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9화
당지천이 힘찬 함성과 함께 대기실에서 벗어나던 시각.
주최 측에선 양자를 이제 막 불렀던 시점이었는데 천화검 운현은 당지천과 달리 이미 시합장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 시간이 왔구나.’
몸이 달아오른 듯 콧김을 뿜어내며 한 걸음씩 시합장을 향해 옮기는 운현.
원래라면 대기실에서 대기하다가 인원들이 부르러 오면 그제야 시합장으로 나와야 했는데, 자신의 상대가 다름 아닌 당지천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도저히 인내하지 못하고 대기실을 뛰쳐나왔다.
……아주 큰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본선 첫 경기부터 상대가 백독멸악이라니 운이 참 좋아. 분명 온갖 기상천외한 기문병기들을 들고나오겠지? 이거 찍어 누르는 맛이 있겠어.’
운현은 예로부터 비무를 즐겼고, 기문병기를 다루는 상대와 싸우는 걸 좋아했다.
왜냐면 기문병기를 상대할 때면 수준이 맞지 않아도 그 의외성에 당할 때가 있었고, 그걸 하나씩 극복할 때마다 견문이 넓어지는 게 바로바로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당지천과의 싸움이 기대되는 건 그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갈천 녀석. 내게 그렇게 콧대를 세우더니 상대가 되긴커녕, 백독멸악에게도 맥을 못 추리다니 참 실망이야.’
평소에 제갈천을 만났을 때, 철편을 상대해 보고 싶어 비무를 요구했음에도 혓바닥 굴리기 바빴던 제갈천.
매번 ‘허튼 싸움은 하지 않겠소’라며 거절하기 일쑤였기에 운현은 약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 상대인 당지천이 독특하게 짝이 없는 기문병기를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다루면서도, 큰 망신을 주며 이겨 버렸으니…….
운현으로선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부디 날 얕봐서 허튼짓만 안 했으면 좋겠네.’
그렇기에 너무 쉽게 지지만 말아줬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들뜬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시합장 앞으로 나가자, 감독관은 운현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아니, 사람을 보낸 게 방금 전인데, 어찌 벌써 나오셨소?”
“혹시 규칙 위반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몸이 너무 달아오른 게 아니오?”
한눈에 봐도 진정하긴커녕, 아주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운현을 보고서 감독관이 진정하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충고 감사드립니다만, 알아서 할 테니 호명이나 부탁드립니다.”
“흐음…….”
마땅한 조언을 해줬음에도 오만하기 짝에 없는 운현의 발언에 감독관이 침음성을 삼켰다.
‘단주님이 이번 대 후기지수로 꼽히는 아이들이 유독 싸가지가 없다더니 참으로 오만방자하구나. 감히 감독관을 홀대하다니.’
젊은 무인들이 자신감이 넘쳐 오만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자신조차 어렸을 땐 다소 무례한 적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는다면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명령조로 말하는 건 도무지 봐줄 수 없었다.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단주님. 팽 대협뿐이다.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명령질이야?’
얼굴을 맞댄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단번에 불쾌감을 최고치로 적립하는 데 성공한 운현.
감독관이 직접 화산파에 비빌 깜냥은 안 되기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앞으로의 판정에 불합리한 처사를 하겠다며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천화검 운현. 앞으로!”
그런 속을 내색하지 않은 채 감독관이 운현을 호명했다.
본선에 올라온 만큼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감독관이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호명하자 운현은 두근거리는 얼굴로 시합장 위로 올라왔다.
‘어서 와라, 당지천. 너의 아름다운 도전. 내가 친히 받아주마.’
감독관이 자신을 노려보든 말든 오직 당지천을 혼내주겠다는 생각으로.
도전자를 맞이하는 고수의 느낌으로 당지천을 기다리길 잠시.
-터벅, 터벅.
운현의 정반대편에서 당지천이 천천히 시합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왔구나! 오늘의 무기는 무엇이냐?’
당지천의 모습이 보이기 무섭게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당지천이 무슨 무기를 들고 나왔을지 기대하며 빠르게 위아래를 훑었다.
“……?”
무기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사람들의 얼굴에 하나둘 떠오르는 의문.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물건을 본 탓인지 제 눈을 비비는 사람도 있었는데, 머지않아서 현실이란 걸 깨닫자 의문은 점차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왜냐면 당지천의 손에 들린 건 그 어떤 특이한 기문병기가 아닌…….
“검?”
그저 평범한 검이었기에.
* * *
“아니, 검이라니? 하다 하다 이제는 검까지 다룬다는 말인가?”
“예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가에서 검을 익히게 뒀겠는가? 내가 보기엔 요행은 이제 끝. 더는 통하지 않기에 시위하는 것처럼 보이네. ‘천화검 손에 들린 검과 내 검이 같아 보이시오?’라고 말이지.”
“흐음…… 하지만 이상하지 않는가? 현리명인을 농락하듯 잡아냈을 때와는 정반대되는 내용이잖는가? 애초에 기문 병기도 다루는 사람이 검 하나를 못 다룰 리 없을 테니, 내가 보기엔 쓰려고 가져온 것 같네.”
“어허, 모르는 소리. 배우기 쉽다고 하여 모두 익히기 쉬운 줄 아는가. 검을 휘두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대다수 무인이 그 검에 평생을 바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걸세.”
검을 들고나오자마자 소란스러워지는 관중석.
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다.
‘사실 저 사람들 관심은 중요하지 않은데 말이지.’
용봉지회에 우승하고 유명세를 얻는 것.
무인이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을 만큼 명예로운 일이었으나, 혈교의 침공이 예상되는 시점에선 다 의미 없는 일.
지금 내게 제일 중요한 건 혈교의 관심을 끄는 일이었다.
