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7화
“……뭐?”
무적지근이 혈교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없냐고 묻자, 팽구용이 잠시 벙 찐 얼굴을 하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청휘가 아무리 지는 걸 싫어한다고 한들, 그런 수를 쓸 아이는 아니다.”
설마하니 그럴 리가 있겠냐며 불쾌하다는 듯 답하는 팽구용.
허나, 그 얼굴 어딘가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정말 그렇다고 확신하십니까?”
“…….”
그래서 한 번 더 물어보니 팽구용은 확신까지는 못 하겠는지 입을 다물었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설마 너는 청휘가 혈교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저도 확신까지는 못하겠지만, 7할 정도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7할이라…… 네가 이유 없이 모함할 리는 없을 테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가 무적지근과 만났을 때 무적지근에게선 혈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전혀?”
“예,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단언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팽구용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본디 무림인들은 피를 먹으며 성장하는 존재들이다.
강자존이란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고, 생사의 고비를 넘기기 위해선 적을 베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무기엔 짙은 혈향이 배었다.
그러니 반백 년을 산속에서 수련만 한 무인이나 불살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이 아닌 이상에야 웬만하면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는데, 내가 보기엔 소청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혈향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용봉지회에 참여한다고 무복과 무기를 전부 바꿨을 수도 있잖느냐?”
“그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무적지근의 실력이라면 예선전에선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이길 수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면…….”
“다만, 저에게 다가와 말하던 이질적이고 의미 모를 말들. 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립니다.”
고작 혈향 하나뿐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거다.
드물긴 하지만,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 터라 조금 특이한 무인이라고 생각할 뿐, 혈교와의 연관성을 생각하기엔 부족했으니까.
허나, 지금 와서 중2병스럽던 무적지근의 말을 곱씹어 보면 혈교와 연관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서원하였다. 그러니 너는 나의 영과 육과 일합이 될 것이다’.”
“그건 무슨 의미냐?”
“무적지근이 제게 했던 말인데, 의미는 저도 모릅니다만, 혈교와 관련 있다고 추측할 순 있습니다.”
“으음…….”
심히 이질적인 대사를 들려주자, 팽구용이 침음성을 삼켰다.
사실 나야, 무림에 종교가 몇 없기에 대충 끼워 맞추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혈교를 누구보다 많이 상대하고 잘 아는 팽구용에게 물은 것인데, 혹시나가 역시나.
입을 다문 팽구용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 채 한참을 고민했다.
“후우…… 섣불리 판단하긴 어려우나, 그렇다고 해서 아니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구나.”
“저도 확신이 있는 건 아니라 여쭤본 겁니다.”
“그렇다면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
자신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은 팽구용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어딘지 몰라도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러자, 처음부터 서 있었다는 듯 팽구용의 뒤에서 나타난 일염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9할.”
“근거는?”
“대기 기간 때 발생한 독살 사건이 발생한 시각, 그 당시 무적지근의 행적이 묘연하다.”
“……행적이 묘연한 인원은 더러 있었다. 허나, 그걸 모를 리 없을 테니, 추리고 추린 인원 중 무적지근이 제일 의심 간다는 의미인가?”
“맞다. 다른 정보를 규합해 봤을 때 5할 이상이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9할이나 되는 이유는?”
“무적지근이 우리도 모르게 감춰왔던 특이한 성격을 갑자기 드러내는 것과 혈교가 자신들이 들이닥칠 걸 은밀히 흘리는 것.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젠장.”
내가 듣는 이야기는 일염이도 듣고, 내가 본 광경은 일염이도 본다.
그걸 팽구용도 모르지 않기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후대에서 제일 날고 긴다는 녀석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혈교에 붙으려는 거야?”
“이유는 모른다. 애초에 중요하지도 않고.”
“맞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군사님께 가야겠다. 지천아, 따라오너라.”
얼굴을 굳힌 팽구용은 사태의 심각함을 알리듯 어딘가로 쏜살같이 뛰어나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고.
