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84화
-쩡!
깨질 수 없는 것들이 하나둘 파편을 흩날리며 깨졌다.
귀를 찌르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하늘과 땅이 불협화음을 내며 빨갛게 물들었고, 자결한 혈교도들의 피에 맞닿아 침식되듯 그 반경이 점점 커져 나갔다.
“뭐, 뭐, 뭐, 뭐, 뭐야?”
예상은커녕.
상상치도 못한 상황.
설마하니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자결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서 있는 공간이 전부 깨져 나갈 거라고 누가 생각하기나 했겠는가.
-끄어어어억.
거기다, 자결한 사람들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듯 빨갛게 물든 바닥에 흡수되자, 관중들은 단체로 비명을 내질렀다.
“히이익!!”
“사, 사, 살려줘!”
“다, 당황하지 말게나! 예로부터 천붕우출이라고 하였으니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나갈 수 있을 걸세!”
천붕우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사자성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로 아무리 어려운 경우에 처하더라도 살아나갈 방도는 있음을 의미하며 지금 상황에 아주 적합한 말이었다.
“천붕우출? 천붕우출?! 그딴 개소리 지껄일 시간에 빨리 도망칠 곳이나 찾아!”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얽히며 도망치기 바빴고, 삽시간에 시합장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슬! 사슬을 가져와!”
“혈교도들을 끌어내! 혈진에 흡수되지 않게끔 막아!”
“관중 중에 혈교도가 더 있을지 모른다! 예의 주시해!”
그래도 다행히 미리 언질을 듣고 배치되어 있던 수호각의 인원들이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하자 다른 인원들도 냉정을 되찾았고, 빠르게 혈교도들을 진압해 나갔다.
“군사님, 혈진은 어떻게 됐습니까?”
“금방. 금방이면 됩니다.”
거기다, 다른 곳에선 소청휘가 혈진을 그렸다는 걸 알게 된 군사가 제갈세가의 손님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됐습니다! 삼재의 일원을 흐트러뜨리는 목입니다! 이것만 시합장 정가운데에 꽂아 넣으면 됩니다!”
“알겠소!”
군사가 뭔가가 가득 적힌 나무 막대기를 내밀자마자 곤륜파의 대표가 직접 잡아채 시합장으로 뛰어나갔다.
“막아라! 저 이교도 무리를 막아라!”
“지켜라! 혈교도가 다가오게 해선 안 된다!”
막으려고 시합장에 뛰어드는 혈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지키려고 시합장에 뛰어 내려오는 무림맹의 인원들.
그들 사이에서 신묘한 발걸음으로 나아간 곤륜파의 대표는 자잘한 방해들을 제치며 시합장에 도달했고, 순식간에 시합장 정중앙에 도달했다.
“여기까지다!”
그렇게 혈교의 침공이 손쉽게 무산되려던 찰나.
시합장 위에 올라선 곤륜파의 대표가 우뚝 멈춰 서더니 갑자기 완전히 굳어버린 게 아닌가?
“벽력 도장! 어서 꽂지 않고 뭐 하는 거요!”
“…….”
다른 이들의 호통에도 곤륜파의 대표는 미동도 않았다.
단지, 하는 것이라곤 천천히 자신의 검을 빼 드는 일뿐이었다.
“사형! 무슨 일이 생긴 거요? 내가 지금 가겠소!”
가만히 멈춰 서서 검을 빼 드는 것이 심히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 판단한 곤륜파의 인원이 혈교도들을 제치고 자신의 사형에게로 달려갔다.
“흐흐.”
그러자, 갑자기 실소를 흘린 곤륜파의 대표가 이내 천천히 돌아서더니 한순간에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그러고는…….
“제물이 하나 더 왔구나.”
“사, 사형!”
기습적으로 자신의 사제에게 검을 휘둘렀다.
“아…….”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탓에.
또,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공격을 받은 탓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진 곤륜파의 인원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죽음을 목전 앞에 둔 상황에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사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챙!
