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2화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합격패 쟁탈전이 종료되고 며칠 기다리자, 맹에서 합격자와 예선 대진표를 발표했다.
“거기 비켜! 안 보이잖아!”
“287번…… 287번…….”
막 발표된 대진표를 보기 위해 모여든 합격자들.
일찍 본다고 해서 결과가 변하는 것도 아닌 만큼 나중에 봐도 될 법하건만,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게 최악만은 면했으면 하는 법.
합격자들은 저마다 속으로 좋은 대진을 바라며 일찍이 찾아왔고, 그 탓에 인파가 쏠렸다.
“내가 132번이랑 붙는다고? 이거 첫판은 낙승이구만!”
“하, 하필이면 처음부터 57번이라니…….”
“죄송합니다! 지나겠습니다!”
저마다 대진을 확인하고 희비가 갈리는 참가자들.
그 사이로 인파를 가르고 나아간 73번 합격자도 같은 생각으로 대진표를 들여다봤다.
“73번…… 73번…… 찾았다.”
[73번 홍수장 대 44번 당지천.]
“제길…… 망했다.”
당지천의 이름을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73번 참가자.
기왕이면 쉬운 상대를 만나서 힘을 비축하길 바랐건만, 하필이면 당지천을 만났다.
“모용집도 제대로 못 이긴 상대를 나보고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합격패 쟁탈전을 통해 어중이떠중이가 걸러졌고.
또, 기존의 이름난 인원들은 특혜를 받아 올라갔다.
그렇기에 대부분 차이가 나더라도 해볼 만한 상대가 많았는데, 참으로 운 없게도 모용집을 이긴 당지천을 만나게 되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래선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잖아…….”
쟁탈전에서 어찌저찌 버텨냈건만, 예선전에선 1승도 못 챙길 판이 되자, 연신 한숨을 쉬어대는 고개를 숙이는 73번 참가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의기소침해하고 있었는데, 시야가 점점 내려가자 대진표 맨 밑에 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본 지회에서 독과 암기 사용은 금지하는 바이며 특히 44번 참가자에 대해선 엄금하는 바이다.]
“암기를…… 금지한다고?”
글귀를 읽는 순간 73번 참가자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가 싶어 눈을 벅벅 닦았다.
그러나 글귀가 사라지긴커녕, 더 선명하게 보이자, 입을 떡 벌린 채 대진표를 들여다봤다.
“지, 진짜잖아?”
비록, 요즘 무림에 활동이 뜸하더라도 당가의 근간이 독과 암기임을 모르는 무인은 없었다.
그런데 사천당가의 당지천에게 독과 암기를 금지시킨다는 건 무기 없이 싸우란 말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당연히 73번 참가자도 형평성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거 형평성에 문제없는 거 맞아?”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감독관에게 가서 이의 제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내 코가 석 자인데,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야.”
허나, 73번 참가자는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내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지. 애초에 해천회검을 이길 정도면 암기 없이도 나랑 비슷한 수준일 거야.”
으레 소문이 과장되고 부풀려진다고 한들, 모용집과 겨뤄 이겼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압도적으로 이기든 한 끗 차이로 이기든 결국 이겼다는 이야기고, 모용집과 비등비등한 실력이란 의미였다.
아주 당연하게도 정상적으로 싸웠다면 73번 참가자가 이길 리가 없지만, 독과 암기가 없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본선까진 어려워도 사천당가의 소가주를 이긴다면 돌아갈 때 체면치레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혈살단에서 입단 제의가 올지도 몰라.”
꿈에 부푼 채 금의환향하는 희망찬 미래를 그려 나가는 73번 참가자.
당지천이 모용집과 겨뤄서 이겼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암기를 전혀 쓰지 않은 채 이겼다는 사실까진 듣지 못했기에 자신에게도 가망이 있다며 마음을 굳게 먹으며 다짐했다.
“그래, 먼 길 온 만큼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어.”
착각으로 비롯된 상상의 나래 펼친 73번 참가자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예선전을 준비하러 발길을 옮겼다.
당지천이 어떤 수를 준비했는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 * *
용봉지회의 예선전이 시작되는 당일.
쏟아지는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대망의 첫 비무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132번! 93번! 앞으로!”
감독관에게 호명된 두 참가자가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서자, 관중석에서는 다시 한번 환호가 쏟아졌고.
그 환호 소리가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참가자들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갔다.
“쯧, 쯧, 쯧. 겨우 이런 거에 긴장하다니 저 둘은 볼 필요도 없겠네.”
“애초에 자료에 이름을 올린 인재들도 아니잖은가. 신경 쓰지 말게나.”
그런 참가자들을 관중석 정중앙에서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무인들.
저마다 입은 무복이 전부 달랐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왼쪽 가슴에 무림맹 소속을 의미하는 적색 실로 수놓은 자수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혈교가 나타난 이후로 처음 열리는 용봉지회잖은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처지인데 어중간하더라도 적당히 쓸 만하면 키워서 쓰면 되는데 저건 볼 것도 없겠군.”
“뭐, 저 둘은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고작 2명 봤을 뿐이네. 너무 속단하지 말게나.”
“일호대주님. 대주님이 담이 작은 이들을 싫어하셔서 그렇지, 막상 담이 작더라도 솜씨가 나쁘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담을 기르는 것 또한 교육의 일환으로 삼으면 충분히 쓸 만할 겁니다.”
