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4화
“…….”
당지천이 고금을 들고 여유롭게 시합장으로 나오자, 정적이 가라앉는 관중석.
그간 예선전에서 별의별 잡것들을 가져와서 전부 썼기에 이제는 고작 기문병기 하나 들고 나왔다고 놀랄 때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고금을 들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고금? 고금이라니?! 내가 정녕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가?”
“음공이라니! 아무리 기문병기가 서로 궤를 달리한다지만, 음공만큼은 전혀 다르잖은가!”
고금은 기문병기에서도 특출나게 다루기 힘든 물건에 속했기에.
“음공은 뭐가 좀 다른가?”
“……뭣? 자네, 그걸 정녕 몰라서 묻는 겐가?”
“아니, 모를 수도 있지 그런 눈으로 볼 것까지야…….”
“어디 산에 틀어박혔다가 내려왔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크흠, 내 하산한 지 얼마 안 되어 무림의 일을 잘 모르니 양해해 주게나.”
“흐음, 그런 사정이 있다면야……. 잘 듣게나. 무릇 무공이란 게 다 그렇지만, 다 특색 있는 운용법이 있을지언정, 큰 틀에서 묶으면 다 비슷하게 볼 수 있다네. 물론, 아주 큰 틀로 봤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일세. 하지만 무림에 무공이 좀 많아야겠는가. 당연히 이질적인 것도 몇 개 존재하고, 그중에서 음공이 제일 유명하다네.”
“음공을 쓰는 사람이 많아서 유명한 게 아닌가?”
“아닐세. 음공을 쓰는 고수는 무림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네.”
“허면 왜 유명한 건가?”
“말했잖는가. 이질적이어서 그렇다고.”
“음공은 여타 무공과 달리, 말 그대로 소리를 이용해 공격한다네. 고금으로 치면 현을 튀겨서 매서운 기를 쏘아낼 수도 있고, 연주를 통해 상대방의 정신을 공격할 수도 있지.”
“호오…… 확실히 그렇다면 다른 병기들과는 결이 다르겠구려.”
“맞네. 그렇기에 당 공자가 고금을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아주 큰 파장을 불러올 걸세.”
누군가의 설명 덕에 다들 한층 더 당지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됐을 때.
무림맹의 인사들이 모인 곳에 무림맹주와 군사가 찾아온 탓에 난리가 났었다.
“맹주님. 군사님. 오셨습니까.”
“편히들 앉아 계시죠. 천이 시합만 보고 금방 갈 겁니다.”
일제히 기립하는 맹원들에게 손사래 친 군사가 일부러 맹주를 끌고 팽구용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왜 제 옆으로 오시는 겁니까?”
“혈살단주님 말고는 다들 저희를 불편해하시잖습니까.”
“저도 불편합니다만.”
“금방 갈 테니 양해해 주시죠. 무엇보다 이러고 있으면 다른 분들도 오셔서 보게 될 텐데, 참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
현명한 이는 의심 살 자리는 피하고, 부득이하게 찾아야 할 경우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군사가 팽구용의 옆에 앉겠다는 건 대놓고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
정치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의미였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는 군사와 같이 그런 거 잘 모릅니다만, 그냥 나머지 분들 불편해하시니 그냥 있게 해주시죠.”
그러나 맹주까지 나서서 한마디 거들자, 옅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대놓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냄에도 제갈정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착석했고, 맹주는 둘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한마디 했다.
“이거 괜히 저 편하자고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단주님께서 불편하시다면 자리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맹주는 미안하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은 채 자리를 떠나려고 하길래 팽구용은 맹주에게 사과했다.
“제가 날을 세운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교화각에 있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터라…… 생각해 보니, 그땐 감사했습니다. 진작에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대표들 쪽에 붙었다면 순탄하게 끝나진 않았을 겁니다.”
이쪽에 붙으려는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엄연히 도와주러 온 것.
제갈정이 교활한 사람이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선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러니 최소한 도구처럼 이용하진 않을 거기에 팽구용은 제갈정을 믿기로 했다.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미리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미리……? 그 영감님 때문에는 아닐 테고 왜입니까?”
“보십시오. 당 공자가 하필 천이의 상대로 고금을 들고 나왔잖습니까.”
팽구용과 대화하다 말고 시합장으로 눈을 돌린 제갈정은 심히 안타깝다는 얼굴로 제갈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천이가 철선을 들고나오니 이목을 끌 거라 생각했는데, 당 공자 때문에 이목을 사긴커녕, 본선도 못 간 채 들러리로 전락했잖습니까.”
하필이면 당지천을 만나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게 됐다는 말을 듣던 팽구용은 위화감을 감지했다.
‘본선을 못 가? 들러리?’
“군사님께서는 지천이가 천이를 쉽게 이길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어째서입니까? 아무리 지천이가 기문병기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들, 음공은 궤를 달리하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팽구용의 물음에 제갈정은 미소를 흘리며 전음을 보냈다.
-혈살단주님. 몇 년 전에 저희 애들이 빙궁에 갔다가 재밌는 걸 들었습니다.
빙궁의 이름이 거론되자 팽구용은 순간 움찔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고는 되물었다.
-빙궁? 제갈세가에서 그 먼 곳은 왜 갔습니까?
-빙궁신녀가 점칠 때 쓰는 수정구가 제갈세가의 상품입니다. 무려 보증기간이 3년이나 되는 명품이죠.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빙궁신녀가 갑자기 오작동하는 문제가 생겼다고 교환 혹은 수리를 요청했습니다. 하여, 인원을 몇 추려서 보냈더니 고장 나긴커녕 멀쩡하기만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오작동한 증세와 그때 누구의 점을 쳤는지에 대해 상세히 들었습니다.
