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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71화 (171/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1화

일염이가 잠시 어딜 다녀온 다음 날.

격리 처분을 받은 탓에 꼼짝도 못 하고 방에 갇힌 나는 일염이와 혈교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역시 처음에 낸 의견이 맞는 거 같아. 당가를 모함하려고 일부러 독살을 한 거야.”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긴 합니다만, 엄연히 논리 비약입니다.”

“그럴지도 모르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까 확실하다니까? 사실 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명분이 생긴 만큼 내가 독살했다고 몰아가면 용봉지회에 참여 못 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고, 독살로 인정받아서 떨어지면 가문의 이름에 큰 먹칠을 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야.”

혈교가 작정하고 용봉지회에 개입하려고 했다면 고작 사람 하나로 안 끝났을 거다.

근 3년간 개미지옥처럼 들어오는 무인들은 가리지 않고 먹어치운 놈들이 이제 와서 손속에 자비를 둔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당연히 혈술이나 자폭 공격같이 맹에서 대처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공격해서 대량 학살을 했을 게 뻔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직접 개입할 생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정확히 ‘아직’ 없다는 걸 거다.

“맹에서는 대다수 자기네 애들이 올라가길 원할 테니까 마땅한 명분을 잡은 이상 물고 늘어질 거야. 그러고선 본선이 진행될 때쯤 선심 쓰듯 혈교와 관련된 거라고 사과하고 넘어가겠지…… 아니, 사과하면 다행이지. 혈교랑 엮을 가능성도 없진 않아.”

아직 무림맹의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자기 문파의 이득을 대변하기 위해 내세운 대표들이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바보들도 아니고, 혈교의 수작인 걸 뻔히 알 텐데 이러는 것부터가 이미 난 안중에도 없다는 뜻.

까딱 잘못하면 본전은커녕 오명만 뒤집어쓸 판이다.

“아무리 그래도 천살검과 천괴도가 있는 이상 거기까진 가진 않을 겁니다. 다른 직위라면 몰라도 무림맹 내원과 외원의 최대 무력인 혈살단주와 수호각주니까 말이죠.”

“정말 그럴까? 두 분이 내 뒤를 봐주신다고 해도 아귀다툼에선 많이 힘들 텐데? 거기다, 미친 노인네가 나를 어지간히 싫어해야 말이지.”

남궁호자가 아무리 외삼촌과 친하다고 한들, 가문의 어르신이 찍어 누르면 해답 없다.

“거기다, 외원이야 대체할 사람은 많잖아.”

팽구용에 비견될 위명을 가진 무인은 없어도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무인은 널리고 널렸다.

만약 팽구용이 혈살단주 직위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면 얼씨구나 하고 자기 문파 인원을 꽂아 넣으려고 들 거다.

그래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던 찰나.

일염이는 모르겠다는 듯 양손을 들며 말했다.

“판단 근거가 부족해서 확답을 내긴 어려울 듯하니 좀 더 지켜보시죠. 저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라서 말이죠.”

그러면서도 자신감 어린 얼굴로 말하길래 어제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일염이가 창을 열더니 창 너머에서 사람 두 명이 뛰어 들어왔다.

“천살검 대협? 팽 대협까지?”

두 명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왜냐면 무림맹에 협상하러 갔던 두 인물이 동시에 왔다는 건 협상이 끝났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묻자, 팽구용의 안색이 점차 굳어갔다.

“그게 최선을 다해보긴 했으나…….”

역시나 원하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는지 팽구용이 말끝을 흐렸다.

“예상대로군요.”

대충 예상가는 상황에 고개를 주억거리자, 남궁호자는 한숨을 푹 쉬더니 팽구용에게 말했다.

“하아, 형님.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잖습니까.”

“형님? 아니, 그것보다 장난이라 하시면?”

“본선 참가가 가능하게 됐다. 축하한다. 아, 물론 예선은 거쳐야겠지만 말이다.”

