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83화
드디어 찾아온 용봉지회 결선.
항상 후기지수에서 제일로 꼽히던 부동의 1위, 무적지근 소청휘와 이번 용봉지회에서 파란만장한 돌풍을 일으킨 주역, 백독멸악 당지천의 대결이 있는 만큼 시합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이 모였다.
“정말 의외였소. 설마하니 백독멸악이 결선까지 올라올 줄이야!”
“설마하니 독과 암기도 없이 그렇게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지 누가 알았겠소. 더군다나, 만사빙귀의 조카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본선에서 올라와선 상대랑 같은 무기를 들고나와 무공을 파훼했으니…… 솔직히 난 한두 번뿐인 요행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결선까지 올라왔으니, 참으로 기대되는데…… 잠간, 저기 좀 보게나. 태천검 남궁전유일세! 설마하니 용봉지회에 행차할 줄은 몰랐는데 결선이라 그런지 자리를 빛내주는구먼.”
“태천검뿐만 아니라 창천일창과 도제까지. 보기 힘든 고수가 무려 셋이나 있소.”
“한데, 오늘따라 유독 사람이 많은 것 같지 않소? 왠지 모르게 다들 이쪽을 주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와 보니 그렇구려. 본디 초대 손님인 만큼 한곳에 모여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다들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구려.”
무공에 연이 깊지 않은 관중들이 보기에도 시합장을 찾은 고수들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원래라면 손님석에서 시합장 안을 봐야 할 그들이 왠지 모르게 관중석 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관중들이 위화감을 느낄만도 했다.
“거기다, 아무리 결선이라지만, 유독 무림맹의 무인들이 많은 것 같지 않소?”
언제 어디서나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난동을 피우는 사람은 있었기에 결선 이전에도 시합장 안과 밖을 드나드는 입구에 무림맹의 무인들이 배치되어 있긴 했다.
허나, 그 수는 고작 몇 명에 불과했지, 지금 보이는 것처럼 십수 명이 넘게 서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징조인가…….”
“예끼, 이 사람아. 불길한 소리 하지 말게. 흉흉한 시기에 열린 용봉지회인 만큼 무림맹에서 신경 써서 대비한 거겠지. 설마하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사람들을 들이겠는가.”
“맞네. 그리고 저기 보게나. 막상 맹의 인사들은 다 시합장을 내려다볼 뿐, 관중석을 보지 않잖는가.”
초대받은 손님들이 관중석을 보는 것과 달리, 시합장에 눈을 고정한 채 떼지 않는 고수들.
관중들은 그런 고수들을 보고 초대받았다 생각한 손님들이 잠시 고용된 거라 생각했고,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무적지근 소청휘라는 걸 전혀 모른 채 말이다.
“지금부터 용봉지회 결선을 시작하겠습니다! 양 참가자 입장!”
감독관의 외침에 따라 각각 시합장 왼편과 오른편에서 들어오는 당지천과 소청휘.
양측 다 쏟아지는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적당한 긴장을 유지한 채 위풍당당하게 시합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
그리고 그 뒤를 말없이 따라 들어오는 삿갓을 쓴 무인들.
그들은 군사와 맹주가 힘을 써준 덕에 보조 감독관 명목으로 시합장에 들어올 수 있게 된 신화문의 호위들이었다.
-손을 빌려줄 줄은 몰랐는데 몸소 행차하다니 심히 의외로군.
관중석에서 시합장을 내려다보는 태천검을 보게 된 천일염이 조금 놀란 듯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남궁전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
-네놈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길래 내가 안 올 거라고 본 거냐?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그리고 세가를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는 무뢰배. 지천이같이 막 자라기 시작한 새싹도 주저 없이 밟아버리려던 인의를 저버린 자.
-……거, 예전 일은 그만 좀 넘어가지. 힘을 합쳐야 할 때가 아니더냐.
-죽다 살아나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겠나?
-크흠,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솔직히 무림맹이 어찌 되든 내 알 바는 아니다. 허나, 그게 제집 앞마당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가문의 득실을 따진다고 해도 아직 인의를 등질 정도로…….
-아니, 인의는 그날 확실하게 등졌다.
