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8화
무림 어딘가에 존재하는 혈교의 비밀 공동.
가히 인간이 지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공동 정중앙에 있는 광장에 수많은 혈교도들이 오와 열을 맞춰 집결하는 중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혈주대는 이쪽으로!”
각 간부의 인도하에 혈교도들이 사방에서 분주하게 모여들었고, 간부로 보이는 이들은 그 광경을 광장의 제일 앞쪽에 마련된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지휘하고 있었다.
“곧 인도자님께서 나오실 거다! 다들 늦지 않게 서둘러라!”
“수라혈살단 도착했습니다!”
“혈룡단 도착했습니다! 혈영단은 외부 인원 소집 중이라 조금 뒤에 도착한답니다!”
가히 군대라고 칭해도 이상함을 없을 정도로 일사불란하고 묵직한 분위기.
그 속에서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움직이는 혈교도들을 보면 마치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모두가 그런 얼굴을 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교주님 직속 강령대도 전원 도착했습니다.”
다른 혈교도들과 조금 떨어져 광장 제일 앞쪽에 도열한 검은색 피풍의의 인원들.
물경 백에 달하는 그들에게서만큼은 어떠한 긴장이나 흥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강령대인가.”
“우리도 언젠가 저기 들 수 있겠지?”
긴장과 흥분은 물론.
그 이외의 것까지 전부 존재하지 않는 듯한 심한 이질감에 감탄사를 내뱉은 혈교도들은 언젠가 자신도 저기에 속하겠노라 굳게 다짐하며 열의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
그러거나 말거나.
강령대의 인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본 채 서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혈교도들의 집결이 끝났다.
“교주님. 교도들 전원 집합했습니다.”
“알았다. 인도자님께 보고 드리마.”
간부 하나가 무릎 꿇은 채 보고하자, 옅게 고개를 끄덕이고 단상 뒤쪽에 마련된 천막으로 향하는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과거 당가의 2장로였던 천수나타 당소예였다.
“인도자님. 명하신 대로 인원 소집을 마쳤습니다.”
“…….”
“인도자님?”
“…….”
“인도자님.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까?”
“…….”
몇 번이나 부름에도 천막 안에서 아무 대답도 없자 당소예가 점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인도자님…… 혹시 이 어리석고 아둔한 추종자가 잘못한 일이 있었습니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부디…… 부디 제게 벌을 내리고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뒤에서 교도들이 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당소예는 손발을 덜덜 떨면서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쿵! 쿵! 쿵!
땅바닥에 연신 제 머리를 박아댔다.
만약 무림맹의 인원들이 봤다면 기겁할 만한 일.
전면에 나선 적은 없어도 혈교가 온 무림을 뒤집어 놓은 만큼 무림에 악명이 자자한 혈교주가 당소예였는데, 그 혈교주가 두려워하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림맹에게는 악재였다.
“…….”
당소예가 체면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용서를 빌었지만, 여전히 대답 없는 천막 안.
그 뒤로도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천막 안에서 반응이 없자, 이마에서 피를 흘리던 당소예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으로 다가갔다.
“인도자님? 혹 자리를 비우신 겁니까?”
“…….”
“염치에 불구하나, 만약 대답이 없으면 확인하라는 인도자님의 명이 있었기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막의 입구를 연 당소예가 뒤이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주술에 사용할 법한 도구들이 사방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고, 중원에서는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한 이상한 언어로 적힌 문서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정중앙.
거기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검붉은 구슬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청년이 존재했다.
“인도자님…….”
“교주? 무슨 일로 찾아왔지?”
사람의 존재를 느꼈는지 번뜩 눈을 뜨고는 당소예를 노려보는 청년.
그는 누구나 예상했듯이 당가의 대공자였던 당지독이었는데, 이전의 매력 있고 기억에 잘 남던 얼굴과 달리, 지금은 어딘가 뒤틀린 느낌 탓에 한 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며, 며칠 전 명하신 대로 교도들을 전부 집합시켰습니다.”