“지, 진짜입니까?”

예상 밖의 결과에 반신반의하며 묻자, 그에 화답하듯 등을 팡팡 때려주는 팽구용.

아까는 장난이었다는 듯 아주 환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럼. 진짜지.”

팽구용의 확답에 절로 떠오르는 미소.

내가 용봉지회에 참여한다는 건 맹으로부터 이 사건과 나는 관련 없다고 확언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기에 기뻤고, 한편으로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하셨길래 맹에서 참가를 용인한 겁니까?”

정파라고 한들 무림맹의 모두가 의로워서 올바른 결과를 냈다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됐고, 팽구용과 남궁호자가 무림맹의 대표들을 설득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그렇기에 행여나 무슨 꿍꿍이가 있진 않은지.

혹은 팽구용이 무슨 수를 쓴 건가 싶어 물어보자, 반대로 팽구용이 내게 물어왔다.

“오히려 그건 내가 묻고 싶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그 괴팍한 노인네가 나서냐?”

“괴팍한 노인네?”

팽구용이 괴팍한 노인네를 언급하자 절로 돌아가는 고개.

내가 알기로 팽구용이 그렇게 지칭하는 사람은 딱 한 명.

태천검 남궁전유뿐이었다.

“형님. 아무리 태상 가주님께서 그런 분이라고 한들, 저희 가문 어르신입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건 좀 그렇잖습니까?”

“에이, 다 아는 사이인데 뭐 어때. 그것보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대체 어떻게 하면 그 양반이 직접 찾아와서 무림맹을 뒤집어 놓냐?”

“무림맹을 뒤집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내게 이상하게 굴긴 했어도 남궁세가의 태상 가주나 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경거망동할 리 없을 텐데 뒤집어놨다고 하니 의아하게 물었는데, 팽구용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글쎄, 우리가 교화각에서…… 교화각은 무림맹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인데, 거기서 대표들이랑 말로 드잡이질하고 있으니까 ‘잘 보고 배워라. 위협이란 이렇게 하는 거다’라면서 시원하게 검 뽑고 협박하더라고.”

“예? 그거 거의 선전포고 아닙니까?”

“그래, 맞아. 크, 어찌나 멋지던지 역시 성격이 괴팍하긴 해도 배울 점이 참 많은 무인이야.”

“…….”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한 이야기.

한 가문의 어른이라는 자가 힘으로 찍어 누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됐는데, 그걸 자기 손으로 죽이려던 나를 위해서 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

재차 일염이를 보며 해명을 요구하자 일염이가 나지막이 전음을 보냈다.

-명패의 대가로 해결했습니다.

-명패라면 이전에 썼잖아?

-겨우 그거랑 맞바꾸기엔 태천검의 이름값이 너무 작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잘못하면 무림맹과 사이가 뒤틀릴 수 있는데?

-태천검이 앞뒤 안 가린다고 소문이 나 있긴 하나, 그만큼 저울질 잘하는 인물은 없을 겁니다. 대놓고 그렇게 나섰다면 분명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걸 겁니다.

-그래?

솔직히 제대로 납득하진 못했지만, 일염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호자가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맹에서 참가를 용인했다고 한들, 웃고만 있을 때는 아니다. 이번에 참가하게 되는 대신에 독과 암기는 쓰지 못하는 거로 합의를 봤다.”

“암기까지 전부요?”

“그래. 태상 가주님께서 나셨기에 다들 순순히 물러났지만, 형님께서 처음부터 그쪽으로 협상을 하셔서 태상 가주님께서도 그 정도 선에서 그친 듯하다…… 아니면, 너를 시험하는 걸 수도 있고.”

태천검의 속내를 도통 짐작할 수 없다는 듯 아리송한 얼굴을 한 남궁호자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쨌든, 독과 암기 없이 가능하겠느냐? 어제 모용집을 상대한 걸 보면 지진 않을 것 같다만, 형님께서 말하신 대로 얘들을 혼내주는 역할까진 무리일 것 같은데.”