-……그래, 인정하마. 인의를 등지긴 했으나, 혈교를 살려둬 봤자 이득 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이젠 당지천을 살려야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됐느냐? 나 참, 뻔히 다 알 만한 이야기를 왜 굳이 해야 되는지…….
남궁전유가 다 알면서 왜 굳이 이야기하게 만드냐며 힐난 눈으로 천일염을 내려다보자, 천일염은 조금 화가 서린 듯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호위 대상이 누군가의 일방적인 선택에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라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은 없다.
-그렇다면야 환영이다.
분노의 소재로 삼았다는 천일염의 말에 오히려 미소를 짓는 남궁전유.
이미 당지천을 포용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천일염이 당지천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면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잇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무정검의 본 실력을 보게 된다는 점에 기대가 컸다.
‘무정검도, 그리고 저 녀석도 심히 기대되는구나.’
그렇기에 흡족한 미소와 함께 시합장을 내려다보자, 때마침 감독관이 당지천을 호명했다.
“백독멸악 당지천 앞으로!”
감독관의 호명에 쏟아지는 환호와 함성.
그 속에서 함께 힘찬 발걸음으로 시합장에 올라온 당지천은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모습으로 감독관 앞에 멈춰 섰다.
“무적지근 소청휘 앞으로!”
마찬가지로 환호와 함성을 받으며 시합장에 올라오는 소청휘.
특유의 흐릿한 인상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뇌리에 얼굴을 남기기 어렵긴 했으나, 그의 검이나 명성까지 잊힌 건 아니었기에 인기가 많았다.
“…….”
그렇게 시합장 위에서 마주하게 된 둘.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이들과 달리, 서로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었기에 평범하게 대화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청휘가 평범하지 않은 대화를 건넸다.
“부디 데려가 달라는 네 기도. 교주님을 넘어 인도자님께서도 알아차릴 만큼 각별했다.”
“…….”
“설마하니 그 만사빙귀의 혈통이고, 상대와 같은 무공으로 상대를 찍어 누를 줄이야. 넌 언제나 기대에 기대를 뛰어넘더구나.”
“…….”
“그래서 안타깝다. 그 몸. 그 혼. 너무나도 탐나는 그것들을 교주님께 전부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
소청휘가 뭐라 하든 말든 시종일관 무반응으로 일관한 당지천은 이내 점점 못 들어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감독관에게 한마디 했다.
“감독관님. 시작해 주시죠.”
“알겠소.”
당지천이 시작해 달라고 하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인 감독관은 곧장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양측 준비하시오!”
이어서 소청휘가 뭐라 하기 전에 곧장 시합을 진행했다.
“시작!”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시합이 갑작스럽게 시작되자, 관중들이 모두 당지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백독멸악이 무적지근을 어떻게 상대할지 참 궁금하구려.”
“역시 이번에도 무적지근의 무공을 써서 무적지근을 파훼하지 않겠소? 그렇게 되면 이젠 백독멸악이 아니라 만사독귀라고 불릴 거요.”
“아니지, 아무리 만사독귀라고 한들, 무적지근의 무공은 결이 다르지. 괜히 일인문파의 무공은 아무나 못 배운다고 하겠는가. 이번에는 당연히 먼 거리에서 공격할 만한 병기를 가지고 나왔을 거요.”
“한데 왜 움직이지 않는 거요? 시합 시작한 지 꽤 된 거 같소만.”
시합이 시작했음에도 당지천이 달려들긴커녕, 제자리에 서서 몸을 푸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자, 모두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당지천을 쳐다봤다.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건 상대인 소청휘도 마찬가지.
갑자기 당지천이 의미불명의 행동들을 이어가자, 광분한 얼굴로 당지천을 노려봤다.
그런 시선을 받는 당지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렇게 하려고 한다. 이놈아.”
말을 마친 당지천이 다짜고짜 배꼽 인사하듯 허리를 푹 숙였고.
그와 동시에 시합장엔 들려선 안 될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슝!
무언가가 발사되는 소리.
이어서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소리까지 연달아 울려 퍼지자, 소청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무언가를 피했다.
“흠…….”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
그건 다름 아닌 당지천의 허리에서 발사된 아주 예리하고 작은 침이었다.
