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6화
본선 진출을 결정하는 시합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청량감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 개운하다. 이게 용봉지회지.”
모두가 나를 밥 취급하던 기묘한 상황.
다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제대로 구분도 못 한 채 얕잡아 봤고, 각 문파의 대표란 것들은 독과 암기만 없으면 제대로 맥을 못 추는 팥 없는 찐빵 취급해 상당히 빈정상했는데, 이렇게 제대로 초를 치니까 기분이 상쾌했다.
“이거 주인공이 바뀌어서 어쩌나 몰라.”
자기네들 후기지수들 알리겠다고 밥상을 거하게 차려놨는데, 웬걸, 일면식도 없는 내가 낼름 집어삼켰다.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꼴.
관심이란 관심은 내가 다 받고, 한동안 화제란 화제는 다 내가 선점할 테니 날 무시하고 핍박하려던 이들에겐 참으로 쌤통이었다.
‘아마 본선 진출 전에 떨어지길 바랐겠지만, 오히려 마지막에 화룡점정을 보여주는 이 완벽한 계획까지. 이야, 진짜 내가 생각해도 악랄하다 악랄해.’
기문 병기를 사용해서 차례차례 부숴 나간 것도 모자라 마지막엔 고금을 들고나와 제갈천의 얼굴을 찍어 탈락시켰다.
처음에 계획했다곤 한들, 너무나도 완벽하게 해버렸기에 연신 입에서 자화자찬이 쏟아졌는데, 그러다 문득, 관중석에서 들리던 이야기가 생각나 황당함이 떠올랐다.
‘아니, 근데 뭔 음공을 쓴 적도 없는데 음공을 익혔다고 착각해? 음공을 익히긴 얼어 죽을.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내가 무림일통하고도 남았다.’
삼촌이 속성으로 이것저것 알려주셨다고 한들, 기문 병기와 음공은 궤를 달리했다.
그 증거가 만사빙귀라고 불리는 삼촌조차도 음공만큼은 여타 다른 무공보다 수준이 낮지 않았는가.
‘삼촌도 음공은 제대로 못 쓴다고 하셨는데 내가 그걸 해내는 건 어불성설이지.’
사실상 기문 병기도 어설프게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한 내가 음공을 어떻게 쓰겠는가.
그냥 달려들라고 위협하는 용도로 쓴 거고, 그들의 추측은 다 착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군사도 의미심장한 눈이었지?’
관중들이 착각하는 건 그들의 안목이 부족하기에 그렇다 칠 수 있다.
허나, 한 사람의 고수이면서도 군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착각했다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흠…… 이건 내 착각이겠지 뭐.”
설마 군사까지 그러겠는가?
그냥 제갈천이 고금에 얻어맞고 쓰러지니 어이가 없어서 그런 눈으로 쳐다본 걸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당지천.”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도 인상이 흐릿한 무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난 너에게 원한은 없다.”
“…….”
아니, 대뜸 길을 막고서 한다는 말이 원한이 없다니?
‘중 2병인가? 아니면 나르시시즘?’
황당한 무인의 말에 순간 머릿속에 저장된 정신병 목록이 흘러갔고,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쪽 뭐 정신병이라도 있…….”
“있다.”
“……아, 있구나.”
이거 순순히 인정해 버리면 할 말 없는데.
“우울하다는 것. 나를 옭아매고 정신을 갉아먹는 그 병이야말로 정신병이니.”
“아니, 우울증도 그렇긴 한데…….”
그 부류를 물어본 게 아닐뿐더러, 저렇게 표현하니까 심히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러니 조심해라. 난 나 나름대로 배려를 했으나 안타깝게도 널 지워야 할 운명인 것 같으니 말이다.”
“…….”
자기가 정신병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죽겠는데, 거기에 중2병도 극성이었다.
설마하니 보게 될 줄 몰랐던 끔찍한 혼종을 보자, 도저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얕잡아보며 무시하면 혼내주면 그만이고,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달라붙으려 했다면 적당히 내치면 그만인데 이건 뭐…… 어떻게 해야지?’
아무리 사람을 많이 상대해 봤어도 상정 외의 사태엔 서툴기 그지없는 법.
당연히 제일 먼저 떠오른 수는 상대해 주지 않고 무시하는 거였다.
‘실상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제일 이로운 방법일 텐데…… 감이 안 좋아.’
그런데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안감.
뭔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흔히 말하는 감이라는 것이 저 녀석과 가까워지는 걸 극구 거부하고 있었고, 아예 목을 치라고 연신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내가 미친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저 사람 혈향이 하나도 나지 않잖아?’
본디 무림인이란 족속들은 좋든 싫든 피와 멀어질 수 없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누구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혈향이 배어났고, 혈향이 나지 않는 이들은 제갈세가 사람들처럼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2병 걸린 놈이 군사직을 할 거란 생각은 안 들고…….’
조금 특이한 선에서 그쳤다면 어떻게든 대처 방법이 떠올랐을 거다.
그러나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녀석에게선 이상한 감각이 느껴져 품에서 암기를 집어 든 채 물었다.
“너 대체 뭐 하는 녀석이냐?”
“나는 너의 형제다.”
“……뭔 개소리야?”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서원하였다. 그러니 너는 나의 영과 육과 일합이 될 것이다.”
중2병 환자가 개소리를 지껄이며 광기 서린 발걸음으로 한 발자국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절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왠지 모르겠지만, 저 녀석과의 거리는 이게 최소한이야. 더 줄어들면 내 목숨이 위험하다.’
아버지와 천독림에서 수련하고 삼촌의 특훈을 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울린 적 없던 감이란 녀석이 다시금 요란스럽게 경종을 울려댔다.
이는 명백히 눈앞의 녀석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는 의미였고.