남궁호자는 모용집과의 공방을 직접 보진 않았는지 염려를 표했는데, 내 실력을 잘 아는 팽구용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이야기 했다.

“얘가 그 정도도 안 될 거 같아? 나도 이야기 들어서 아는데, 그거 봐준 걸 거다. 원래라면 삼초지적도 안 되는 놈이야.”

“하지만 형님. 모용집까지는 이길 수 있지만, 곤륜파의 아이까진 이기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모용집과는 수준 차이가 크잖습니까.”

“에헤이. 괜찮다니까.”

괜히 나 혼자 제약을 받고 참가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남궁호자가 연신 우려를 표하는데도 팽구용은 괜찮다고만 일관했다.

“애초에 그 정도도 못 할 거였으면 내가 부르지도 않았어.”

“그래도 독과 암기도 없이 어정쩡하게 이기면 괜히 묻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만.”

연신 옥신각신하는 팽구용과 남궁호자.

나는 문득, 이기는 건 둘째 치고 내 실력이 하향 평가를 받게 될 거란 남궁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뭔가가 많이 빠진 느낌이 들었다.

‘무림맹에서 나를 엿 먹이려고 한 게 그 녀석들 탓인데, 평범하게 이기면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이잖아?’

애초에 팽구용의 부탁도 한번 제대로 망신살 뻗치게 해주는 거였다.

그런데 평범하게 이겨 버리면 별로 화제도 안 되고, 절초를 안 썼기에 이겼다는 정신 승리하게 될 여지를 주게 될 거다.

‘은혜를 갚으러 온 주제에 팽 대협의 부탁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니. 이건 당가의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

개인적인 원한도 원한이지만, 은혜도 제대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잖아?’

“천살검 대협. 독살한 게 제가 아님에도 맹에서 저를 배제하려 한 건 자기 문파 아이들이 주목받길 원해서겠죠?”

“그렇지.”

“그렇다면 독과 암기 없이는 좀 힘들겠네요.”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모용집도 손쉽게 이긴 녀석이 그 정도로 힘들다니?”

“이기는 건 무리가 없지만, 좀 밍숭맹숭하게 이기지 않나 싶어서요. 아시다시피 암기를 제외하면 권과 장뿐이라서요.”

싸움을 화려함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혈룡파천권이 화려한 권법도 아니고, 단순히 권법으로 싸우는 건 화제성이 영 별로였다.

“밍숭맹숭하다니 비무에 그런 게 어딨어?”

“팽 대협의 부탁은 분명 후기지수들에게 쓴맛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이겨 버리면 제대로 된 체감을 못 하지 않을까 염려되서요.”

“흠…… 그것도 그렇긴 한데, 상황이 상황이잖느냐. 설마 뭔가 좋은 수가 있어서 이야기 한 거냐?”

“예, 제가 좋은 수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팽구용을 보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는 팽구용.

옆에 있는 남궁호자까지 나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길래 나는 입꼬리를 더 말면서 물었다.

“분명 ‘독과 암기’만 못 쓴다고 하신 것 맞죠? 다른 건 아무거나 써도 된다는 이야기겠죠?”

“그렇지. 그거야 다른 애들도 쓰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냐…… 설마?”

팽구용은 물론.

내 혈육이 누군지 아는 천살검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쳐다보길래 나는 그 생각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제가 짧은 기간에 속성으로 배운 탓에 삼촌과 같은 수준을 보여 드릴 순 없겠지만, 으레 무공이란 게 약점을 알면 가볍게 이길 수 있잖습니까. 그러니…….”

자고로 관심을 받으려면 아주 특출나지 않아도 참신한 걸 보여줘야 하는 법.

그렇기에 나는.

용봉지회의 재앙이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부터 제가 부르는 무기 하나씩만 구해다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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