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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70화 (170/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0화

“…….”

남궁전유의 협박에 한없이 고요해진 회의장 내부.

서늘하다 못해 바늘로 피부를 찌르는 듯한 감각에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해 침묵이 내려앉았다.

-꿀꺽.

회의실에 크게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울대 움직이는 소리.

다들 한참을 가만히 있던 대표들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고, 작금의 상황이 머리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태천검이 와서 깽판을 칠 줄이야.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태상 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행차한단 말인가?’

그 누구도 회의실에서 무기를 뽑아선 안 된다.

이 불문율이 존재하는 건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위함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의 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무림의 강자존이 아닌, 가문이나 문파를 등에 업고 혀로 저마다의 이득을 챙겨가는 자신들만의 전쟁터였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검을 뽑았다면 일심동체가 되어 압박을 가하며 자리를 지켜냈는데……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불문율을 어긴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태천검이었기에.

“왜 대답들이 없소? 혹시 내 말이 우스워서 그런 것이오?”

비릿하게 입꼬리를 만 남궁전유가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검을 살짝 치켜세우자, 점창파의 대표가 아연실색한 채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닐세. 우리가 어찌 자네를 우습게 여기겠나. 자, 잠시 다른 생각이 나서 그랬네.”

행여나 싸움이라도 날까 봐, 점창파의 대표가 겁먹은 듯한 모습으로 혼자 내빼자, 화가 난 곤륜파의 대표가 전음을 보냈다.

-아니, 자네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위협 좀 받았다고 바로 꼬리를 말다니 자네가 그러고도 원로인가?

-꼬리를 말다니? 말조심하게나. 내가 도와줬던 건 어디까지나 우리 문파가 구파일방의 일원이기 때문이지, 결코 그쪽 의견에 동조해서 그런 게 아니었네.

남궁전유의 기세에 겁을 지레 먹었다고 한들, 다들 구를 대로 구른 잔뼈 굵은 무인들이다.

당연히 자신의 감정 하나 제대로 통제 못 해 내색할 이는 한 명도 없었고, 점창파의 대표가 겁에 질린 듯 말한 건 이번 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이리도 쉽게 물러나는 게 말이 안 되잖는가!

-애초에 처음부터 수틀리면 그냥 손 떼겠다고 말했잖는가. 혈교가 나타난 시점에서 우리끼리 싸우는 건 혈교만 좋아할 일이잖는가.

-혈교의 문제가 중요한 건 나도 아네. 다만, 그 아이가 당가의 소가주일세. 그럼 일단 내치고 생각하는 게 맞는 일이네.

-글쎄. 우리 쪽 애들은 참가에 의의를 두는 아이가 대다수라서 굳이 내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당가와 크게 연이 없었소. 그러니 손 떼겠소.

점창파의 대표가 더 나눌 이야기는 없다는 듯 조용히 팔짱을 끼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소림파의 대표와 화산파의 대표도 팔짱을 꼈다.

-아미타불. 소승은 이만 물러나겠네.

-우리도 빠지겠네.

-소림은 그렇다 치고, 화산까지? 이번 용봉지회에 사손이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네.

-한데 왜?

-제자 놈의 부탁이 있었다고 한들, 태천검은 무릴세.

-허어, 자네도 겨우 위협 한 번 받았다고 무서워하는 겐가? 아무리 태천검이라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깽판을 칠 리가 없잖는가?

-자네. 소싯적에 태천검이랑 겨뤄본 적 없는가? 하긴, 그러니까 그렇겠지.

화산파의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남궁전유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전음을 보냈다.

-애초에 저 모습을 보고도 상식이란 게 통할 거라 기대하는 게 우습군. 굳이 말리지는 않겠으니 알아서 해보게나.

제 할 말을 마친 화산파의 대표가 알아서 하라는 듯 태평하게 차를 들이켜자, 곤륜파의 대표는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종남파도 이만 빠지겠네. 조금 얽힌 일이 있어서 더 하기엔 부담스럽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종남파까지 빠진다고 하자, 곤륜파의 대표는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지 않은 대표들을 쳐다봤다.

“흐음…….”

뭔가 고민하는 듯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

바로 손 떼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적대하기도 힘드니 대충 간을 보는 듯한 눈치였다.