“벌써 날이 그렇게 됐구나…… 그럼 가야지.”
품에 끌어안고 있던 혈옥을 대충 아무 곳에나 놔둔 당지독은 검붉은 피풍의를 챙겨 입으며 당소예에게 물었다.
“강령대도 도착했나?”
“예. 교주님께서 직접 손보신 덕에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피부가 묵빛으로 변하는 현상도 해결할 수 있었답니다.”
“다행이구나. 강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쉽게 특정된다면 효용이 떨어지는 법. 사람 속에 숨을 수 있어야 진정한 무기가 아니겠느냐?”
“…….”
강시들을 사람들 속에 숨기겠다는 당지독의 말에 당소예는 침음성을 삼켰다.
교주 직속 강령대.
이들은 말 그대로 강시들을 다루는 무력부대로 혈교에서 제일가는 최고 무력부대였다.
왜냐면 혈교에서 만든 강시들은 일반적인 혈강시와는 궤를 달리하는…… 아니, 강시라고 부르기에도 심히 이상한 물건들이었기에.
‘강시임에도 냄새가 나지 않으며, 생강시도 아닌 것이 혼을 가지고 있으며, 뼈만 남아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는 물건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속을 수밖에 없다.’
보통 무림인들이 강시를 구분하는 법은 냄새였다.
본디 강시라는 것은 시체고, 썩지 않게끔 하기 위해 수많은 약품 처리를 한다.
그렇기에 양민들조차 단번에 느낄 정도의 심히 이질적인 냄새가 났는데, 혈교의 강령대에겐 그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무려 당가의 2장로였던 당소예가 맡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한데, 거기서 멀쩡한 지성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강시의 존재를 알아내도 가려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독곡의 인원들은 어떻게 됐지?”
“아직 혈고독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불참했습니다.”
“아직? 오늘 완성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중간에 일이 생긴듯합니다. 그래도 아이 100명을 추가로 내어줬으니 내일이면 완성될 겁니다.”
“……그래야만 할 거야.”
당지독이 흉흉한 얼굴을 한 채 섬뜩한 경고를 날리자, 당소예는 바로 몸을 움츠리며 답했다.
“식을 마치는 대로 제가 직접 가서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당소예의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 당지독이 발걸음을 옮겨 천막 밖으로 향했다.
“세상의 중심을 뵙습니다.”
그러자, 나서기 무섭게 쏟아지는 인사들.
너나 할 것 없이 공동에 있는 혈교도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당지독을 맞이했고, 당지독은 그런 이들을 보며 여유롭게 단상에 올라가 운을 뗐다.
“근 3년. 이 몸과 령에 합일이 되지 않아 전면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내실을 다질 뿐, 본격적으로 행동하지 못했고, 무림인들에게 경고만 하며 끝냈다. ‘머지않은 날 내가 무림을 지배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잠시 말을 멈춘 당지독은 혈교도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기가 차다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한데 웃기게도 무림인들의 생각은 달랐는지 우리를 무시하더구나. 아니, 무시는 아니지. 아예 대놓고 용봉지회를 열어서 밥상을 차려주기까지 했으니 그저 멍청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단상 위의 당지독은 비웃음을 살살 흘리더니 이내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대계를 이룰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탐스러워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더구나. 그러니 모두 총력을 다하도록.”
“존명!”
우렁찬 혈교도들의 대답에 당지독이 흡족한 얼굴을 하자, 그때를 놓치지 않은 강령대주가 손을 들으며 물었다.
“교주님. 제가 감히 청하옵니다만, 인도자님께 저희 강령대는 백독멸악을 노리면 되는 건지 여쭤봐주시겠습니까?”
감히 직접 물을 계급은 아니었기에 말을 돌렸지만, 사실상 직접 묻는 듯한 질문.