“…….”
나는 조용히 그 뒷모습을 한참을 좇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따라오라면서 곧장 사라져 버리시면 제가 어딘지 어떻게 압니까…….”
* * *
당지천이 덩그러니 거리에 남겨진 시각.
당지천을 홀로 남겨둔 채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 팽구용은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그저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더 격렬하게 반대하는 건데.’
처음 용봉지회를 열자고 의견이 나왔을 때, 팽구용은 반대했다.
당시 혈교가 잠잠해졌다고 한들, 엄연히 활동하는 중이었고,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한곳에 모았다가 지키지 못하기라도 하면 후대에 큰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팽구용은 힘이 없어서 제대로 반대하지도 못했고, 명분도 크지 않아 안휘에서 개최하는 선에서 양보했다.
태천검이 떡하니 지키고 있는 남궁세가의 근처라면 혈교가 자잘한 세작을 보내는 건 몰라도 대규모로 습격하진 않을 거라 생각해서 말이다.
‘내가 안일했다. 애초에 용봉지회를 노린다는 건 후대를 노린다는 뜻.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아이들만 처리한다면 혈교가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었어.’
-으득.
자신의 오판 때문에 미래의 별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에 팽구용은 심한 죄책감에 짓눌렸고, 그렇기에 이를 악물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빨리, 빨리 가야 한다. 아이들이 위험해.’
그렇게 팽구용이 도착한 곳은 용봉지회가 열리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객잔.
군사가 통째로 빌려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쾅! 쾅! 쾅!
“군사! 군사!”
팽구용이 부술 듯이 문을 두들기고, 객잔이 떠나가라 군사를 불러대자, 제갈천을 교육하다 말고 깜짝 놀란 군사가 객잔에서 뛰어나오며 물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로…… 으힉.”
“안으로! 일단 안으로!”
-쾅!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팽구용의 손에 이끌려 객잔 안으로 빨려 들어온 군사는 의문 모를 팽구용의 행동이 심히 당혹스러웠지만, 어떻게 달래보려고 노력했다.
“왜, 왜, 왜 이러십니까? 일단 진정부터 하시고…….”
“혈교가, 혈교가 들이닥칠 겁니다.”
“예?”
“혈교가 용봉지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
심히 당황한 듯한 팽구용이 앞뒤 다 자르고 본론만 짤막하게 말하자, 군사의 얼굴이 굳기도 잠시.
당황할 법도 하건만, 군사는 오히려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옮겼다.
“이쪽으로.”
팽구용을 데리고 주방 쪽으로 향하는 군사.
그가 주방 집기들에 손을 한 번씩 대자, 갑자기 주변이 일그러지더니 탁자와 의자가 놓인 자그마한 방으로 변했다.
“이건?”
“주방으로 위장해 놓은 방입니다.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엔 안성맞춤이니 아까 전 이야기 자세히 해보시죠.”
“그게…….”
허락이 떨어지자, 팽구용이 아까 전 당지천과 나눴던 대화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고 팽구용조차 냉정을 잃은 만큼 두서없이 상황을 늘어놨는데, 다행히 영민하기 짝이 없는 제갈정은 이야기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그러한 근거로 무적지근이 혈교에 입교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혈교가 용봉지회를 노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최악이군요.”
검지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들긴 제갈정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팽구용을 보며 물었다.
“단주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뭐부터 들으시겠습니까?”
“갑자기 말입니까……? 일단, 좋은 소식부터 부탁드립니다.”
“혈교가 용봉지회를 습격하는 건 아이들을 노려서 오는 게 아닙니다.”
“예? 아이들을 노리는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정확히는 아이들‘만’ 노리고 오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만약 단주님이 혈교에 세작을 심어놨고, 기습을 가하려고 하는데, 그걸 미리 알려주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청휘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닐까…….”
