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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81화 (181/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81화

“내가…… 내가 졌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패배를 시인한 운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입술을 짓씹은 운현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다시금 패배를 시인했다.

“두, 두말할 것 없는 완벽한 내 패배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지 운현은 아예 말까지 더듬으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처음에 자신만만했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그늘진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충격이 상당한가 보네.’

본디 무인이란 무를 숭상하고 무를 좇는 이들이다.

당연히 운현도 한 사람의 무인이기에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하긴, 팽 대협께 듣기로는 화산파 최고 기재라고 불리며 떠받들어지던 녀석이라고 했는데, 문파의 어른들 앞에서. 그것도 화산의 검으로 패배를 당했으니 면목 없겠지.’

결승도 아니고 본선 첫 경기를 보러 올 정도면 꽤 사이가 깊은 사람들일 터.

어쩌면 스승님이 보고 계셨을지도 모르는데, 그들 앞에서 졸전을 펼쳤으니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거다.

‘뭐,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지. 자고로 나무를 크고 올곧게 자라게 하기 위해선 가지치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팽구용이 억하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직접 나서서 애들의 정신머리를 고쳐달라고 부탁했겠는가.

그게 다 세상이 혼란해질수록 고수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운현이 이번 비무를 통해 뭔가를 얻어 간다면 화산파는 지되 진 게 아닌 걸 거다.

“……당 소협. 내 하나만 묻겠소.”

그 사실을 아는지 문득 고개를 들어 물어오는 운현.

“내 비록 부족한 실력이나마 이리 쉽게 파훼될 만큼 허투루 공부하지 않았소. 한데, 어찌 이리 쉽게 막아낸 거요? 혹 그 매화검을 가르쳐 주셨다던 삼촌께서 어떻게 하면 된다고 알려주신 거요? 만약 그렇다면 대체 내 검의 어디가 부족했소?”

검을 꺾은 상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당했어도 다음은 만들지 않겠다는 듯 열망이 가득한 눈으로 조언을 구했다.

“삼촌께서 따로 알려주신 것은 아니오.”

“하면 실력 차이…….”

“하지만 단순히 실력 차이도 아니오.”

“그럼……?”

운현은 대체 뭐가 문제였냐는 듯 의뭉스러운 눈으로 물어보길래 나는 중의적으로 운현의 문제점을 알려줬다.

“내가 한 것은 그저 엇나간 가지를 쳐냈을 뿐이오.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스스로를 가리고 좀먹는, 가장 오만하고 어리석은 가지를 말이오.”

매화점점은 한 그루의 나무를 그리기 위해 뻗어 나가는 검이다.

그렇기에 나는 말단부터.

공들이지 않아도 필시 내가 속을 거라 생각했던 허술한 검격부터 하나씩 쳐내며 가지치기를 한 거다.

어설픈 꽃을 맺지 못하게끔 말이다.

“스스로를 좀먹는 가장 오만하고 어리석은 가지라…….”

운현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는지 말을 곱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록, 자만심에 눈이 멀었다 하지만, 원래 그 속까지 썩지는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깊은 생각에 잠겨 한참을 되뇌더니 이내 뭔가를 알았다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뭐야?”

아니, 이 상황에 깨달음을 얻는다고?

그것도 시합장 위에서?

‘아니, 나쁘지 않기는 한데…….’

정신머리 고치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이목을 끌려고 나왔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의 무공을 파훼하고, 역으로 깨달음까지 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 목표를 10할.

아니, 20할 이상 달성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그래도 어이가 없는 건 어이가 없는 거였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냐.”

아무리 무인들이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설마하니 작은 도움이 되라고 한 말로 깨달음을 얻을 줄이야.

이거 완전 어처구니가 없네.

“…….”

오묘한 눈으로 관중석에서 내려다보는 화산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까 전만 해도 얼굴이 저릿할 정도로 강한 살기를 쏘아대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고, 아예 달려들려는 사람도 있어서 무림맹주와 군사가 말리며 대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대뜸 운현이 깨달음을 얻어버리니 다들 벙 찐 채로 눈만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명을 제하면 말이다.