‘간을 안 보는 건 아미파, 청상파, 개방, 모용세가 정도인가.’

아미파. 청성파. 개방. 모용세가.

문파 하나하나 놓고 보면 근래 맹에서 힘 좀 쓰는 문파들의 대표이긴 하나, 상대는 남궁세가다.

자신을 포함해 고작 다섯으론 수가 너무 적었다.

‘치사하게 간 보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나, 일단 저들의 지지를 얻어야 태천검을 압박할 수 있겠어.’

태천검이 직접 나온 이상 어지간한 규모로는 압박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곤륜파의 대표는 일단 조용히 되물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왜긴 왜겠소. 그러고 싶어서지.”

논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남궁전유의 말.

어떤 주장을 하든 꼬투리를 잡아서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만, 아예 여지를 주지 않았다.

“논리를 이기는 것은 무논리라고 하더니만 그게 정말이었구려. 가문의 어른이라는 자가 어찌 이래 안하무인 하게 나온단 말이오?”

“내 시간은 줄 만큼 준 것 같은데, 꼬우면 덤비시오.”

“…….”

어떤 식으로 흠집을 내려고 하든 간에 불통.

뭔가 이야기가 되어야 꼬투리를 잡을 텐데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해버리자, 물꼬를 다른 쪽으로 틀었다.

“정녕 진심인 거요? 다른 문파도 아니고, 당가의 아이잖소.”

“맞소. 다른 문파라면 몰라도 당가의 아이가 활개 쳐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잖소.”

“대체 이유가 뭐요? 용봉지회에 참여해서 독살까지 하는 잔악무도한 아이의 뒤를 봐줄 정도면 필시 진짜 이유가 있을 터. 한번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오.”

“이유라…….”

어이없다는 듯 말꼬리를 흘리는 남궁전유.

정치판의 의리가 그러하듯 이미 3할이 떨어져 나가고 3할은 지켜보는 추세다.

남궁전유가 보기엔 이미 끝난 상황과 다름없는데,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아득바득 발악하는 게 심히 하찮았다.

“진짜 이유 같은 건 없소. 뭐, 그래도 원할만한 답변을 해주자면 독살할 때 생소한 독을 쓴 건 당연히 뒤집어씌우려고 한 거 아니겠소. 그러니 세작들이나 할 법한 짓은 그만두시오.”

“세작이라니?”

“따로 혈교도가 있는데도 지천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건 필시 혈교도의 짓 아니겠소.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인 게 혼란을 초래하고 지천을 떨어뜨리려는 속셈일 것이오.”

“아니 그게 무슨 억지요? 고작 그 아이 하나를 떨어뜨리겠다고 일을 벌이다니. 거기다. 우리 중에 뭔가에 눈이 멀어 배반한 이가 있단 말이오? 고결한 무림맹의 일원인 우리가?”

마치 큰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대표 몇이 발끈했지만, 남궁전유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잖소?”

“모함도 정도껏…….”

개방 대표가 화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던 찰나.

“앉으시오.”

남궁전유의 짧은 명령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우우웅.

어느샌가 남궁전유의 손을 떠난 검이 청아한 공명음을 내며 개방 대표의 얼굴 앞에 떠 있었기에.

“이, 이게 무슨…….”

“더는 맹에서 혈교도가 활개 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소.”

공중에 떠오른 검이 대표들을 훑듯 한 바퀴 돌면서 대표들을 가리키고, 다시금 개방 대표 앞에 멈춰 서자, 인상을 찌푸린 채 가만있던 인원 몇이 탁자를 치며 말했다.

-탕!

“아니!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핍박하는 게 말이 되오? 우리는 각 문파의 대표! 대표란 말이오.”

“이건 엄연히 우리를 무시하는 행태요. 조용히 두고 볼 수 없소.”

“맞소. 그리고 만약 혈교의 세작이 들어와 있다면 어떻게 가릴 거요?”

남궁전유가 보란 듯이 대표단 전체를 압박하자, 간을 보던 이들도 의심받는 상황 자체가 불쾌해 한 마디씩 보탰다.

허나, 남궁전유는 안색 하나 안 변한 채 태연히 말했다.