-…….
팽구용은 당지천이 빙궁에 갔다 온 건 알긴 하나,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제갈정이 말하는 걸 듣다 보니 제갈세가에선 당지천이 빙궁의 혈통.
만사빙귀의 조카임을 알아낸 듯해 머리가 복잡해지던 순간.
제갈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툭 내뱉었다.
-만사빙귀. 그거 진짜였군요.
-!!!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 하지 마시죠. 저희도 확신은 없었습니다. 심증이 있었다고 한들 누군가 정보를 감추기라도 한 듯 단서 하나 없었고, 빙궁 내부의 정보는 새어 나오지 않아서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절 떠본 겁니까?
-예.
-……대체 어떻게 안 겁니까?
-태연한 척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무인이라면 누구나 다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하지 말아야 할 때 생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하…….
괜스레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보고 알아차렸다는 말에 팽구용이 허탈한 듯 웃자, 군사는 미안하다는 듯 전음을 보냈다.
-원치 않는 비밀을 파헤쳐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였습니다.
-아무리 특이하다고 한들, 사람을 속여서까지 알아낼 정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당지천은 어렸을 때부터 당가 최고의 기재로 불리며 새로운 형태의 독을 만들고, 고작 약관의 나이임에도 쟁쟁한 무인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진 것도 모자라 만사빙귀의 재능까지 가졌습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최고의 후기지수일 테니 예의 주시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과하지 않나…….
-가장 큰 문제는 세력입니다. 현재 당가를 등에 업은 것도 모자라서 정보를 통제할 만큼의 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방과 하오문뿐만이 아닌 고급 정보만큼은 10할의 신뢰도를 자랑하는 신화문의 정보까지 통제할 정도입니다.
-문제가 되긴 하나 그건 정보 통제이기보단 중요치 않은 정보라 누락된 게 아니겠습니까?
-당지천의 정보는 고급 정보가 맞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당가가 신화문을 상대로 정보 통제가 가능할 정도의 여력은 되지 않을 테니…….
잠시 말을 끊은 제갈정은 팽구용과 눈을 맞추며 답했다.
-신화문을 움직일 정도의 접점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제갈정의 추리에 팽구용은 재차 당황했지만, 이번엔 제갈정의 충고를 잊지 않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 정신이 팔리기라도 했는지 팽구용이 멍하니 시합장을 내려다보며 답하자, 제갈정은 마찬가지로 시험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좋은 답변입니다. 역시 혈살단주님과 함께하기로 한 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간 전음으로 말했음에도 구태여 육성으로 내뱉는 군사.
탐색은 끝났는지 확실히 힘을 실어주려는 듯 보란 듯이 행동했고, 언짢은 얼굴로 쳐다보는 팽구용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감독관이 음공은 관중에게 피해가 갈까 봐 제재하려 하나 봅니다. 혈살단주님이 가셔서 항의하기엔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제가 가서 직접 허하겠습니다.”
작은 호의를 베풀겠다는 듯 직접 일어나 시합장으로 향하는 제갈정이 사뿐사뿐 시합장으로 걸어가 감독관 뒤에 서자, 감독관과 당지천의 이야기가 들렸다.
“고금? 음공도 다룰 줄 알았소?”
“음공은 할 줄 모릅니다.”
“……?”
고금을 들고 나왔는데 음공은 할 줄 모른다니.
감독관은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다른 무공과 달리 음공은 관중들에게도 피해가 갈 게 분명하니 제재하려 했다.
“괜찮으니까 진행시키게.”
“구, 군사님?”
“시합의 여파가 퍼지지 않게끔 내가 신경 쓰겠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게.”
그러나 어느샌가 바로 옆에 내려온 제갈정의 말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다른 사람도 아닌 이번 시합의 상대인 제갈천의 가문, 제갈세가의 어른이었기에.
“알겠습니다.”
감독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정은 곧장 작은 함을 몇 개 꺼내 간이 진법을 만들었다.
“이거면 될 걸세.”
진법을 완성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제갈정.
행여나 시합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제갈천에게 눈인사 한번 하고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걸 본 감독관은 곧장 시합을 진행했다.
“양측 준비하시오.”
감독관의 손이 올라가자, 제갈천은 의뭉스러우면서도 이상하다는 눈으로 당지천과 제갈정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철편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기수식을 취했다.
‘음공을 이용해서 근접전을 유도하는 것까진 좋았으나, 결국 수준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법. 방심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이긴다.’
독과 암기가 봉인된 이상 당지천이 펼칠 수 있는 최대의 수가 근접전이다.
고금을 들고나온 건 상대의 선택을 강요하게끔 하는 수단.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거리에서 당지천을 이길 수만 있다면 그 함정은 있으나 마나 한 함정이었다.
“시작!”
감독관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매섭게 앞으로 짓이겨 가는 제갈천.
“미안하지만 본선은 내가 가겠소!”
귀에 내력을 끌어올리고 철편을 꼬나쥔 채 당지천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는데, 당지천은 움직이기는커녕, 미동도 안 한 채 서 있었다.
“…….”
멀리서 보면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 있는 게 긴장이라도 한 모양새였고, 뒤늦게 양손으로 고금을 잡았을 땐, 이미 제갈천이 코앞까지 온 상태였다.
“이렇게 비겁하게 이기게 되어 안타깝소. 부디 다음을 기약하시오.”
제갈천은 제일 까다로운 음공을 쓰지도 않는 당지천을 보고, 포기한 상태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미안한 감정을 담아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당지천과 제갈천의 거리가 겨우 세 걸음 안으로 좁혀졌을 때.
섭섭하다는 얼굴을 한 당지천은 서서히 고금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머리!”
그대로 제갈천의 얼굴을 찍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