“다들 움직이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빨리 현이의 호법을 서주고, 문파의 검을 훔친 저 녀석을 벌하러 가자꾸나.”

뻔히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벌해야 한다며 명령을 내리는 인물 한 명.

딱 봐도 심성이 좋아 보이지 않는 도사 한 명이 보란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합장으로 내려오려 했다.

그리고 그 앞을 군사가 막아섰다.

“멈추시죠. 청승 장로님. 제자분께서 부족함을 인정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는데, 스승인 장로님이 나서시면 얼마나 모양 빠지겠습니까? 일단 오늘은 넘어가시죠.”

“맞습니다. 괜히 다툼이라도 일어난다면 운현 소도장에게 악영향이 가지 않겠습니까? 참고 넘어가시죠.”

“…….”

군사도 모자라 맹주까지 나서서 앞을 가로막자 차마 무시하고 내려오지는 못하는 청승.

그러나 어지간히도 심기가 불편한지 군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이가 도움을 받았다는 건 인정하오. 허나, 저 녀석의 입에서 만사빙귀의 이름이 거론됐고, 스스로 그 혈통이라 말했소. 군사는 정녕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시오? 오늘 시합에서 진 건 우리 현이가 아니라 우리 대화산의 검이오. 우리 대화산을 능멸한 것이란 말이오.”

청승이 어지간히도 화가 난 듯 언성을 살짝 높였는데, 그래도 제자가 있는 걸 잊지 않았는지 고성을 지르진 않았다.

“그리고 우리 문파 하나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시오? 만사빙귀가 나타났을 때가 기억나지도 않소? 이건 결코 우리 문파만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청승이 과거에 있던 일을 떠올리는지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옛날에 삼촌이 무림을 뒤집어놨다던 말이 빈말이 아닌지 심히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글쎄입니다. 그것보단 만사빙귀에게 화산의 검을 빼앗긴 게 청승 장로님. 본인이셔서 그런 게 아니시고요?”

“…….”

가히 명치를 부숴 버리는 듯한 묵직한 한 방.

끊임없이 성을 내던 청승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일격에 청승은 점혈이라도 당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제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당연히 기억하지요. 다만, 상대가 누구인지 잊은 게 아닌가 염려되어 말씀드린 겁니다.”

“군사님 말이 맞습니다. 운현 소도장이 중요한 깨달음을 수습해야 하는 상황에서 괜히 당 소협을 건드렸다가, 행여나 독이라도 들이켜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러니 당 소협에 대한 처우는 나중에 교화각에서 맹원들과 함께 결정하시죠. 청승 장로님 말씀대로 화산파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죠.”

“크윽…….”

서로 죽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맹주와 군사의 맹공에 청승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다가 이내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는지 조심스레 운현이 있던 방향으로 향하며 군사에게 말했다.

“비록 지금은 군사의 말에 틀린 점 하나 없어 조용히 물러나겠으나, 똑똑히 기억하시오. 이건 엄연히 우리 화산이 모욕당한 일이오. 만약 교화각에서도 저 녀석의 편을 들겠다면 기대하셔도 좋을 거요.”

“명심하도록 하죠.”

“맹주도 마찬가지요.”

“저야, 뭐 연고가 없어서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능청스럽게 넘겨 버리는 맹주와 군사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청승은 나를 보며 눈을 한번 부라리고는 이내 조용히 운현의 곁으로 다가가 호법을 섰다.

그렇게 확실하게 교통정리가 되자, 관중석 위에 있던 군사는 어서 판정을 내라며 감독관을 봤고.

감독관은 지체 없이 판정을 내렸다.

“당지천 승.”

감독관의 손이 올라감에도 조용하기만 시합장.

그 속에서 나는 관중들의 소리 없는 환호성을 뒤로한 채 유유히 시합장을 빠져나왔다.

* * *

어떻게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시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숙소로 향하는 길.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이 올라와 성취감이 드는 동시에 저번의 무적지근처럼 누군가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을 경계하며 길을 걷는 도중.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얼굴을 꽁꽁 싸맨 무인이 나타나 내 앞을 막아서며 말을 걸어왔다.

“당 공자. 계획에 성공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

“하지만 저를 섭섭하게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

기시감을 느끼게 할 만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화.