‘뭐, 그래도 저들 사이에 혈교의 세작이 있지 않겠어? 그렇다면 시선 한번 제대로 끌어주자고.’
이미 대기실에 작정하고 관종 짓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이번엔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목을 끌 생각으로 다음 수를 준비했다.
“백독멸악 당지천. 앞으로!”
때마침 들려오는 감독관의 호명에 위풍당당하게 시합장에 올라갔고.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며 천화검의 앞으로 다가가 대뜸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겠…….”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지천입니다. 사용할 무공은…….”
“……?”
비무 대련도 아니거늘, 갑작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천화검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릉.
내가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검을 쥐고 아주 눈에 익을 만한 느낌으로 검을 뽑자, 뭔가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지막이 물었다.
“설마……?”
엉성하게 짝이 없는 동작임에도 어딘가 익숙한 자세.
거기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에 쐐기를 박듯, 크게 한 걸음 내디뎌 기수식을 취해주며 그 설마를 입에 담았다.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입니다.”
다소 비릿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 * *
“…….”
화산파의 긍지라 불리는 검법을 입에 올리자,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시합장 내부.
화끈한 내 광역도발에 모두가 입을 다물거나 떡 벌린 채 나를 쳐다봤다.
‘우씨, 막상 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들.
이전에 기문병기를 다룰 때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게, 지금 내가 한 행동은 ‘화산파의 무공은 누구나 익힐 만큼 관리도 못 하고 쉽게 익힐 만큼 같잖은, 묘리도 없는 검법이니 평생을 익힌 네놈이 무능하다는 걸 입증해 주마’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뭐, 정확히 따지자면 심히 비약한 느낌이지만, 대충 비슷하다.
그러니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역린을 건드린 거다.
‘아무리 관심을 끌려고 했다고 해도 이건 너무 나갔나?’
이쯤 되니 슬슬 찾아오는 미안함.
태생이 관종이 아니다 보니 너무 자극했나 싶기도 했고, 한 명의 무인으로서 선을 넘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너무 갔나 싶을 때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다.’
자고로 관종 중의 관종은 밥 먹듯이 선을 넘어야 하는 법.
괜히 관심을 끌려다 어설프게 끌어서 문제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 한술 더 뜨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이십사수매화검법이라…… 정녕 그리 말한 거요?”
가히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운현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아예 눈빛만으로 찢어 죽일 기세.
나는 그 시선을 묵묵히 넘겨받으며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맞소는 무슨……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알고…… 아니, 무슨 검법인지는 알고 하는 이야기요?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우리 화산파의 개파조사님께서 낙화하는 매화를 보고서 오직 화산을 위해 창안해 내신 무공이다! 네놈 같은 녀석이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는 무공이란 말이다!”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르고, 살심이 일었지만, 운현은 가까스로 참아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근데 이거 어쩌나.
나는 한술 더 떠야 하는데.
“글쎄다. 근데 그거 알아? 원래 화산에는 매화가 없었어.”
“뭐, 이 자식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거든? 곱게 받아들여라.”
이건 빈말이 아니다.
화산파가 옛날 옛적 구무협에 나오던 때에는 검에서 매화향이 난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게 생긴 건 상대적으로 최근.
매화 향이 흩날리는 작품이 흥행하고 나서다.
그러니 화산파의 개파조사가 낙화하는 매화를 보고 무공을 창안했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뭐, 아닐 수도 있긴 한데…… 아님 말고.”
“가, 감히…….”
책임 없는 쾌락을 누리듯 지적질을 가하자, 운현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지더니 이내 화를 이기지 못했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부여잡았다.
“네놈! 감히 우리 문파를 능멸해! 네가 우리 문파에 대해서 대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설령 네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매화검법이야말로 우리 화산이 발전시켜 온 무공이라는 말이 된단 말이다! 이 무식한 놈아!”
‘오…… 생각보다 잘 참고, 생각보다 말을 오래 하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으면서도 막상 달려들지는 않는 천화검.
누군가 내게 당가를 저렇게 욕한다면 참지 못할 게 분명했는데, 저 녀석이 잘만 참는 걸 보니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자기 문파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렇다고 단언하기엔 시뻘게진 얼굴과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상관없는 일이긴 하네.’
내가 원하는 건 혈교의 관심이지, 이 녀석을 화내게 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조금 즐긴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목을 한번 가다듬고, 최대한 있어 보이게 말했다.
“기억한다면 다행이오. 무인은 언제나 벽 너머를 추구하고 앞으로 걷지만, 사람은 언제나 지나온 길을 망각하기에 내 한번 물어봤소.”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변명이 아닌 충고요. 발전하되, 도태하지 말고, 기억하되, 얽매이지 말라는 충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혔다는 게 어떻게 충고지? 그럼 방금 그 개소리는 대체 뭐란 말이냐!”
“그거야 다 배운 것이니 가능한 것 아니겠소.”
“……뭐? 이젠 하다 하다 우리 문파에 배신자가 있단 소리를 하려는 거냐!”
“그건 아니오. 단지, 본인이 이전에 쓴 기문병기부터 이십사수매화검법까지 전부 다, 한 분에게 배운 것이오.”
“한 사람이라고……?”
천화검의 물음에 화답하듯 오랜만에 끌어올리는 냉기.
원래라면 용봉지회에서 감추려고 했으나 혈교의 관심을 끌기로 결심한 이상 삼촌의 이름을 좀 빌리기로 마음먹었고.
빙궁의 혈통이라는 걸 증명하기엔 이보다 최적의 것은 없었기에 검 자루부터 검신까지 차근차근 얼려 냉기를 풀풀 뿌려대며 말했다.
“바로 만사빙귀라 불리시던 내 외삼촌께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