혈독을 막기 위해선 눈앞의 강령대부터 치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일단 강령대부터 뚫고 나서 차차 알아보자고.’
그렇기에 당지천은 방진에서 뛰쳐나오기 전에 강령대를 뚫을 전략은 미리 세워뒀었다.
바로 암혈대를 통해서 말이다.
“부탁합니다.”
“존명.”
당지천의 부탁과 동시에 들려오는 무언가가 조여지는 소리.
-끼리릭.
그 소리와 함께 앞을 가로막던 강시들이 수십 조각으로 분쇄되었고, 사람들은 뜻밖에 상황에 심히 당황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에 피아 구분 없이 다들 화들짝 놀라 당지천의 쪽을 쳐다봤는데, 쳐다봄과 동시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당지천의 코앞에는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5명의 흑의인.
암혈대가 서 있었기에.
“……이 자리에서 마공을 보게 될 줄이야. 이거 참 기우한 인연이군.”
“우리가 혈강시가 된 시점에서 기우할 게 뭐 더 있겠나. 그저 우리 할 일이나 합세.”
동료가 조각되어 흩뿌려졌음에도 혈강시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혈강시로 되살아났다고는 하나, 그들도 한 명의 고수들.
생전 이런 상황은 몇 번이나 겪어봤기에 갑작스레 나타난 암혈대를 보고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미리 알려주지 않은 윗사람을 향해 불평을 내뱉을 뿐.
“부대주도 악취미군. 분명 눈뜬 순간 알아차렸을 텐데, 알려주지를 않는다니…….”
“잡담할 시간에 공격이나 하게나!”
사람들이 혼란해하고, 강시들이 대화하는 상황을 틈타 도망치는 당지천.
그가 저 멀리 달아나 버리는 걸 본 강시들이 뒤늦게 그 뒤를 따랐다.
“이교도를 잡아라!”
강령대주가 뭔가 수작을 부린 탓인지 처음 달려들 때와 달리,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강시들.
당지천이 열심히 천열운무보를 펼쳤지만, 성취가 높지 않은 탓에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호위 대상을 지킨다.”
하지만 당지천에 닿기도 전에 암혈대가 달려들자, 검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쓸려 나가듯 밀렸다.
“이 녀석들 대체 정체가 뭔가? 고작 5명인데 틈이 보이지 않잖는가!”
“난들 알겠나! 쓰는 무공부터가 심히 이질적이잖은가! 거기다, 합이 너무 잘 맞네!”
공격하는 족족
그물에 잡히듯 갈려 나가는 강시들.
아무리 강령대가 합을 맞추는 훈련을 했다고 한들, 강시들의 태생부터가 무림 곳곳에서 마구잡이로 데려온 이들인 만큼 온전히 합이 맞지 않았다.
반면에, 암혈대는 달랐다.
“…….”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눈만 마주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경지.
비록, 호위보다는 파괴에 치우치긴 했으나 오직 사람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고, 무인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열 배가 넘는 엇비슷한 실력의 강시들을 상대로도 밀리기는커녕, 압박할 수 있었다.
“어차피 되살릴 거다! 강행돌파 해라!”
강시들은 이대로는 당지천을 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전략을 강행돌파로 바꿨다.
아까와 달리, 상처를 신경 안 쓰는 선이 아닌.
아예 목숨을 내던진 채 스스로 동귀어진을 노리며 달려들자, 암혈대도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려나며 당지천과 점점 가까워졌다.
“좋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지지부진하게 나아가던 아까와 달리,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강령대주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피해가 크긴 했으나, 어차피 되살리면 되는 일이니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이 또한 당지천의 예상대로였다는 점을 말이다.
‘역시 강시는 되살리면 그만이란 식으로 쓰는구나. 계획대로다.’
강령대주가 미소를 짓는 걸 힐끔 쳐다본 당지천은 마찬가지로 미소를 흘렸다.
혈교가 쓰는 혈강시의 강점은 바로 시체라는 점.
생강시와 활강시와 달리, 강함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얼마나 뭉개지든, 얼마나 산산조각 나든 간에 혈옥만 충분하다면 다시금 살려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말만 혈강시지. 내가 익히 아는 물건일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지.’
당지천은 당지독이 쓰는 사술이 어디의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눈앞의 이들도 자신이 생각한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저 강령대를 상대할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저것들이 내가 생각한 그것들이 맞다면 뼈를 녹여 버리면 그만이야.’
자고로 강시는 시체로 만드는 것.
아무리 혈교가 날고 긴다고 해도 뼈 한 점 없는 시체로는 혈강시를 만들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당지천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지금!”
갑자기 뒤돌아서며 암혈대를 향해 독병을 꺼내 던졌다.
바로.
단 한 방울로도 뼈를 녹여 버릴 수 있는.
플루오린화 수소가 든 독병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