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5화
-뜨르릉.
당지천이 고금으로 제갈천의 얼굴을 찍어버리자 고금이 고운 소리를 내며 제갈천의 얼굴을 긁었다.
“크윽…….”
난데없는 당지천의 공격에 제갈천은 침음성을 흘렸다.
당지천이 근접전을 펼칠 건 예상했고, 그걸 의식하며 거리를 좁혔었다.
한데, 다짜고짜 고금으로 사람 얼굴을 찍어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고금이 함정인 줄 알았지만, 설마하니 고금으로 찍을 줄이야.’
당지천의 주먹을 의식하고 있던 터라 제갈천은 속수무책으로 얼굴을 내줬고, 뒤늦게서야 철편을 들어 고금을 쳐냈다.
-뜨르르릉.
연주하듯 철편으로 줄을 긁자, 맑은 소리를 내며 밀려나는 고금.
제갈천은 고금이 병기가 아닌 악기이기에 충격에 취약할 거라 예상해 아예 고금을 부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당지천이 한 바퀴 돌며 철편을 흘려냈고.
그와 동시에 고금을 가로로 잡고 한 번 더 제갈천의 얼굴에 찍어버렸다.
“머리!”
족보도 없는 근본 없는 무공이지만, 기이하게도 막을 수 없는 공격.
이상하리만치 종잡을 수 없는 공격에 제갈천은 발버둥을 쳐봤지만, 결국 이번에도 얼굴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뜨드든.
“으윽…….”
종막에 알리는 소리가 제갈천의 얼굴로 연주되자,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에 격자무늬를 새긴 제갈천은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쿵.
‘나 쓰러졌어요’라고 외치듯 제갈천이 참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러자, 관중석은 물론.
시합장 전체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다른 시합도 아니고, 본선 진출을 확정 짓는 시합이다.
치열한 건 당연지사고, 일방적이어도 눈요기할 정도로 품격 있는 시합이 펼쳐지길 바랐는데, 허무하게 끝나 버리자 사람들은 황당함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음공이 언제부터 상대 얼굴로 연주하는 무공이었소?”
“……글쎄올시다.”
음공이라고 해서 한껏 기대했더니만, 고작 고금으로 내려찍는 게 다라니.
거기다, 믿었던 제갈천은 뒷돈이라도 받아먹었는지 당지천이 휘두르는 고금에 곧이곧대로 맞아주다니…….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 아무리 지략에 능한 대신 약하다고는 하나, 명문가의 후기지수면 암기 없는 백독멸악 정도는 가볍게 이겨야 하는 것 아니오? 한데, 다른 것도 아니고, 한낱 고금에 얼굴을 내주다니 정말 실망이구려.”
“너무 그러지 마시오. 내가 보기엔 집에 바둑판이 없어서 얼굴에 하나 새겨 가려는 것 같소. 동경만 있으면 언제든 둘 수 있으니 참으로 편하지 않겠소?”
“코피가 장강처럼 흐르는데 바둑알이 쓸려 나가지 않겠소?”
“그것도 그렇구려. 얼마 가지 않아서 무늬도 지워질 터이니…….”
“줄이야 백독멸악에게 다시 그어달라 하면 되지 않겠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제갈천에게 큰 실망을 한 관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제갈천의 흉을 보는 상황에서도 얼굴을 꽁꽁 싸맨 관중 한 명만큼은 얼굴을 굳힌 채 반박했다.
“다들 그만하시오. 이건 현리명인의 탓이 아니오. 어디까지나 백독멸악이 강해서 생긴 일이지.”
“……그게 무슨 소리요?”
“남들은 하나 익히기도 힘든 무공을 수십 개를 익혔다는 백독멸악이오. 한데, 겨우 음공 하나 다루지 못할 것 같소?”
“실제로 못 썼잖소? 고금을 그냥 휘두르기만 하고는…….”
“그쪽은 방어 초식 하나 없는 무공이 존재한다고, 정녕 그리 믿는 것이오?”
“아, 아니…….”
“물론, 드넓은 무림에 그런 무공이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오. 허나,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오.”
잠시 말을 멈춘 관중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눈으로 당지천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백독멸악은 말하고 싶었던 거요. ‘나는 음공을 쓸 수 있다. 다만, 너희의 잘난 기재들에게 쓸 가치는 없을 것 같다’라고 말이오.”
“뭐, 뭣이오?”
“대체 현리명인을 몇 수 아래로 보고 있길래…….”
“현리명인에 국한된 게 아니오. 지금 백독멸악은 당가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단신으로 무림맹을 꺾으려는 것이오.”
“그럼 대기 기간 때 벌어진 쟁탈전에서 해천회검과 창호일검을 꺾을 것도?”
“그 일부겠지.”
“……설마하니 그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논리 비약 아닌가? 단순히 백독멸악이 음공을 쓸 줄 모르고, 현리명인이 약한 거였을 수도 있잖는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잘 보게나. 처음 백독멸악은 독만 금지당한 채 용봉지회에 참여했네. 그런데 예선에 오자마자 암기까지 금지당한다? 이건 냄새가 나지 않는가?”
“설마…… 문파의 기재들이 수치를 당할까 봐 걱정되어 작당한 건가?”
“난 그렇게 생각하네. 그리고 기문병기를 다루는 걸 보면 이 사태까지 예견한 게 분명할 걸세.”
“허어…… 무력도 모자라 지략까지 갖추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려.”
관중 한 명의 설명에 쏟아지는 감탄사.