평소라면 선을 약간 넘은 행동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던 당지독은 당소예를 보며 옅게 손을 휘저어 줬고, 그걸 본 당소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령대주에게 말했다.
“굳이 필요 없다.”
“감히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독에 대해 잘 안다고 한들, 한 손으로는 열 손 못 막는 법. 독재가 매우 뛰어나다고는 하나, 결국 무림맹 독당에서 반응하는 수준이 한계일 거다. 그러니 보이면 죽이되, 딱히 신경 쓸 필요까진 없다.”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당지천에겐 뚫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있다. 그러니 꼭 죽여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굳이 쫓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강령대주가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당지독은 다시금 흡족한 미소를 흘리더니 이내 단상에서 내려가며 슬쩍 지나가듯 말을 남겼다.
“그래도…… 대주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당지천을 노려도 좋다. 우리 강령대면 그 벽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거든.”
* * *
순식간에 다가온 본선 당일.
저번 예선전과 달리, 별도로 마련된 참가자 대기실 한구석에서 나는 연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정말 이것밖에 방법이 없나? 하긴, 있었으면 미리 말했겠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부정하듯 연신 자문자답을 했기에 누가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면…….
“끄응, 아무리 쥐어도 익숙하지가 않은데?”
내가 다음 시합에 다른 것도 아닌, 검을 들고 나가야만 했기에.
-상대가 들고나오는 무기로. 상대의 무공을 펼쳐서 잡는다니…… 전 못합니다. 그걸 대체 어떻게 합니까?
-당 공자. 저는 당 공자가 만사빙귀의 혈통임을 알고 있습니다.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군사님. 같은 피이긴 합니다만, 삼촌께서나 가능하신 일이지, 저는 그런 거 못 합니다.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군사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이내 알았다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당 공자……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압니다. 하지만 당 공자의 손에 무림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아니,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만…… 대체 왜 따라 하는 거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그냥 시원하게 쓰러뜨리기만 해도 되잖습니까.
-적당히 이목을 끄는 거라면 그걸로도 충분할 겁니다. 하지만 저희 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들의 무공을 완벽히 이해하고, 모방할 자가 있다는 걸.
-……그렇다면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군사의 간절한 부탁과 설득.
그거에 못 이겨 얼떨결에 받아들였고, 연습도 좀 해왔지만, 좀 자신이 없었다.
“공자님. 영 내키지 않으시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하시죠. 천괴도뿐이라면 몰라도 공자님이 무림맹의 인원들을 보호해 줘야 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아니, 딱히 하기 싫은 건 아니고, 혈교가 날 노리는 거도 딱히 상관없는데…… 상대 무공 따라 하는 거 영 자신이 없거든.”
단순히 검을 잡고 휘두르는 거면 모를까, 원래 검법마다 검 잡는 법조차 다 달랐는데 그 탓에 지금은 아직 검 잡는 거조차 익숙하지 않았다.
“거기다. 처음부터 이십사수매화검법이라니 좀 힘들잖아.”
본선의 첫 상대는 화산파의 천화검 운현.
자연히 내가 써야 하는 무공은 화산파의 무공인 이십사수매화검법이었다.
“그나마 눈에 익는 검법 아니었습니까?”
“눈에 익히기는 했는데, 이거 해보니까 더럽게 어렵더라고.”
원래 사람마다 맞는 무공이 있는 만큼 유난히 익히기 힘든 무공이 있는데, 내게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딱 그런 부류.
애초에 우직하기보단 화려하기 짝에 없는 검법인 만큼 초보자가 흉내 낼 검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슴 졸이며 걱정하던 찰나.
흔유가 들어와서 내 차례를 알려줬다.
“공자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벌써? 후우…….”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라는 사실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에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완벽하게 해주겠다며 다짐했다.
“그래, 내가 할 일이 관종짓이라면 아주 철저하게 해주마.”
기다려라, 천화검.
원래 화산의 검에는 매화가 없었다던 그 사실.
내가 오늘 아주 똑똑히 보여주마.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