“그래도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일호대주는 대원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참가자 대기석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난 저런 애들 보면 답답해 죽거든.”
일호대주가 옆의 동료와 부하에게 보란 듯이 시선을 던졌고, 그 시선을 따라간 이들이 보게 된 건 고개를 떨군 채 뭔가를 한참 중얼거리는 참가자의 모습이었다.
“암기가 없으니까 권이나 장이 전부일 거야…… 당가의 보법이 여간 빠른 게 아니라고 하니까 일부러 쫓으려 들어서 체력을 낭비하진 말고, 들어오는 공격만 받아치다가 틈을 노리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야. 절대 조바심 내선 안 되고,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하던 대로만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후우…….”
과한 긴장을 풀기 위해 연신 숨을 몰아쉬는 참가자.
주변이 시끄러운 만큼 일호대주가 있는 곳까지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으나 행동을 보면 딱 자기최면을 거는 중이었다.
“저렇게 담이 작은 걸 보면 보나 마나 쟁탈전도 어디 처박혀서 버텼을 텐데, 굳이 예선전까지 올리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상대가 상대이니 긴장하는 거다 이 녀석아.”
“단주님?”
갑자기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자 뒤를 쳐다보는 일행들.
“안녕.”
거기에 자신들의 상관인 혈살단주, 팽구용이 서 있자,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인원들이 급히 일어나 인사하려 하길래 팽구용은 손짓 한 번으로 만류하고는 빈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저 녀석 상대가 지천이거든.”
“지천이라 하면……단주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그 아이 말입니까?”
“그래.”
팽구용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색이 별로 안 좋아지는 일호대주.
‘오늘만큼은 좀 편히 보려 했건만…… 그것도 글렀구나.’
팽구용이 여타 다른 상관들처럼 깐깐하거나 굉장히 위압적으로 굴지는 않았기에 무서운 상관까지는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상관이 아닌 건 아니었고, 무엇보다 단주와 대주의 차이는 상당했기에 다소 부담스러웠다.
“왜? 부담스러워?”
팽구용은 그런 속내를 짐작하는지 표정이 썩어들어 가는 일호대주와 그 옆에서 동상처럼 굳어버린 대원을 보고서 꼽냐는 듯 물었다.
“아닙니다. 단주님과 예선전을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 다행이고.”
팽구용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살살 말려 올리면서 일호대주를 쳐다봤다.
‘이이익…….’
일호대주는 열 받으라고 작정하고 놀리는 모습에 약이 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인 것도 모자라, 계급 떼고 싸워도 질 게 뻔했다.
그러니 참을 수밖에.
대신에 팽구용이 좋아하는 당지천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듣기로는 독과 암기. 모두 금지당한 채 예선전에 나서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크게 질까 봐 걱정돼서 오신 겁니까?”
“하하하, 고작 그거로 이긴다고? 내가 평소에 말할 때 대체 뭘 들은 거냐? 지천이가 너보다 한참이나 강하다니까? 너 검 없다고 저 참가자한테 지냐?”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안 달라.”
“옙.”
팽구용이 정색한 채 단번에 일축하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일호대주는 팽구용에게 물었다.
“근데 왜 오신 겁니까? 분명 바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지천이 시합 보러 온 거지.”
“단주님이 말입니까?”
“왜? 난 그러면 안 되냐?”
‘예, 좀 꺼져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말이 일호대주의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순화한 언어로 내뱉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주님이 손쉽게 이길 싸움 구경하는 취미는 없으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원래라면 예선전 막바지나 본선에나 오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근데…….”
잠시 말끝을 흐린 팽구용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지천이가 아주 재밌는 걸 준비했거든.”
“재밌는 거…… 말입니까?”
“어, 무림맹의 파란을 불러올, 아주 뒤집어놓을 걸 준비했거든.”
상상만 해도 재밌는지 팽구용의 입꼬리가 다시금 말려 올라갔고, 일호대주는 그 웃음을 보고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대체 뭔 짓거리를 하길래 단주님이 재밌다고 하는 거야?’
정치적 능력은 떨어져도 일 처리는 확실하고, 본받아 마땅할 만큼 타의 귀감이 되는 무인인 팽구용.
무인으로서의 그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협객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람 대 사람으로 보면 그는 참 터무니없는 괴팍한 인간이었다.
‘저 인간이 재밌다고 할 정도면 최소 태천검 어르신께 찾아가 개기는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도통 범인의 생각으론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목숨을 도외시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해야 재밌다고 하는 사람이다.
헌데, 몸이 달아오른 듯 기대된다는 얼굴로 앉아 있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닐 거란 추측이 들었다.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려 들길래?’
직접 막을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드는 불안함에 일호대주는 빠르게 눈을 굴려 대기석에 있을 당지천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당지천과 73번 참가자가 호명됐다.
“44번! 73번! 앞으로!”
호명되기 무섭게 앞으로 튀어나오는 73번 참가자.
그간 긴장을 다스린 게 효과가 있었는지 다소 굳은 얼굴이긴 했으나, 투지가 충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허나…….
“뭐, 뭐야?”
대기석에 당지천이 천천히 시합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평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지금 앞으로 걸어오는 당지천에 손에는…….
-차라랑. 차라랑.
“사, 사슬낫?”
용봉지회는 물론.
무림에서도 보기 힘든.
사슬낫이 들려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