모든 전말을 알게 되고 나니, 절로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중들을 보던 얼굴을 꽁꽁 싸맨 관중은 매우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자, 이제 다들 잘 아시겠죠. 당 공자가 얼마나 뛰어난…….”
아까까지의 진한 남자의 목소리가 아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말하다가 말고 돌연 입을 다문 관중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예의 진한 남자의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사람인지 말일세.”
“……방금 웬 여인의 목소리가 나지 않았소?”
“글쎄, 나는 못 들은 것 같소.”
“분명 들은 거 같은데……?”
“내 자리에선 안 들렸나 보오. 어쨌든 볼만한 경기는 끝났으니 난 이만 가보겠네.”
얼굴을 꽁꽁 싸맨 관중이 태연하면서도 어딘가 급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이탈하는 광경을 다른 사람들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눈을 끔뻑이고 있던 때.
저 아래 무림맹주가 앉은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혈살단주님. 비록, 제가 다른 문파의 아이들을 좋게 보지 않긴 합니다만, 이건 너무 나간 거 같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이건 뭐 대놓고 일초지적도 안 된다고 선언한 거와 다름없잖습니까.”
“……예?”
무림맹주의 말에 팽구용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림맹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하긴, 혈살단주님께서 아이들의 기를 꺾어 놓겠다고 그렇게 벼르고 계셨으니 겨우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겠군요.”
“……저도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정치적인 감각이 없다곤 하나,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어설프게 낸 말은 확대해석 되어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단 건 군사님께 충분히 배웠습니다.”
“???”
“허나, 본선 만큼은 조금은 살살 해주십사 부탁드리겠습니다.”
분명 말이 오고 감에도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기묘한 상황.
팽구용은 무림맹주가 뭘 잘못 먹어도 단단히 잘못 먹었고, 행여나 헛것을 보나 싶어 시합장을 내려다봤는데.
웬걸, 시합장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 것 아니겠는가?
“크윽…….”
시합장에선 정신을 차린 제갈천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울분을 삼키고 있었고, 군사가 그 옆에 가서 뭐라 다그치고 있었다.
“일어나라, 제갈천.”
“배, 백부님.”
제갈정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려던 찰나.
앞서 보인 수치를 백부인 제갈정이 전부 봤다고 생각하자, 제갈천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갈정은 제갈천을 더 다그쳤다.
“천아, 난 일어나라고 했다.”
“하, 하지만 백부님 저는…….”
“강자에게 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인이지만, 이기지 못할 싸움은 최대한 지양하는 진법가이며 군사이니까 말이다.”
“배, 백부님…….”
언뜻 들으면 제갈천을 위로해 주는 것 같지만, 한기가 풀풀 서린 제갈정의 목소리를 들은 제갈천은 이게 결코 위로가 아님을 알았다.
“정녕 부끄러운 게 뭔지 아느냐? 이기지 못할 싸움을 이길 거라 단언하고, 제대로 된 준비도 안 한 것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뭔지 아느냐? 실추를 보이고도 만회하려 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배, 백부님. 그, 그게 아니고…….”
“군사의 미덕은 침묵이다. 이길 수 없는 논쟁에는 결코 혀를 들이대선 안 된다…… 분명 내 그리 가르치지 않았느냐?”
한기를 뿌리다 못해 제갈천의 핏기를 싹 가시게 만든 제갈정은 차가운 분노가 가득한 두 눈으로 제갈천의 뒷덜미를 잡아 올리며 말했다.
“다행히 이후 일정이 세 시진이나 비었구나. 잊고 있던 가르침을 되새김질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제갈정의 말을 들은 제갈천의 눈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이, 일정이? 비, 비다니?’
언제나 시간을 일각도 15등분 해서 쓰는 사람이 제갈정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일정이 비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연히 미리 비워놓지 않은 이상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렇게 될 줄 아셨다는 이야기잖아!’
그걸 제갈천도 모르지 않았기에 눈에서 시작되어 점차 번지듯 온몸이 덜덜 떨려 나갔고,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 제갈정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자, 자, 자, 자, 자, 자, 잘못했습니다. 백부님. 하, 한 번만…….”
“또 머리가 아닌 세 치 혀를 놀리는구나. 네 증상이 심각하니 빨리 가야겠다.”
“배……! ……!”
제갈천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려고 하자, 아예 말을 못 하게 점혈을 해버린 제갈정이 제갈천을 들고 사라지자, 병풍처럼 서 있던 감독관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
그러다가 군사와 제갈천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감독관은 관중석을 한번 돌아보고는 선언했다.
“4, 44번 승! 본선 진출!”
-와아아아아!!!
당지천의 본선 진출이 선언되자마자 쏟아지는 함성 세례.
아까 전까지 얼얼해하던 관중들은 어디 갔는지 다들 당지천을 보고 손을 흔들어줬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엔 모르쇠로 일관하던 당지천과 가벼운 화답과 함께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시합장을 떠났다.
……관중석 맨 윗줄에 그를 의미심장하게 보는 시선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살길을 열어줘도 기어코 본선에 올라오는구나.”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한 무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음에도 흐릿한 인상의 무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제 할 말만 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잖느냐.”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시합장을 떠나는 당지천을 내려보다가 당지천이 떠나자, 그제야 자신도 몸을 돌리며 말했다.
“무림맹과 함께 집어삼키는 수밖에.”
무인이 무림맹이 여는 용봉지회에서 무림맹을 집어삼킨다는 망언을 태연히 내뱉는 사람.
그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심히 어이없어했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왜냐면.
무인이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흐릿한 인상을 기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