그러나, 어디선가 암기가 날아와 목 앞에 드리운 검을 쳐냈고.
“괜찮으십니까?”
이어서 앞을 막아서는 인영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막아선 사람의 별호를 읊었다.
“백독멸악? 어, 어떻게 사형의 검을? 아니, 그보다 사형은 대체 왜 혈교에…….”
“충격이 큰 것 압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물러나시죠.”
당지천의 손짓에 따라 감독관으로 위장했던 사칭범이 곤륜파의 인원을 뒤로 밀어내자, 곤륜파의 인원은 순순히 뒤로 물러나면서도 눈앞에 칼을 드리운 인물에게 물었다.
“사형. 어째서 혈교에 넘어간 건지 묻지 않겠소. 한데, 나를 왜 공격한 것이오? 우린 한날한시에 뜻을 같이한 사이 아니오? 정도를 배신했다고 한들, 나를 배신하는 건 말이 안 되잖소. 한데, 대체 왜…….”
“심판의 날이 도래했으니 미천한 우리는 하늘의 인도에 따라야 마땅하다. 그러니 예외는 없다.”
“지금 그게 무슨 미친 소리요! 천지신명께서 노하실…….”
“우리는 우리의 육신과 혼을 바쳐 순결한 한 줌의 피로 되살아날지어다.”
곤륜파의 대표는 사제의 말을 단박에 자르고는 소청휘와 똑같이 제 배를 가르고, 피 웅덩이에 스스로 몸을 바쳤다.
-쿠쿠쿠쿠쿵.
그러자, 진동하는 하늘과 땅.
깨졌던 하늘에서.
그리고 붉게 물든 바닥이 점점 하얗게 물들더니 배를 가르듯 열리고 인영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판의 때가 도래했다!”
드디어 시작된 혈교도들의 침공.
기존에 있던 혈교도들은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할 정도로 수백, 수천에 이르는 혈교도들이 쏟아지며 시합장을 메우기 시작했고 닥치는 대로 정파인들을 공격했다.
“혈교도들을 막아라!”
“이곳저곳에 퍼지지 않게끔 틀어막아!”
혈교도들의 대규모 침공에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빠져 버린 시합장.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없다고 생각될 만큼 혼란의 극치였는데, 무림맹에는 안타깝게도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의 육신과 혼을 바쳐 순결한 한 줌의 피로 되살아날지어다!”
조금 불리해지자마자 스스로 배를 가르며 피를 쏟아내는 혈교도들.
단순히 죽여서 끝내면 된다면 쉽게 처리하겠지만,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쳐 버리니 무림맹 인원들은 도무지 갈피를 못 잡았다.
“젠장…… 차라리 죽이는 게 쉽지. 이러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군사님은 별말씀 없으셨어?”
군대가 아니기에 원래라면 명령에 의존하지 않는 무인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한시라도 빨리 군사의 명령이 내려지길 바랐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사! 분명 혈교에 대한 비책이 있다고 했잖소! 한데, 이게 뭐요! 혈진도 제대로 못 막아, 막을 수단은 배신자에게 넘겨, 대체 무슨 비책을 준비했길래 이 모양 이 꼴인 거냐고!”
“비책 같은 건 없습니다.”
“아니, 비책이 없다니…… 좋소, 상황이 안 좋으니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일단 혈교도들이 더 쏟아져 나오지 못하게 혈진이라도 막아야 하는 거 아니오?”
“혈진은 안 막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못 막습니다.”
“아니, 진법에 대가라는 제갈세가가 모르겠다고 하면 대체 어쩌라는 것이오! 그냥 뒷짐만 지고 있지 말고 저기 가서 좀 뭐라도 해보시오!”
무림맹의 인사 한 명이 시합장을 가리키며 군사를 다그치자, 군사는 여유로운 얼굴로 품에서 부채를 꺼내 펼치며 말했다.