-뚝, 뚝, 뚝.
암기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검붉은빛의 선혈이 소청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청휘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한 번 훔치더니 이내 입가에 가져가 먹어보고 말했다.
“독시와. 말로만 듣던 천독림의 독물인가.”
“……역시 한 발로는 무린가.”
“아니, 좀 치명적이긴 했다.”
이왕이면 한 번에 처리하고 싶어서 강한 독을 썼으나 소청휘는 택도 없다는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너와 함께 마지막 제례를 올리려 했다만, 그럴 시간이 없어질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러니 내 쪽에서 먼저 가마.”
의미 모를 말을 마친 소청휘는 방어하는 게 아닌 스스로 당지천에게로 다가가며 분주히 발을 놀렸다.
“어딜!”
당지천은 그런 소청휘와의 거리를 조절하며 독과 암기를 뿌렸고, 그 광경을 본 관중석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니, 분명 독과 암기는 금지했다하지 않았소?!”
“감독관은 대체 뭐 하는 거야? 무적지근을 죽일 셈이야?”
너 나 할 것 없이 소청휘가 위험한 상황이라며 감독관이 움직이길 종용했고, 무림맹의 고수들이 있는 귀빈석에서도 그런 의견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당연히 직접 개입하려는 사람까지 몇몇 등장했는데…….
“그만.”
모두 태천검의 한 마디에 우뚝 멈춰 서야만 했다.
“위험하면 직접 개입하겠다. 그러니 저 청휘라는 아이에게도 기회를 주지.”
“…….”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남궁전유가 나서서 보호해 줄 테니 개입하지 말라는 말을 했으니 개입하려 든다면 이는 남궁전유의 실력을 의심하는 일이 됐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경거망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감독관도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크게 외쳤다.
“속행하시오!”
그렇게 모두의 묵인하에 계속되는 시합.
대놓고 독과 암기를 뿌리며 둘 다 살초를 쓰는 기묘한 시합은 가히 생사결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하고 위험했는데, 그 속에서도 당지천은 실력을 숨긴 채 소청휘를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좀 죽어라!”
숨겨둔 무기를 아직 쓸 수 없는 게 답답한지 당지천이 소청휘의 급소를 노리며 암기를 던졌다.
하지만, 소청휘는 그런 당지천의 마음을 모르는지 결코 쉬이 당해주지 않았고.
한참 동안 시합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서로 공방을 나눠야만 했다.
그렇게 시합이 얼마나 진행됐을까.
당지천과 대치하던 소청휘가 또 의미 모를 말을 꺼냈다.
“나만 합일을 애타게 원하는지 알았다. 한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으니 더는 속세의 눈치 따윈 볼 필요 없겠구나.”
“…….”
“이번에도 무시하는구나. 하지만 너와 난 곧 하나가 될 테니 미리 알려주마. 바닥을 보고서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나?”
“……?”
아까와는 조금 다른.
소통하려는 듯한 소청휘의 말에 당지천은 위화감을 느겼다.
그래서 혹시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 소청휘를 예의 주시하며 거리를 벌린 당지천이 빠르게 바닥을 훑었는데…….
당지천은 그걸 보고서야 소청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이건 진?”
“공자님! 물러나십시오!”
“여러분! 막으십시오!”
당지천이 진을 보고 당황한 순간, 시합장에 동시에 울려 퍼지는 두 목소리.
하나는 소청휘가 작은 단검을 꺼내 자신의 배를 가르는 걸 보고 감독관으로 위장해 있던 강이장이 당지천을 밀치며 외치는 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관중석 곳곳에 일어나 자결하며 피를 쏟는 이들을 보고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군사의 목소리였다.
“늦었다.”
하지만 그런 외침들이 무의미하다며 일축한 소청휘는 피가 묻은 단검을 높게 들어 올리며 힘차게 외쳤다.
“당신의 거룩하신 마음에 제 모든 걸 바치겠나이다! 부디 저에게 새로운 육신을 주시어 영생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소청휘가 다시 한번 힘차게 단검을 제 배에 내려 꽂았을 때.
-드드드드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시합장 바닥이.
관중석이.
그리고 하늘이.
-쩡!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