“대표든 뭐든 하나씩 썰다 보면 진실을 말하는 이가 하나쯤 나오지 않겠소?”

“…….”

동맹을 하나씩 썰어본다니 미친놈.

정말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행태였지만, 그걸 순순히 입 밖으로 낼 만한 사람은 없을 듯했다.

……물론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미친 노인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팽구용이 시원하게 입 밖으로 남궁전유를 욕하자, 이기어검이 빛의 속도로 날아와 틀어박혔다.

-푹.

비싼 탁자를 마치 두부 가르듯 파고든 검이 팽구용을 비웃듯 공명음을 몇 번 내더니 이내 아까의 속도로 다시 공중에 떠올랐다.

“봐주는 건 한 번뿐이다. 빌어먹을 놈아.”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검을 원래대로 돌린 남궁전유가 팽구용을 보고 나지막이 경고했고, 팽구용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슬쩍 눈을 돌렸다.

“…….”

그리고 보고만 있던 대표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아무리 위협을 한다고 하나, 팽구용을 이용해서 이렇게까지 보여줄 줄이야.’

팽구용이 평소에 우발적이고 생각 없어 보이는 행동을 하긴 해도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했다.

그렇기에 방금 전 팽구용이 욕을 한 게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다들 남궁전유의 눈을 피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찰나.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고, 평범해 보이는 무인 한 명과 부채를 든 사람이 들어왔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어르신. 이만하시면 충분한 듯합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무림맹의 참모이자 제갈세가의 대표인 제갈정과 무림맹주이자 무림십대고수의 한 명인 염왕이었다.

“군사! 맹주!”

“왜 이제 오셨소? 얼른 태천검 좀 말려주시오.”

가히 구세주라도 본 듯한 얼굴.

궁지에 몰렸던 대표들은 둘의 입장을 환히 반기며 남궁전유를 말려달라고 했고, 반대로 남궁전유는 똥 씹은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회의를 진행해야 할 녀석들이 왜 나가 있었느냐?”

“무림맹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라면 그렇겠습니다만, 단순히 이권 다툼으로 변했잖습니까. 저희는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맹주는 왜 나가 계셨소?”

“저야, 뭐. 혈교도 잡으러 왔고, 허수아비잖습니까.”

무림맹주는 일인전승의 문파 출신의 고수.

가진바 무력은 뛰어나나 뒷배가 없어서 적당히 명망 높고, 적당히 중재하기 좋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혈교도를 잡는 문제라면 모를까.

이렇게 이권 다툼이 벌어지는 날이면 허수아비에 불과해 그냥 밖에서 시간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걸 남궁전유도 모르지 않기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제갈정을 보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맹주는 그렇겠지만, 네놈은 끼어들 생각이 없긴, 어차피 다른 놈들이 잘 구워삶을 거니까 만에 하나를 생각해서 나와 있던 거잖냐.”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혈교 먼저 색출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일 좀 하는 중이었습니다.”

“흠…….”

정석적이고 바른말에 남궁전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제갈정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남궁전유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중재해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건 지천이의 본선 참가다.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여부가 있겠냐는 듯 제갈정이 저자세로 나오자, 남궁전유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허가를 내렸다.

그러자, 제갈정은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럼 제가 직접 정리하겠습니다.”

-탁.

부채를 펼친 제갈정이 대표들을 보며 말했다.

“아까 혈살단주께 말하셨듯이 서로 한 보씩만 양보하면 좋을 듯합니다. 당지천이 본선 참가는 허용하되, 독과 암기는 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제갈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의하는 남궁호자와 팽구용.

뒤이어 맹주까지 나서서 찬성표를 던지자, 팔짱을 꼈던 대표들도 하나씩 동의했고, 결국 극렬히 반대하던 이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의하오.”

“그러면 이 사안은 여기서 종결짓는 거로 하겠습니다. 수호각주님께서는 직접 가서 이야기를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들은 제갈정의 말에 교화각에 뛰어내린 남궁호자가 저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분개심이 들었지만, 눈앞에 남궁전유 때문에 내색하진 못한 채 속으로 분을 삭여야만 했다.

‘당지천 네 이놈. 도대체 무슨 수로 태천검을 움직였는지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기필코 떨어뜨려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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