“그럴 가능성도 분명 있고, 엄연히 대비도 해야겠지만, 편의주의적인 답안은 대체로 오답입니다.”
“…….”
“왜냐면 만약 제가 혈교도였다면 세작에게도 미리 안 알려줬을 거기 때문입니다. 세작이 의도치 않게 잡힐 수도 있고, 연락하는 중에 사고가 날 수 있을 테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기습과 관련된 정보를 요청하면 세작도 기습한다는 걸 대충 느끼지 않겠습니까?”
“9할의 추측과 확신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걸 지금 몸소 느끼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혈교가 대놓고 정보를 흘리는 건 이유가 있단 소리입니까?”
“맞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게 나쁜 소식입니다. 혈교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으십니까?”
“저희가 혈교의 습격을 인지했다면 당연히 쓸 수 있는 수는 저희가 더 많아집니다. 선택지를 크게 2개로 좁혀도 인원들을 끌어모아서 일망타진을 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안전하게 인원들을 미리 대피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걸 혈교가 유도했으니 대체 뭘 노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갈정이 모르겠다며 살살 고개를 젓자, 팽구용이 다시금 실망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죠. 아마도 이건 제가 혈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걸 겁니다. 그렇기에 제 생각에는 단주님께서 혈교의 노림수를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예, 그러니 한번 해보시죠.”
군사의 말을 들은 팽구용은 의문을 표하기 전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힘껏 머리를 굴려봤다.
허나, 팽구용은 상황을 대국적으로 보는 능력은 약한 터라, 마땅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제 머리로는 혈교가 우리를 일망타진하려고 모은다는 정신 나간 생각밖에 안 듭니다.”
“일망타진이라…….”
팽구용의 답변에 제갈정이 턱에 손을 올리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인지 턱에서 손을 뗀 제갈정이 팽구용에게 말했다.
“밖에 당 공자가 온 것 같습니다만, 일단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런…….”
순간적으로 당지천을 놓고 왔다는 사실에 당황한 팽구용이 멋쩍은 웃음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잠깐.”
그런데 갑자기 멈춰 서는 팽구용.
아까 전 제갈정을 대신해 뭔가를 생각하듯 깊게 생각에 잠긴 팽구용은 제자리에서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밖을 나가자마자 당지천을 불렀다.
“아니, 대협. 따라오라고 하셨으면서 이렇게 사라져 버리시면…….”
“지천아. 내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느냐.”
“예? 아니, 갑자기 부탁이라 하시면?”
“네 말대로 정말, 정말 혈교가 용봉지회를 노리는 거라면 아이들이 위험하다. 우리를 노리는 거였으면 각개격파를 했지, 이렇게 한 번에 몰려올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니 네가 전면에 나서줬으면 한다. 다른 애들은 위험하겠지만, 넌 너만을 위한 보호가 있잖느냐.”
팽구용이 군사 앞에서 대뜸 신화문의 존재에 대해서 거론하자, 당지천이 군사의 눈치를 살짝 보며 팽구용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걸 혈교도 알잖습니까?”
“알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게 분명하다. 태천검이 있는 곳에 쳐들어올 생각인 녀석들이니 말이다.”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어떻게 말입니까?”
“당 공자가 만사빙귀의 재림이 아닌, 그 이상을 보여주면 됩니다.”
“예?”
당지천이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자, 갑자기 군사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니, 군사님. 만사빙귀라니 제가…….”
“빙궁신녀님이 쓰는 수정구가 저희 제갈세가의 상품입니다. 긴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습니다.”
“…….”
만사빙귀에 대해 언급하길래 부정하려 했건만, 이미 다 아는 상황에 당지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이미 다 아신다고 하니 묻겠습니다만,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상대가 들고나오는 무기와 똑같은 무기. 본선에 출전한 인원들을 그걸로 이기면 됩니다.”
“예? 그게 무슨…….”
당지천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의뭉스러운 눈으로 군사를 쳐다보자, 군사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물론, 그들의 무공으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