“무적지근이 펼친 진은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지금 혈진이 완성되고 있는 건 시합장 곳곳에서 자결한 혈교도들 때문. 혈옥을 한가득 가지고 있던 혈교도들이 자신들의 피를 매개로 만들어낸 아주 강력하고 위협적인 혈진입니다. 그러니 단시간에 해진하려면 이쪽에서도 그만한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아니, 그럼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벽력 도장에게는 왜 해진할 방법이라며…….”
“하나 여쭙겠습니다만, 광운휘 도장께서는 왜 다른 분들이 나서지 않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뭣? 그게 무슨…….”
군사의 말에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고서 위화감을 느끼는 광운휘.
급박한 상황이기에 다들 어딘가로 뛰어가거나 긴장 어린 모습이라고 생각했건만, 이상하게도 군사 주변에 있는 사람 과반수 이상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알았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설마…… 이 모든 게 예상된 상황이란 말이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막을 순간은 많았다.
각 문파의 대표들이 원로급이라고 한들, 혈살단주나 수호각주를 비롯한 쟁쟁한 고수들에 비하면 뒤처지는 실력이었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천하제일인인 태천검 남궁전유가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몸을 움직였다면 혈진을 막지 못했더라도 위력이 줄어드는 건 당연했을 테고, 자연히 혈교를 휘어잡는 데도 수월했을 거다.
“혈교의 의도를 모두 짐작하진 못했으나, 스스로 머리를 아가리에 들이 밀어줄 생각인 것 같더군요. 그러니 당연히 받아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배신자도 걸러내고 딱 좋은 상황이었죠.”
“그걸 왜 우리에게…… 아니, 알려주는 게 더 멍청한 짓이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그래서 혈교를 잡을 계획은 있는 거요? 상황을 보아하니 저쪽도 아직 제대로 된 패는 안 깐 거 같소이다만?”
“그에 대해선 수호각과 혈살단을 주축으로 준비를 해놨습니다. 바로 저렇게 말이죠.”
군사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팔 한쪽이 잘려 나간 혈교도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흩뿌리는 광경이 보였다.
“저건…… 독이오?”
그 예상이 맞다는 듯 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독이 뿌려진 곳에는 얼마 안 가 고성이 튀어나왔다.
“켁…….”
“독이다! 혈교도들이 독을 풀었다!”
양은 많으나 질적으로 많이 떨어지던 혈교도들이 하나둘 지급된 독을 사용해 독무를 뿌리자, 잠시간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모두 숨을 참아라!”
“독을 이미 들이켠 자는 물러나서 속을 다스리는데 집중하도록!”
하지만 혈교도가 우위를 점한 건 정말 잠시에 불과한 짧은 시간.
혈교에서 독을 쓴다는 걸 아는 군사가 대비를 안 했겠는가?
확실하게 통제되는 수호각과 혈살단을 비롯한 무력 단체에는 피독주를 지급했고, 독의 종류에 대한 대응 훈련도 시켰다.
그렇기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대응하자, 독에 당하는 인원은 매우 적었고, 당연하게도 승기는 무림맹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망타진을 노렸다니…… 군사는 대체 몇 수를 내다본 거요?”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 아까 광운휘 도장께서 이야기하셨듯이 이건 전초전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한 수 이겼잖소? 이제 독기만 날려 버리면 전초전은 끝일 테니 말이오.”
광운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인들이 속속들이 한곳으로 모였고, 이어서 무슨 진 같은 걸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모두 풍운진을 준비해라! 독무부터 날려 보내도록 하겠다!”
얼마 전, 군사가 고안한 간단한 진.
바람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덕분에 짧은 시간임에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익힐 수 있던 풍운진을 펼치자, 바람 한 점 없던 시합장에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다들 깨끗이 날려 보내라!”
그렇게 무림맹의 인원들이 산들바람에 독무를 날려 보내며 승기를 굳히려던 그때.
“동작 그마아아아안! 날리면 안 돼!”
갑자기 달려든 당지천이 사자후를 터뜨리며 그들의 행동을 가로막았고.
그와 동시에.
-쿵!
발 구름을 굴러 하늘 멀리 퍼져 나가려던 독무를 땅바닥에 처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