그와 동시에 날 노리고 있단 의미였다.
‘당하기 전에 독을 쓸까? ……아니, 암기라면 몰라도 독을 쓰는 순간 본선 진출은 무산이 될 거야. 그렇다고 암기로만 상대하기엔 사출기를 안 차고 와서 무리가 있어.’
괜한 의심을 살까 봐 사출기를 잠그는 게 아닌 전부 벗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근접전을 벌일 상황이 와버렸으니 사출기가 없는 게 상당히 뼈아픈 일이었다.
‘이럴 때 삐익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감이라는 참 애매하다.
한 9할 정도의 심증이 있긴 해도 10할 확신할 수 없으니 맹신하고 움직이기 어렵다.
그래서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중2병 환자를 예의 주시하던 찰나.
중2병 환자는 되레 한 걸음 물러나며 내게 말했다.
“안타깝구나. 형제여. 우리의 시간은 무한하지만, 나의 시간은 유한하니 일합을 이루기엔 늦은 듯하다.”
“또 일합 타령이야? 그리고 누가 네 형제야?”
“나는 원치 않았음에도 네가 바라마지않았으니.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뭐?”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중2병 환자는 의미 모를 말들만 늘어놓고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내가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누굴 그렇게 쳐다보는 게냐?”
“……팽 대협.”
“그래, 나다…… 근데 무슨 일 있는 거냐? 식은땀은 왜 이렇게 많이 흘리고?”
“저기…….”
이상한 녀석이 있다고 팽구용에게 중2병 환자가 사라진 곳을 가리켰지만, 그땐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저기 뭐? 뭔가 있었느냐?”
“오한을 들게 만드는 이상한 녀석이 있었습니다. 인상은 전체적으로 흐릿하며 정신 상태도 이상하고, 다가올수록 위기감이 느껴지는 그런 녀석이 있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듯 팽구용이 의뭉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이내 뭔가 기억이 났는지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아, 그 녀석.”
“아는 사람입니까?”
“아마 그 녀석이 너를 제외한 무림의 최고 후기지수. 무적지근 소청휘다.”
“…….”
아니, 무적지근이라니.
그 녀석 바로 밑인 모용집은 물론이고, 한참 아랫줄인 백현조차도 꽤나 있어 보이는 별호를 가졌다.
그런데 제일 위험해 보이는 놈이 겨우 무적지근이라니.
자칭 호사가들의 별호 작명 능력에 심히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내가 지은 것도 아니잖냐.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우스꽝스럽긴 해도 무적지근이라는 별호는 청휘한테 아주 잘 어울린다. 그도 그럴 게…….”
말을 멈춘 팽구용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더니 대략 반 장 좀 안 되는 거리를 벌리고 말을 이었다.
“청휘는 이 간격 내에선 나와 스무 합 이상 겨룰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
팽구용과 무려 스무 합을 겨룰 수 있다.
이건 범상치 않아도 여간 범상치 않은 인재라는 의미였으나, 나는 그것보다 다른 점에 더 놀랐다.
‘이 거리는…… 아까 그 녀석과의 거리잖아?!’
왜냐면 지금 팽구용과 나의 거리.
이 거리는 아까 내가 위기감을 느꼈었던 바로 그 간격이었기에.
‘분명 쉽게 이길 거라고 하지 않았나? 설마 녀석도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이전에 팽구용이 나보고 다른 후기지수를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단언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직접 본 무적지근.
소청휘만큼은 모용집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달라도 뭔가가 단단히 달랐다.
‘아니, 본디 무인이라면 실력의 3할을 숨기는 건 당연한 일. 팽 대협이 그걸 못 꿰뚫어 볼 리가 없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몰라도 무인으로서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 팽구용이다.
겨우 그 정도 변수를 가지고 오판해서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도 내 전부를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러니 팽구용이 소청휘의 실력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단기간에 실력이 향상된 건가?’
“무적지근을 보고 와서 그런지 반응이 미적지근하구나.”
“……지금 그걸 웃자고 하신 겁니까.”
“그럼? 웃돈 주고 웃기리?”
“…….”
“…….”
내가 한창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자, 팽구용이 잠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농을 건넸는데 더럽게 재미가 없었다.
“의도는 감사합니다만, 다음부턴 자제 부탁드립니다.”
“크흠, 그러마.”
본인도 뻘쭘한지 잠시 눈을 피하던 팽구용은 이내 목을 한 번 더 가다듬고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일단 소청휘는 제쳐놓고, 본선 진출 축하한다. 아까 보니까 맹주도 그렇고 군사도 그렇고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더구나.”
“오해라면?”
“……뭐, 대충 그런 게 있다. 설명하려면 귀찮으니 대충 넘어가라.”
설명하기가 난해한 건지 팽구용이 머리를 잠시 긁적이다가 말했다.
“중요한 건 그 착각 덕인지 맹주와 군사가 완전히 널 지지한다는 거다. 그래서 다행히 네가 독살했다거나, 사실은 혈교도였다는 누명은 금방 벗게 됐다.”
“독살은 그렇다 쳐도, 제가 혈교도라니……?”
“왜, 으레 그렇듯이 이득 보려고 누명부터 씌우는 거 있잖냐.”
“하하하…….”
뭔 상황인지 대번 이해가 가서 허탈한 미소를 짓는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혈교? 단기간에 실력이 오른 건 그럴 수 있다 쳐. 그런데 그 묘하게 중2병 걸린 듯한 언사까지 생각해 보면 설마……?’
만약 소청휘라는 녀석이 혈교도고, 나한테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한 거라면?
“팽 대협.”
“왜?”
“무적지근이라는 그 녀석 있잖습니까.”
“걔는 잠시 신경 쓰고 나중에 이야기하자니까?”
“혹시 혈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