그 탓에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게끔 품속에 손을 넣은 채 녀석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웬걸 바로 앞의 무인이 얼굴에 두른 천을 풀기 시작했다.

“……?”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한 걸음 물러나며 상황을 예의 주시했는데,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이 조금씩 벗겨질 때마다 나는 경계를 풀었다.

왜냐면 그 무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남궁 소저?”

“안휘까지 오셨으면서 저를 찾지도 않으시고 심히 섭섭하네요.”

3년 전, 비동을 함께 탐사했던 남궁공자의 조카.

남궁예화였으니까 말이다.

“여긴 어쩐 일로?”

“남궁가의 여식인 제가 안휘에 있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혈교도는 아닐까 긴장하던 상황에 갑자기 생각도 못 한 남궁예화가 튀어나와서 당황하자, 잠깐 웃음을 흘린 남궁예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분명 혈교도인 줄 알고 놀라서 물으신 거죠? 다 아니까 변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안휘에 왔으면서도 절 찾지 않으신 게 서운해서 장난 좀 쳐봤어요.”

“그건 태상가주님과 좀 문제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 문제를 들먹이면 할 말이 없네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는 남궁예화.

태천검과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는 듯 미안한 감정을 내비쳤다.

“남궁 소저 탓이 아니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것보다 처음에 ‘계획에 성공한 걸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한 걸 보면 뭔가 아시는 거 같은데 맞습니까?”

“예, 삼촌과 팽 대협께 자세한 내막을 들었어요. 그리고 당 소협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말이죠.”

“전부 말인가요?”

설마하니 수호각주가 작전과 관련이 없는 인원에게 내막을 낱낱이 설명해 줄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눈으로 남궁예화를 쳐다보자, 남궁예화는 그런 게 아니라며 해명했다.

“당 소협은 혈교가 날뛰는데도 제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저도 혈교를 쫓는 데 손을 보태고 있고, 당연히 삼촌께서 관련 없는 사람에게 비밀을 발설하진 않았어요. 애초에 원래 제 쪽에서 먼저 접촉할 생각은 없었기에 접점을 만들 생각도 없었고요.”

“그럼 다행입니다만…… 결국 지금 접촉해 왔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인가요?”

“예, 오늘 제가 찾아온 건 당 소협이 급히 알아야 할 사안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보통 평범한 사안이 아닌지 남궁예화는 한껏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혈교와 손을 잡은 독곡에서 인고를 만들고 있어요. 그것도 어린아이들을 제물 삼아서 말이죠.”

“인고 말입니까?”

인고는 말 그대로 인간으로 만든 고독.

무림의 고독에는 2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흔히들 아는 사람을 조종하는 생물 고독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십, 수백의 독물들을 한곳에 몰아넣어 생존경쟁을 하게 만들어 제일 강하고 독성이 강한 개체만 남기는 정제법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남궁예화가 말하는 건 후자였으니…….

즉, 인간.

그것도 아이들을 한곳에 몰아넣어서 정제하는 중이라는 의미였다.

“일단 다른 문파에 도움을 구하긴 했지만, 웬만한 고수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 만큼 큰 기대를 하긴 어려워요.”

“빌어먹을…… 당장 막으러 갈 수도 없고…….”

아무런 사태가 없으면 모를까.

이미 혈교의 이목을 내가 끌기로 한 이상 쉬이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죠. 그렇다고 해서 팽 대협과 삼촌께 부탁드릴 수도 없기도 하고요.”

“…….”

그저 독곡을 부수는 거라면 수호각주나 팽 대협이 사람을 모아서 가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해독하지 못한 아이들은 죽게 될 거다.

그걸 남궁예화도 알기에 부탁할 수 없다는 거겠지.

“그러니 당 소협께 부탁드릴게요.”

갑자기 남궁예화가 내 손을 잡아채더니 양손을 포개며 말했다.

“이후에 벌어진 결선에서 부디 아이들을 위해서 죽지 마시고, 꼭 좀 살아남아 주세요.”

이어서 아프지 않을 만큼 꼭 움켜쥔 남궁예화가 약간 슬픈 눈으로 다짐하듯 되뇌었다.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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